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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상트 페테르부르크 ‘백야의 별’ 축제를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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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2일 밤 10시 공연에 맞춰 마린스키 극장 2관을 찾았다. 기본적으로 오페라 극장이지만 콘서트도 치를 수 있는 곳이다. 내부가 러시아의 대표적 보석인 호박(琥珀)색으로 장식돼 있으며 동선이 매우 독특하게 꾸며져 있었다. 넓은 창과 개방적인 스타일로 바깥 경치를 만끽하게 해주는 파격적인 디자인이 돋보였다.
이날의 주인공은 러시아 클래식 음악의 두 거물, 게르기예프가 지휘하고 피아니스트 데니스 마추예프가 협연하는 콘서트였다. 게르기예프 공연 치고는 준수하게 오후 10시 10분에 시작했다. 마추예프는 이날 무려 두 곡의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했다. 먼저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1번을 연주했는데, 1번은 2번이나 3번에 비해 자주 연주되지 않지만 이 곡 역시 명곡이라는 걸 깨닫게 해주는 설득력있는 연주였다.
하지만 첫 음이 들어갈 때 게르기예프와 마린스키 오케스트라의 호흡은 정확히 잘 맞지 않았다. 그리고 협연자 마추예프와 게르기예프가 정확히 타이밍을 맺지 못한 부분도 아쉬웠다.
첫 곡을 연주한 후 거의 쉬지도 않고 마추예프는 무대에 다시 등장해 두 번째 협연곡인 그리그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두 곡 모두 백야가 있는 북구의 두 나라 러시아와 노르웨이의 피아노 협주곡들로, 공연장에 들어오기 전 아직도 해가 지지 않았던 백야의 바깥 풍경과 어울려 기막힌 정서적 감흥을 불러일으켰다.
마지막 곡은 라벨의 볼레로였다. 게르기예프는 본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이쑤시개 같이 생긴 작은 지휘봉을 손에 쥐고 독특한 떨림의 지휘법으로 이 남녀의 성을 묘사한 작품을 에너지 넘치게 이끌어나갔다. 개인적인 경험으로는 가르시아 나바로가 이끌고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했던 바르셀로나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볼레로 이후 최고의 볼레로 실연이었다.
마트비옌코의 ‘안나 카레리나’ 발군
최근 게르기예프가 무척 중요하게 여기는 예술적 방향 중 하나는 소비에트 러시아 시절 작곡가들의 재발견이다. 어떤 면에서는 푸틴이 추구하는 소비에트적 ‘강한 러시아’로의 회귀와 궤를 같이한 듯 보인다. 지난해에 이어 현대 소비에트 작곡가인 로지온 쉐드린의 작품을 다시 리바이벌하고 있었는데, 모스크바 볼쇼이극장의 주요 레퍼토리였던 그의 발레 작품 중 ‘카르멘 모음곡’과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 등을 올리고 있었다. 알렉세이 라트만스키가 2010년 새롭게 안무한 ‘안나 카레니나’를 22일 오후 7시에 역시 마린스키 제 2극장에서 감상했다.
작품 속 19세기 풍 귀족들의 의상은 에르미타주 박물관에서 특별전시하고 있는 로마노프 왕조의 의상들이 살아서 나온 듯 화려하고 패셔너블했다. 명쾌한 연출과 빠른 극 전개는 쉬는 시간 포함 1시간 50분의 러닝타임이 언제 흘러갔는지 모를 정도였다.
막이 열리면 기차역에서 몸을 던져 죽고마는 비운의 주인공 안나 카레니나의 모습이 등장한다. 안나의 겁에 질린 듯한 얼굴이 무대 스크린 위에 커다랗게 떴다. 올해 페스티벌에서는 마린스키의 간판 발레리나인 울리야나 로파트키나와 아나스타샤 마트비엔코 두 명이 더블캐스팅으로 출연했는데, 이날 마트비옌코의 미모는 아주 빛났다. 9등신의 마트비옌코는 사랑에 빠져 자신의 감정대로 살았으나 사회의 억압과 규율, 냉대와 질타에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되는 19세기 러시아 여성 안나 카레니나 역을 매우 빼어나게 소화해냈다. 기차 장면에서 기차를 한바퀴 무대 위에서 회전시키면서 객실 내부를 보여주는 연출도 기발했다.
라트만스키의 안무는 특히 2막에서 빛났다. 브론스키가 낙마하게 되는 경마씬을 과연 어떻게 풀어낼 지 매우 궁금했는데 남성군무 장면을 경주마들처럼 역동적으로 풀어냈다. ‘백조의 호수’ ‘돈 키호테’ ‘지젤’ 같은 고전 발레에서 최고의 역량을 발휘해온 러시아 발레가 드라마 발레로의 새로운 변신과 진화를 꾀하고 있음을 증명해준 공연이었다.
올해 ‘백야의 별’ 페스티벌에서는 프로코피예프가 톨스토이의 대하소설을 다룬 오페라 ‘전쟁과 평화’가 그래험 빅의 새로운 연출로 상연되는 것이 큰 화젯거리다. 또 음유시인인 알레그 파구진의 콘서트, 발레 ‘돈키호테’ ‘가야네’ ‘스파르타쿠스’, 오페라 ‘이고르공’ ‘투란도트’ ‘피가로의 결혼’ ‘마담 버터플라이’ ‘예브게니 오네긴’ 등 매일같이 3~4개의 공연이 세 개의 공연장에서 번갈아 열린다.
페스티벌은 7월 31일 끝나지만 만족을 모르는 게르기예프는 8월 6일까지 오페라와 발레를 매일 밤 마린스키 1, 2극장에서 올리며 기나긴 백야의 밤을 예술혼으로 불태운다. 휴가철 상트 페테르부르크를 찾는 외국인 관광객들을 단 한 명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