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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人의 음악 읽기] 음악으로 평화의 씨 뿌린 우리 시대의 거장

중앙선데이 2014.07.20 02:45 384호 27면 지면보기
1939년 9살의 로린 마젤이 고교 오케스트라(The National High School Orchestra )를 지휘하고 있다.
7월 13일 미국 지휘자 로린 마젤이 세상을 떠났다. 향년 84세. 그만 하면 천수를 누렸다. 무려 200여 군데 오케스트라를 지휘했고 음반 발매량도 카라얀의 700장에 비길 바는 아니지만 300장이 넘는다. 미국식 재기발랄로 레너드 번스타인을 따를 인물이 없지만 그 다음 순서에 로린 마젤을 놓아도 좋으리라. 우리나라에도 여러 차례 왔었다. 10여 년 전 예술의 전당에서 서울시향과 말러 1번 교향곡을 연주했는데 뚜렷한 인상이 남았다. 어느 매체엔가 ‘소리의 건축가’ 운운하는 소감을 적었던 기억이 난다.

지휘자 로린 마젤 타계

난삽하게 다가오기 일쑤인 말러 곡의 윤곽을 건축 골재 쌓아올리듯이 정확하고 선명하게 그려 놓는 지휘자였다. 소리가 차곡차곡 쌓이는 느낌. 그 바람에 그 교향곡이 흡사 쉬운 곡처럼 다가왔다. 그의 부음 앞에 한 세기가 저물었노라 운운하는 호들갑을 떨 필요는 없겠지만 클래식 음악이 대중의 환호를 크게 받았던 20세기 음악환경의 대표적 인물 하나가 떠난 것은 틀림없다. 그는 마에스트로 지위를 부여받은 대스타급 지휘자 몇몇 가운데 하나였다.

로린 마젤에 대한 몇 가지 기억이 있다. 하나는 좀 우스꽝스러운 사건. 1989년 베를린 필하모닉 종신지휘자 카라얀이 사망했을 때 후임이 누가 될지가 세계적인 관심사로 떠올랐다. 단원 투표로 이루어지는 선발인데 세상의 유명 지휘자는 다 거론됐다. 그만큼 비중 있고 모두가 선망하는 자리였다. 이때 로린 마젤의 유명한 김치국 사건이 터진다. 언론의 대세가 마젤이었고 본인도 확신을 가졌던 것 같다.

단원투표 전에 성대한 당선 파티를 미리 준비했고 세계 주요 매체에 화려한 프로필을 배포해 두었다. 결과는 뜻밖에도 이탈리아 사람 클라우디오 아바도였다(실제로 예상 밖의 결과였다). 열한 살에 토스카니니의 NBC 교향악단을 지휘했고 미국인 최초로 바이로이트 음악제 지휘라는 영광을 거머쥐었던 천재소년 출신이다. 그때 분노한 마젤의 처신이 이제는 귀엽게까지 여겨진다. 그는 베를린 필하모닉 단원 모두에게 편지를 띄운다. 앞으로 어떤 경우에도 당신들과 일을 함께 하지 않겠노라고.

2008년 뉴욕필하모닉을 이끌고 평양을 방문한 마젤(1930~2014). 공항청사의 김일성 초상화가 보인다.
물론 실패담만 있었을 리 없다. 레너드 번스타인과의 빛나는 시절 이후 뉴욕 필하모닉은 피에르 불레즈, 주빈 메타, 쿠르트 마주어를 거치면서 성과가 영 신통치 않게 되었다(이들 지휘자의 뛰어난 역량을 의심할 바 없지만 조직 운영상의 여러 문제가 게재된 것 같다). 면모 일신을 결심한 뉴욕필이 선택한 인물이 바로 로린 마젤이었다. 이미 노경에 접어든 나이여서인지 계약기간은 2년 여에 불과했지만 한국인에게 잊을 수 없는 기억을 남긴다. 2008년 2월 단원을 이끌고 평양공연을 성사시킨 것이다. 미국 내 반대가 엄청 심했다는데 그는 개의치 않고 양국 국가까지 연주했다. 음악으로 평화에 기여할 수 있다는 소신 행보였다.

그의 출발점으로 가본다. 프랑스 태생의 미국인 지휘자 로린 마젤. 그는 지휘뿐만 아니라 작곡도 꽤 했고 소설, 영화대본도 썼던 재사풍 인사다. 이른 나이의 성공으로 거만하다는 세평을 달고 살았지만 뮤직 비즈니스와 타협을 잘한 편으로 본다. 수많은 악단을 전전했는데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와 함께 했던 시절 음반이 가장 좋다. 특히 서방취향의 감성적 차이콥스키를 구현하는데 뛰어나다. 그의 연주는 그리 별나지 않으면서 고급스러운 느낌을 안겨준다. 안심하고 음반을 택할 수 있다는 의미다.

로린 마젤이 왕성하게 활동하던 시절에 클래식 음악은 대중의 큰 사랑을 받았고 문화계의 주요 관심사였다. 이미 저물어 버린, 되돌아 올 수 없는 시대의 자취를 그의 부음을 통해 새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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