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김미경의 마이웨이] 문제 풀기 전 이야기 보따리 풀었다 … ‘수포자’가 변했다

중앙선데이 2014.07.20 02:20 384호 24면 지면보기
대학 입시에서 불문율로 통하는 말이 있다. 영어를 잘하면 서울에 있는 대학에 갈 수 있고, 수학을 잘하면 대학을 고를 수 있다고.

<3> ‘수학 힐링’ 장우석 숙명여고 교사

하지만 현실에선 수포자(수학 포기자)가 늘어만 간다. 이유는 하나, 너무 어렵기 때문이다.

나는 중학교 때 일찌감치 수포자가 됐다. x와 y가 어쩌고, 로그가 어쩌고, 함수가 어쩌고…. 새로운 공식이 등장할 때마다 해석 불가능한 외계어를 보는 것 같았다. 열심히 풀면 15점, 한 번호로 찍으면 25점이 나왔는데, 노력할수록 떨어지는 수학 점수를 보면서 상처를 넘어선 혐오감을 느꼈다.

대학 입학과 동시에 더는 마주칠 일이 없을 줄 알았다. 그러나 악연은 생각보다 질겼다. 아들딸이 나와 비슷한 수학 성적을 받아오면 도둑질하다 들킨 것처럼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수학을 알아야 논리적 사고가 가능하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혹시 내 강의에 논리적 맹점이 있는 건 아닐까, 걱정되고 불안했다.

사진작가 김도형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급한 대로 책 한 권을 집어 들었다. 제목은 『수학, 철학에 미치다』. 우연히 읽게 된 이 책은 나에게 뜻하지 않은 두 가지 만남을 안겨줬다. 하나는 지금껏 알지 못했던 또 다른 수학과의 만남, 다른 하나는 가장 창의적인 방법으로 자기 길을 걷고 있는 수학교사와의 조우다.

“음악이나 문학은 왜 공부해야 하냐고 묻지 않아요. 들으면 이해가 되고 많이 알수록 교양으로 쌓이니까요. 그런데 수학은 반드시 질문하게 만들어요. 미분·적분을 왜 배워야 하느냐, 행렬을 왜 배워야 하느냐, 안 배워도 살아가는데 아무 문제없지 않느냐고 말이에요. 학생들 입장에선 당연한 물음인데 답을 주기가 쉽지 않아요. 수학사와 수학철학을 공부하는 건 그래서예요.”

올해로 16년째 숙명여고에서 수학을 가르치고 있는 장우석(45·사진) 선생님은 다른 수학교사들과 조금 다른 점이 있다. 유명한 수학자의 일화부터 공식 뒤에 숨겨진 역사까지, 수학사와 수학철학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줄줄이 꿰고 있다. 수업 중 학생들이 지친 표정을 보일 때면 그는 어김없이 이야기보따리를 하나둘씩 풀어놓는다.

“로그(log)가 얼마나 아름다운 공식인 줄 아니? 16세기 유럽의 대항해 시대 때 배에 실을 수 있는 식량은 한계가 있었고, 항해 기간을 맞추지 못하면 꼼짝없이 굶어죽어야 했거든. 이걸 막기 위해서 두 명의 수학자가 만든 공식이 바로 로그야. 이 공식 덕에 수많은 사람들이 살 수 있었지.”

그러면 열에 아홉은 눈을 반짝이며 수업에 집중한다. 어렵게만 보이던 수학 공식이 재미있는 옛날이야기로 변신하는 순간이다. 더러는 수포자의 길로 빠졌다가 이야기에 이끌려 구사일생 되돌아오는 경우도 있다. 그 덕에 그는 학교에서 제법 인기 있는 교사로 손꼽힌다. 하지만 그에게도 흑역사는 있었다. 재수도 모자라 삼수를 하던 시절, 내년에는 대학생이 되려나, 이번에도 떨어지면 군대를 가야 하나, 불안과 공포가 그를 엄청나게 짓누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학원 수학 선생님이 던진 말이 그의 가슴에 깊이 박혔다.

“수학은 신과 대화하는 학문이다. 철학의 가장 순수한 형태가 바로 수학이다.”

그 순간 수학은 그에게 전혀 새로운 무언가가 됐다. 단순한 암기 과목이 아니구나, 공식 말고 다른 뭔가가 있구나, 제대로 배워보고 싶다. 먼지처럼 떠돌던 삼수생에게 그때부터 뚜렷한 목표가 생겼다. 2년간 연달아 지원했던 해양생물학과 대신 수학교육과로 진로를 바꿨고, 대학생활 대부분을 수학사와 수학철학에 관한 책들을 탐닉하면서 보냈다.

하지만 그의 지적 호기심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수학철학을 보다 깊이 있게 이해하기 위해 대학원 철학과에 진학했고, 탈레스와 플라톤부터 러셀과 힐베르트에 이르기까지 당대의 시대정신을 리드한 철학자와 수학자들을 두루 섭렵했다. 같은 기간 배우고 익힌 동양철학도 그의 이론적 바탕이 됐다. 이후에도 공부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그는 현재 수학교육과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중이다.

그는 그렇게 수학자의 길을 걸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공부가 좋아서 교사를 그만둘 수도 있었고, 책의 반응이 좋아서 학교를 뛰쳐나갔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잘 알고 있고, 자신에게 가장 적합한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내 길이 아닌 곳에 기웃거리지 않고 자기 자리에서 해야 할 일을 하면서 차곡차곡 내실을 다지고 있다.

내가 본 그는 수학도 좋아하지만 가르치는 걸 더 좋아한다. 수학으로 사고하고 수학으로 상상력을 키우고 수학으로 힐링하는 방법을 가르치고 싶은 열정이 많은 사람이다. 그가 2년 전 학교 밖 교실에 참여한 것도 그래서다. 학창시절 수학에 깊은 상처를 받은 사람, 수학을 잘하고 싶은데 방법을 모르는 사람, 자녀에게 수학 못하는 유전자를 전해준 것 같아 낙심한 사람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수학하는 즐거움을 잃어버린 어른들이 모인 ‘수학에 미친 사람들’이라는 공부 모임에 강사로 참여한다.

“사실 처음엔 얼마나 모일까 했는데 대학생, 가정주부, 직장인 등 열 명 남짓한 분들이 찾아 오셨어요. 평생 안고 살아온 수학에 대한 상처와 스트레스를 이번 기회에 없애고 싶다면서요. 어려워하시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참석률도 높고 반응도 굉장히 뜨거웠어요. 끝날 즈음엔 오히려 제가 더 뿌듯하더라고요. 앞으로 기회가 된다면 어른들을 위한 수학 힐링 모임을 계속 이어가고 싶어요.”

혹자는 다 늙어서 무슨 수학 공부냐고 타박할지 모르겠다. 이제 와서 학교에 들어갈 것도 아니고, 수학을 배운다고 해서 살림살이가 나아지는 것도 아니고, 무슨 쓸모가 있어서 굳이 수학을 배우느냐고 말이다. 하지만 이 모임의 진짜 매력을 알면 180도 달라진다. 요약하면 이렇다.

첫째, 시험 걱정이 없다. 틀릴까봐 불안해할 필요도, 상처받을 이유도 없다. 둘째, 정해진 기한 없이 이해될 때까지 충분히 들여다볼 수 있다. 셋째, 암기에 대한 부담 없이 공식에 얽힌 철학과 역사를 함께 배우면서 인문학적 사유를 즐길 수 있다. 넷째, 논리적 사고력을 키우는데 효과적이다. x, y, z나 1, 2, 3은 아무런 의미도 담고 있지 않다. 뜻이 없으니 오해할 것도 다툴 일도 없다. 그래서 수학 문제를 많이 풀다 보면 생각과 생각을 보다 정교하게 연결하고, 모순 없이 논리적으로 결론을 끌어내는 훈련이 자연스럽게 된다. 당신이 가장 여유 있고 가장 철학적이고 싶을 때 가장 먼저 시작해야 할 공부가 바로 수학인 것이다.

장우석 선생님은 여느 수학교사와는 조금 다른 길을 걷고 있다. 존재조차 낯선 수학사와 수학철학을 20년 가까이 공부했고, 공부한 내용을 두 권의 책으로 펴냈고, 일반인을 대상으로 수학 강의를 했다. 은퇴 후 계획도 이미 세워놓은 상태다.

“수학자 힐베르트가 수학을 그만두고 시를 쓰겠다는 제자에게 이런 말을 했어요. ‘어쩌면 그게 나을지도 모르겠군. 어차피 자네에게 수학을 할 정도의 상상력은 없었으니까 말이야’라고요. 역설적인 말이죠? 그러나 사실입니다. 수학은 현상을 보고 규칙을 상상해 내는 어마어마한 학문이니까요. 수학공부 가르치면서 제가 배운 건 바로 ‘상상력’입니다. 그 상상력을 바탕으로 은퇴 후엔 추리소설을 쓰고 싶어요.”

그는 수학을 사랑한다. 학생을 가르치는 일은 더 사랑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가 사랑하는 것은 ‘수학으로 생각하고 상상하는 일’이다. 아마도 그가 생의 마지막까지 써내려갈 마이웨이의 기본공식은 수학에 대한 애정이지 않을까. 그의 수학사랑이 무수한 상상으로 분화되어가는 모습이 벌써부터 기대된다.

구독신청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