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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유로, 자네들 그동안 많이 컸지만 아직은 멀었네”

중앙선데이 2014.07.20 01:26 384호 18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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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소개할까 하네. 가로 15.5㎝, 세로 6.5㎝. 어른 손바닥 안에 쏙 들어갈 만큼 몸집이 작지. 재질도 비싸다고는 할 수 없는 면(綿)섬유이지. 그래도 전 세계인들은 나를 숭배하지. 어떤 이는 나를 미국이 낳은 최고의 상품이라고 불렀어. 그래 나 달러일세. 앞면에 미국 대통령 얼굴이, 뒷면에 ‘In God We Trust(우리는 신을 믿습니다)’라는 글귀가 새겨진, 미국의 공식화폐 그 달러 말일세.

22일 브레턴우즈 체제 70주년 … 기축통화 달러의 고백

요즘 날 두고 말이 많더군. 간만에 나도 속 좀 털어놔야겠네. 7월은 내 탄신월이니 생일선물 주는 셈 치고 좀 들어주게.

난 사실 두 번 태어났어. 미국 공식화폐로 지정된 게 1785년 7월 6일, 브레턴우즈에서 세계 기축통화 지위를 얻은 건 1944년 7월 22일. 그러고 보니 모레가 기축통화로 다시 태어난 지 70주년 되는 날이군. 칠순 기축통화의 얘기를 들어봐.

‘팍스 달러리움 (Pax Dollarium)’의 영광
브레턴우즈 얘기가 나오니 기분이 좋아지는군. 그때 얘기 먼저 하지. 2차대전이 막판으로 치달을 때였지. 미국 뉴햄프셔주 브레턴우즈(Bretton Woods)에 44개국의 대표들이 모였어. 1930년대의 경제적 혼란이 세계대전 발발로 이어졌다는 반성 아래 전후 통화, 무역 안정 같은 국제경제 질서를 새로 구축하자며 모인 거지. 700여 명의 대표가 참석했지만 사실 영국과 미국의 양자구도였다네. 영국이 자랑하는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즈와 미국 재무부 차관보 해리 덱스터 화이트가 각각 내놓은 안을 두고 3주간 격론을 벌였다네. 두 번의 전쟁을 거치면서 미국이 이미 초강대국이 된 상태였으니 결론은 뻔할 수밖에. 새로운 국제통화를 창출하고 변동환율제를 도입하자는 케인즈 주장은 힘을 잃었지. 그래서 나온 결론이 미국 달러만 금과 일정한 비율로 바꿀 수 있고, 각국 통화가치는 달러와 고정시키는 거였지. ‘금 1온스=35달러’로 정해졌어. 숫자가 인쇄된 섬유 조각에 불과했던 달러가 금으로 가치를 보장받으면서 세계 경제의 수퍼 파워가 된 거야. 당시 미국이 세계 산업 생산의 절반을 맡았고, 세계 금 보유고의 3분의 2를 확보한 덕이었지. 국제통화와 금융제도 안정을 위해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WB)도 설립됐지. 이런 체제는 27년간 잘 돌아갔어.

그러다가 문제가 생겼어. 금이 화폐 가치를 보장하려면 보유한 금의 양만큼만 달러를 발행해야 하는데 이게 골치였어. 세계경제가 급성장하면서 달러를 필요로 하는 곳은 많아졌는데 금은 그만큼 늘지 않았거든. 더구나 1960년대 후반부터 미국은 경상수지 적자를 메우고 베트남 전쟁을 치르기 위해 달러 찍는 윤전기를 최고 속도로 돌려 댈 수밖에 없었지.

결국 1971년에 닉슨 대통령이 “달러를 금으로 바꾸어주지 않겠다”고 선언해버렸어. 형식상으로는 브레턴우즈 체제가 붕괴한 거지. 뭐 그래도 버틸 방법은 있었다네. 금만큼이나 중요한 원유가 있었으니까. 1975년이었지. 사우디아라비아가 원유를 수출할 때 달러만 받겠다고 동조해줬다네. 원유는 산업화의 필수품인데 거래를 하려면 달러가 필요하니 세계 각국이 달러를 확보하지 못해 안달이 났지. ‘금 달러’가 아니라 ‘석유 달러’시대가 왔어. 이걸 ‘브레턴우즈 체제 2.0’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어.

돌아보면 참 좋은 시절이었지. 세계에 달러가 돌게 하려면 미국은 항상 경상수지 적자를 봐야 했지. 미국에서 돈을 풀어줘야 했거든. 미국이 수출보다 수입을 많이 해서 세계 곳곳의 공장들이 돌아간 거야. 국제수지 적자, 그건 문제가 안 됐다네. 기축통화 좋다는 게 뭔가. 다른 나라가 달러를 한 바구니 쌓아놔도 미국이 그만큼을 더 찍어내면 그 나라 돈 가치는 절반으로 줄어들고, 미국의 부채 부담도 절반으로 줄었지. 1달러어치의 종이와 잉크를 사용해 10달러짜리 지폐를 찍어내면 9달러의 이익을 보는 ‘주조차익(시뇨리지) 효과’도 짭짤했지. 게다가 다른 나라가 상품을 수출해 번 달러로 미국 국채를 사서 보유하기 때문에 결국 달러는 고스란히 미국으로 되돌아 왔지. 그러니 샘 많은 일부 경제학자들은 “미국이 기축통화 지위를 앞세워 세계의 물건을 공짜로 사 쓴다”고 열을 올리더군. 그래 인정하네. 세계 경제 질서를 내가 주도한다고 해서 ‘팍스 달러리움 (Pax Dollarium)’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였으니 마음껏 누린 건 사실일세.

그런데 요즘은 퍽 힘들다네. 내 위상이 예전만 못하다고 많이들 수군거린다지. 미국의 경제규모는 세계 전체의 20% 남짓한데 세계 외환보유액에서 달러의 비중은 70%에 이른다고, 한마디로 너무 많이 풀렸다고 말들이 많더군. 그런데 돈이 풀려야 세계 경제가 돌아갈 거 아닌가 말일세. 미국이 막대한 경상수지 적자를 기록하는 건 운명이야. 적자국이 있으면 흑자국도 생기는 법일세. 중국 등 신흥국은 엄청난 흑자를 올려. 이게 글로벌 불균형(imbalance) 이거든. 불균형이 심해지면 주기적으로 금융시장이 위기에 빠져.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이런 문제 때문에 발생한 거라는 분석이 많아. 이 말은 단일 기축통화는 항상 위기의 씨앗을 간직하는 시스템이란 뜻이지. 이런 문제를 해결하자는 목소리가 커지는 건 당연한 거야. 2008년 금융위기 때 주요 20개국(G20) 정상들이 달러 단일 지배체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신(新)브레턴우즈 체제(브레턴우즈 체제 3.0) 논의를 하자고 합의한 게 대표적이야.

기축통화 수명은 100년 안팎
선배 기축통화들의 운명을 보니 100년 안팎이면 수명을 다했더군. 15세기 말 포르투갈 화폐가 약 80년, 이후엔 스페인 화폐가 110년, 해가 지지 않을 것 같던 영국 파운드도 105년을 지배하는데 그쳤지. 나도 그래서 걱정이야. 하지만 믿는 구석이 있다네. 기축통화 되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라는 점이지.

우선 돈을 풀어 적자를 봐도 버텨낼 체력이 있느냐고. 80년대 일본 경제가 한창 좋던 시절 엔화가 기축통화 지위를 노렸지만 실패했잖아. 수출을 많이 해 돈을 벌어들이는 나라는 기축통화국이 되기 어렵다네. 유로도 한 때 기축통화 깃발을 들었지만 재정위기가 오면서 지금은 자신들 살 길 찾기 바쁘잖아. 요즘 위안 성장세가 눈에 띄지만 그래도 달러를 끌어내리진 못할걸세. 기축통화가 되려면 국제 사회에서 믿음이 쌓여야한다네. 중국이 완전한 변동환율제를 실시하지 않는 한, 그러니까 당국이 환율에 개입하는 한 위안이 기축통화가 되긴 어려울걸세.

중국은 달러 기축통화 체제를 뒷받침한 IMF와 WB를 대체할 새로운 국제금융기구를 만들려고 애쓰고 있다지. 지난 15일 브릭스(BRICS:브라질·러시아·인도·중국·남아프리카공화국) 정상들이 브라질에 모여 합의한 신개발은행(NDB)과 위기대응기금(CRA) 설립도 그런 움직임의 하나야. 브릭스 5개국의 인구를 더하면 30억여 명으로 세계 인구의 약 43%를 차지해. 국내총생산(GDP) 비중은 21%에 이른다고.

하지만 덩치가 크다고 기축통화가 되는 게 아니야. 달러 기축통화 지위가 흔들린다는 건 미국 경제가 위기를 겪는다는 뜻인데, 미국에 위기가 오면 그 영향을 누가 가장 많이 받겠나. 미국과 교역해 가장 많은 이익을 남기는 중국이란 말일세. 지난해 중국이 미국에 수출한 상품의 액수가 무려 4400억 달러라네.

미국이 막강한 군사력을 갖춰 국가의 존망 자체가 의심받지 않는다는 점도 달러를 믿음직하게 하는 요소야. 생각해보게 지금 글로벌 경제 위기가 닥치면 각 나라들이 어떤 화폐를 보유하려 들겠나. 바로 달러일세. 가장 안전한 자산이란 뜻일세. 그러니 여보게, 썩 내키지는 않겠지만 내 고희(古稀)를 축하해주게나.



도움말 주신 분 김정식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 안유화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 전병서 중국경제금융연구소장, 주명건 세종연구원 이사장, 차현진 한국은행 커뮤니케이션 국장(가나다 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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