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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 학자 케인즈와 가난한 이민자 화이트의 승부

중앙선데이 2014.07.20 01:28 384호 18면 지면보기
미국 뉴햄프셔주 브레턴우즈는 날씨가 선선하고 건조해서 휴양지로 인기 높은 곳이다. 1944년 전 세계 44개국 700여 명의 대표들이 마운트워싱턴 호텔에 모였다. 2차 세계대전 이후의 국제 금융질서를 논의하기 위해서다. 이 모임의 화제의 인물은 영국 대표로 참석한 존 메이너드 케인즈였다. 『고용 이자 및 화폐에 관한 일반 이론』등의 책을 써 세계적인 경제학자로 꼽히던 인물이었다. 경제 활성화를 위해 정부가 지출을 확대해 고용을 일으켜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정부가 통화 및 재정정책을 쓰는 밑바탕 이론으로 자리잡고 있다. 영국 정부는 이런 케인즈의 유명세와 지식을 활용해 미국의 독주를 막으려는 계획을 세웠다.

브레턴우즈 체제 탄생시킨 두 전설

해리 덱스터 화이트는 케인즈에 비해 무명이었다. 당시 미국 재무부 차관보였던 그는 미국 대표로 회의에 참석했지만 알아 주는 사람이 드물었다. 하지만 화이트는 매우 유능한 사람이었다. 1892년 러시아 이민자 부부의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그는 집안이 가난해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1차 대전 때 자원 입대했다. 전쟁이 끝나자 화이트는 참전용사 지원프로그램 덕에 컬럼비아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었다. 경제학 박사학위는 하버드대학에서 받았다. 그의 나이 38세 때였다. 화이트는 위스콘신주의 작은 대학에서 교수생활을 잠깐 한 뒤 재무부에 취직하게 된다. 당시 재무부장관이었던 헨리 모겐소가 화이트의 능력을 알아 봤다. 화이트는 승승장구해 재무부장관 보좌관 겸 차관보에 오른 뒤 브레턴우즈 회의에 미국 대표로 참석하게 됐다.

화이트는 케인즈에 밀리지 않았다. 오히려 케인즈를 압도했다고 볼 수 있다. 케인즈는 금본위제도를 ‘야만의 유산’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한 나라가 금을 너무 많이 보유하면 국제적으로 균형이 깨져 금융시장이 혼란에 빠진다고 보았다. 금이 많은 나라가 한꺼번에 금태환(금을 돈으로 바꾸는 것)을 요구하면 국제 금융시장이 충격을 받기 때문이다. 케인즈는 금에 의존하지 않는 새로운 국제통화단위(방코르)를 도입하고, 세계중앙은행을 설립하자고 제안 했다.

그 당시 세계에서 가장 금이 많은 나라였던 미국은 케인즈의 주장을 받아 들일 수 없었다. 타협책으로 화이트는 달러화만 금과 교환할 수 있고, 다른 주요 통화들은 달러에 대해 고정환율제를 유지하는 안을 제시해 반영시켰다. 미국 달러는 금 1온스당 35달러로 고정했다. 화이트는 또 국제수지에 문제가 생기는 국가는 특별인출권(SDR)이라는 가상의 통화로 수습하는 아이디어를 제안하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국제통화기금(IMF)이다. IMF는 이후 국제 환율 안정과 유동성 확대 등의 역할을 수행했다. 세계은행(WB)도 당시 설립했는데 역할은 가맹국의 정부 또는 기업에 대한 융자, 개발도상국 기술 지원 등이었다. IMF와 WB라는 옥동자를 낳은 케인즈와 화이트의 여생은 순탄치 않았다. 브레턴우즈 회의 당시 심장 질환을 앓았던 케인즈는 이후 건강이 악화돼 2년 뒤인 1946년 62세의 나이로 생을 마쳤다. 화이트는 더 비극적이었다. 1945년 IMF가 출범한 뒤 초대 상무이사로 활약하던 화이트는 갑자기 매카시즘에 휩싸여 소련 스파이 혐의로 FBI의 조사 대상자가 됐다. 화이트는 1948년 반미국적활동조사위원회에 나가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다. 정신적·육체적 충격으로 건강이 나빠진 화이트는 뉴햄프셔주로 요양을 떠났다가 갑자기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56세였다. 화이트의 혐의는 결국 밝혀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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