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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일기] 광역버스와 실험용 모르모트

중앙일보 2014.07.24 00:03 종합 29면 지면보기
광역버스 입석 금지로 서울 사당역에서 길게 줄을 서 버스를 기다리는 승객들. [김경빈 기자]


이승호
사회부문 기자
“충분히 다닙니다. 한 시간밖에 안 걸려요.”



 기자는 언제나 자신 있게 말해왔다. 경기도 수원에서 서울로 출퇴근한다고 하자 “멀어서 어떡하느냐”고 묻는 이들에게 말이다. 믿는 구석이 있어서다. 기자가 사는 수원시 이목동에서 7780번 직행좌석버스(광역버스)를 타면 서울 사당역까지 20~30분이 걸린다. 다시 사당역에서 지하철을 타면 서울 일대 웬만한 곳은 집에서 한 시간가량이면 갈 수 있다.



 지난 22일 출근길에도 기자의 장담은 통했다. 기자는 오전 7시11분 이목동 정류장에서 버스를 타고 27분 만에 사당역에 도착했다. 광역버스 좌석제 시행 첫날인 지난 16일처럼 만석이 된 버스 13대를 놓치고 1시간30분 가까이 정류장에서 기다리는 불상사는 벌어지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버스가 입석 승객을 태웠기 때문이다. 버스기사 박모(38)씨는 “현실적으로 아침 출근길에는 승객이 워낙 많아 좌석제를 유지하기 어렵다” 고 쓴맛을 다셨다.



 광역버스 좌석제 실시 일주일이 지났다. 제도 시행 직후 출근 현장에선 지각사태 등 각종 혼란이 이어졌다. SNS 등에선 “자동차를 사라는 구매 장려 정책이냐” “억울하면 서울에서 살라는 거냐”는 등의 불만이 쏟아졌다. 22일 박근혜 대통령까지 나서 “제도 시행 전에 국민 피드백을 받지 않으면 국민이 실험 대상이 된다”고 질타했다. 결국 남경필 경기도지사는 23일부터 광역버스 입석을 공식 허용했다. 출근길 혼란은 진정됐다.



 정부의 광역버스 좌석제 실시는 뚜렷한 법적 근거가 있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광역버스의 입석을 금지하는 도로교통법 시행령은 지난해 6월 개정됐다. 그럼에도 정부와 버스회사들은 그동안에는 입석을 허용해왔다. 출근 인원에 비해 광역버스 수가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지난해 출근 시간에 경기도와 서울을 오가는 광역버스는 1371대(112개 노선)다. 승객 9만8222명 중 1만4197명이 입석으로 출근했다. 그럼에도 좌석제 시행에 앞서 국토부는 총 222대의 버스만 늘렸다. 출근대란이 올 것이 뻔했음에도 제대로 된 대책을 세우지 않았던 셈이다. 정부는 2층버스 도입이나 버스 뒷문을 없애 좌석을 늘리는 대책을 검토 중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서울로 들어오는 출근 인원을 광역버스와 나눠 감당할 대체 교통수단을 마련하지 않는다면 광역버스 좌석제 정착은 요원하다.



 지난 4월 세월호 참사 후 안전은 우리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가치가 됐다. 입석 승객을 가득 싣고 달리는 광역버스는 분명 위험하다. 하지만 국민 생활에 직결되는 중요한 정책을 충분한 대안 없이 실시하는 졸속행정은 더 큰 피해를 불러올 수 있다.



이승호 사회부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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