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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처럼 열 달 산고 겪어야 살아 있는 '각궁' 탄생

중앙일보 2014.07.24 00:07 1면 지면보기
권영무 궁장이 부린활(시위를 벗긴 활) 사이로 얹은활(시위를 걸어 놓은 활) 시위를 바라보고 있다.


천안시와 자매결연을 맺은 미국 비버튼시 고교생 30여 명이 우리나라 전통문화 체험을 위해 지난 2일부터 8일까지 천안을 방문했다. 이들이 낯선 한국 전통문화 가운데 최고로 손꼽은 건 ‘활’이었다. 한류 열풍 때문인지 한국 역사 드라마와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국궁에 큰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외국인들의 관심과는 달리 우리나라에선 국궁이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고 있다. 어려운 여건에서도 활 만들기로 전통을 계승하고 있는 우리 동네 국궁 명인 권영무 궁장을 만났다.

[우리 동네 명인] 권영무 궁장



아홉 살 때 활 잡아 35년 외길



“한국의 전통 활은 미국이나 영국 활에 비해 길이는 짧지만 더 무겁고 폭이 넓어요. 직접 쏴보면 알 겁니다. 탄성이 엄청나기 때문에 화살이 놀라울 정도로 빠르고 힘차게 날아가죠.” 미국에서 온 학생들이 우리 활 체험에 굉장한 관심을 보였다는 말을 하자 권영무(56)씨는 한국 활의 우수성을 자랑했다.



활이 좋아 35년간 활 만드는 일에만 전념하고 살았다는 권씨는 천안시 병천면에서 13대째 우리나라 전통 활 ‘각궁(角弓)’을 제작하고 있다. 그는 활의 고장으로 유명한 경북 예천에서 태어나 자랐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활을 가까이 했다.



 “활을 쏘고 다룬 건 아홉 살 때부터였죠. 어린 시절에 활을 만질 수 있었던 건 제 고향이 활 제작을 업으로 하는 권씨 집성촌이었기 때문입니다. 온 마을사람들이 활을 만들었기 때문에 뛰어놀던 동네 곳곳에는 항상 활이 있었어요.” 형제와 친척들이 활을 제작하는 모습을 어깨너머로 본 적은 있었지만 정작 자신이 활을 만드는 일을 하게 될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활을 만드는 일이 쉽거나 간단한 일이 결코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형이 그에게 활 만들기를 계승해 달라고 했다. 돈이 되는 일도, 그렇다고 명예를 얻는 일도 아니었다. 전통문화 계승이란 자부심만으로 활을 만들어 달라는 형의 부탁으로 시작한 일에 35년 동안 매달려 왔다.



물소 뿔, 소 심줄로 만들어



“각궁은 살아 있는 활입니다. 모두 천연재료이기 때문이죠. 각종 동·식물 재료가 어우러진 활은 마치 하나의 생명체처럼 유연하고 강한 탄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각궁은 참나무, 산뽕나무, 물소 뿔, 소 심줄, 대나무를 민어부레풀로 결합해 만드는 활이다. 우리나라에는 정량궁·예궁·목궁·철궁·철태궁 등 10여 종류의 활이 있었지만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은 각궁뿐이다. 그래서 보통 ‘국궁(國弓)’이라고 부른다. 우리나라 각궁은 뛰어난 탄력성 덕에 화살이 멀리 날아가고, 파괴력이 좋아 세계 최고 수준이다.



서양식 활은 나무에 활시위를 달아 반달 형태가 되도록 잡아당겨 쏘지만 각궁은 물소 뿔과 소 심줄을 붙여 둥글게 말린 나무를 180도 뒤집고, 다시 활시위를 걸어 쏘는 방식이기 때문에 화살이 빠르게 멀리 날아간다.



“사람과 활은 많이 닮았습니다. 대나무는 사람의 몸으로 따지자면 뼈인 셈이고, 물소 뿔과 소 심줄을 활의 안팎에 붙이는 걸 보면 우리 몸의 근육과 살이라고 생각하면 될 거예요. 단단하고 강하지만 유연해 잘 부러지지 않는 점까지, 활을 만들다 보면 사람과 비슷한 점이 무척 많다는 생각이 듭니다.”



활쏘기는 건강증진·정신수양에 좋아



각궁 제작엔 준비작업부터 완성까지 열 달 정도 걸린다. 주로 여름에 재료들을 마련해 쓰임새에 맞게 잘 다듬어 놓고 찬바람이 부는 가을부터 본격적인 접착 작업에 들어가 이듬해 3월이 돼야 비로소 완성된다. 열 달 동안 과정이 하나의 생명이 태어나는 사람과 흡사하다.



권씨는 활 만드는 것 말고도 활쏘는 실력도 수준급이다. 직접 만든 각궁으로 25년간 충남 대표로 활약하며 전국궁도대회에서 여러 차례 입상했다. 그가 가르친 활쏘는 제자만도 어림잡아 300명이 넘는다. 명맥을 잇기 위해 후배를 양성하는 데도 힘쓰고 있다.



활쏘기는 단순하게 사물을 명중시키고 겨루는 무예라기보다 스스로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을 수양하는 측면이 큰 운동이다.



“요즘 활터에 가면 그냥 쏴서 맞히는 것만 가르치는데 사실 옛 어른들이 가르친 호흡법대로 하면 몸과 마음이 다 좋아지는 게 제대로 된 전통 활쏘기입니다. 활터에 가면 등이 굽은 사람이 없지요.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하나같이 자세가 꼿꼿하고 당당해요. 활쏘기는 바른 자세에서 시작해 바른 자세로 끝나는 운동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활과 화살은 단순한 무기가 아니었다. 활쏘기는 임금이 갖춰야 할 덕목이었고, 선비들은 활쏘기를 통해 호연지기를 기르고 한데 어울려 실력을 겨루며 풍류를 즐겼다. 활터에 가면 모든 궁도인이 마음에 새겨야 할 궁도 9계훈이 있다. ▶몸과 마음을 바르게 해야 하며 ▶사랑과 덕행으로 본을 보이고 ▶겸손·성실하게 행하며 ▶행실을 신중히 하고 절조를 굳게 지키고 ▶곧고 청렴하며 용감하고 결단성을 지니며 ▶예의범절을 엄격히 지키며 ▶활쏠 때는 말하지 말 것이며 ▶나를 이긴 사람을 원망하지 말며 ▶남의 활을 당기지 말라는 가르침이다. 권씨도 활터에서 제자들을 가르칠 때 9계훈을 지킬 것을 당부한다. 마음을 먼저 다스릴 수 있어야 활도 다스릴 수 있는 법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는 요즘 영화나 사극을 통해 활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반갑기도 하지만 활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낄 때도 많다.



 “TV 사극이나 영화를 보면 답답할 때가 많아요. 활은 우리 국궁인데 활쏘는 자세는 양궁식이거나 국적불명이더군요. 국궁과 양궁은 활 구조부터 다른데 어떻게 쏘는 자세가 같을 수 있나요. 한류 열풍 탓에 우리 영화나 드라마가 해외로 많이 나간다는데 제대로 해야지요. 활이 사용되는 부분을 잘 알고 했으면 좋겠어요. 우리 전통 활이 얼마나 멋있는 것인지 세계인에게 보여줬으면 좋겠네요.”



글=강태우 기자, 이숙종 객원기자 , 사진=채원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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