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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범죄, 악마는 가까운 곳에 있었다

중앙일보 2014.07.21 00:52 종합 12면 지면보기
“승미야, 아빠가 뽀뽀하자고 할 때는 이를 꼭 악물어.”


중앙일보·JTBC 공동기획 - 성폭력보고서<상>
작년 가족 성폭력 4479건
'모르는 사람'보다 많아
가족끼리 쉬쉬 신고율 낮아
솜방망이 처벌, 제2 피해 키워

 영미씨(가명·26)는 10살 아래인 동생 승미(가명·16)에게 어릴 때부터 이런 당부를 해야 했다. 몇 년 전부터 엄마와 함께 살게 된 의붓아버지는 뽀뽀를 할 때마다 딸의 입안에 혀를 넣으려 했다. ‘아버지가 딸에게 하는 애정표현인 걸까?’ 몇 번을 곰곰이 생각해 봤지만 이건 아닌 것 같았다.



 2009년 당시 10살이던 승미도 그랬다. 자신을 찾는 의붓아버지의 목소리가 악마의 목소리처럼 들리기 시작했다. “너희는 아빠랑 뽀뽀할 때 아빠가 혀를 집어넣어? 아빠가 옷 안에 손을 넣어서 가슴이나 엉덩이를 만진 적도 있어?” 또래 친구들에게 물었다. 친구들은 ‘그런 적이 없다’고 했다.



 전남의 한 도시에 사는 영미·승미 자매는 10년 전 어머니의 재혼 이후 2011년까지 의붓아버지에게 지속적으로 성폭력 피해를 당했다. 두 자매는 가해자가 ‘아버지’라는 사실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그런데 특수하게 보이는 두 자매의 사례는 우리 주위에서 결코 드문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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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성폭력 가해자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집단이 ‘친인척’이라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한국성폭력상담소의 2013년 통계다. 전체 피해 사례 3만971건 중 ‘부모·형제를 포함한 친인척’이 가해자인 경우가 4479건으로 가장 많았다. 집계를 시작한 이후 ‘모르는 사람(4473건)’을 앞지른 건 지난해가 처음이다. 황정임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흔히 성폭력은 ‘모르는 사람’에 의해 우발적으로 발생한다고 생각하지만 이는 잘못된 통념”이라며 “실제 상담 현장에서 보면 가족에 의한 피해가 심각하다”고 지적했다.



 친족 성폭력이 근절되지 않는 데는 솜방망이 처벌을 비롯한 취약한 보호망도 한몫한다. 범죄가 지극히 개인적인 공간인 ‘가정’내에서 이뤄지다보니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경우도 허다하다. 영미·승미 자매의 어머니 박모씨는 뒤늦게야 딸들의 피해를 알았다. 자매끼리도 오랫동안 서로에게 말을 안 했다. 자신 때문에 가정이 깨지는 게 두려워서였다. 잦은 부부싸움과 남편의 폭력으로 이혼 결심을 한 박씨가 자매에게 이를 털어놓자 그때야 승미가 입을 뗐다.



“엄마, 아빠랑 같이 안 살 거면 나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나는 아빠가 너무 싫어. 내가 싫어하는 짓을 너무 많이 해.” 승미의 말은 충격적이었다. 의붓아버지는 대중목욕탕에 갔다 온 승미에게 “누구 가슴이 제일 컸니?”라고 물어보는가 하면 한창 성장기였던 아이를 무릎에 앉혀놓고 몸을 더듬었다. 승미의 이야기를 듣게 된 언니 영미씨 역시 그제야 박씨에게 모든 걸 털어놨다. 박씨의 가슴은 무너져 내렸다.



 고민 끝에 박씨는 남편을 경찰에 신고했다. 교사였던 남편은 범행을 시인하지 않았다. “아이들에게 뽀뽀를 한 적이 있지만 혀를 넣은 적은 없고 귀여워서 엉덩이를 토닥거린 일은 있지만 옷 속에 넣어 만진 적은 없다”고 해명했다. 지난 1월 광주고등법원은 의붓아버지에게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의붓아버지에 대해 ▶형사처벌을 받은 전력이 전혀 없는 초범인 점 ▶폭력 등의 행사가 거의 없었던 점 등을 감안했다고 밝혔다. 의붓아버지는 자신의 혐의를 인정하지 않고 대법원에 상고한 상태다. 하지만 검찰 측은 더 이상 상고를 하지 않았다. ‘양형 부당’만으로는 적법한 상고 이유가 되지 못한다는 이유에서다.



 이 사건을 추적해 온 김재련 여성가족부 권익증진국장은 “어린 자매에게 지속적으로 성폭력을 행사한 의붓아버지의 잔인한 죄질에 비해 판결에서 면죄부가 너무나도 많이 주어졌다”고 지적했다.



 김 국장은 “성폭력 사건 10건 중 1건 정도만 신고로 접수된다”며 “특히 친족 성폭력의 경우 실제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사건의 비율이 매우 높다”고 말했다. 우리 주위에 드러나지 않은 또 다른 ‘영미·승미’ 자매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얘기다. 실제로 취재진과 여성가족부의 공동조사 과정에서 친아버지로부터 성폭력을 당한 뒤 가족에게 알렸다가 더 큰 상처를 입은 사례 등이 드러났다.



홍상지 기자



◆ 제작지원 : 미래창조과학부·방송통신전파진흥원

◆ 취재협조 : 여성가족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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