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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충기 부장의 삽질일기] 우적우적 오이를 씹다가

온라인 중앙일보 2014.07.19 14:04


























그늘집에 앉아 오이를 우적우적 씹는데, 아자씨 한 분이 수돗가로 왔다.



사정없는 땡볕이 튀어 오르며 땅바닥은 자글자글 끓는다.



- 이눔으 날이 아주 사람을 잡어유, 사람을.

- .......

- 뭔 일 났다구 푹푹 찌는 한낮에 밭에 나오셨대유?

- .......

- 이런 날 한낮에 일하믄 큰일나유.

- ?? 네? 저 말이에요?

- 지가 혀 빼물구 저그 자빠져 있는 누렁이 헌티 얘기했것어유, 대가리 처박구 땅만 쫘대는 달구새끼 헌티 말을 걸었것어유.

- 아, 네...



아자씨가 얼굴 반만한 휴대전화에서 흘러나오는 클래식 볼륨을 비로소 줄였다. 모자와 수건으로 얼굴을 칭칭 싸매고 안경너머로 눈만 빼꼼히 내놓은 아자씨는 목소리로 보아 나보다 나이가 한참 들어 보였다.



- 마이 거두신규?

- 토마토 좀 땄는데 금세 한 봉다리가 되네요.

- 한낮에 채소를 따믄 시들어서 냉장고에 넣어두 비실비실 하더구먼유. 그랴서 지는 햇살 퍼지기 전에 와유.

- 시들어도 괜찮아요. 여기서 물에 대충 씻어서 집에 가져가면 삼투압 작용으로 다시 살아나거든요.

- 그러믄 이파리들이 물기 때문에 들어붙어서 금방 물러버릴틴디.

- 안 그래요. 락앤락통에 넣어두면 일주일도 더 가요. 씻으면 흙하고 벌레들도 떨어지잖아요. 집이 15층인데 어제도 거미를 잡았어요. 몇 번 그냥 가져갔더니 따라갔나 봐요.

- 여그서 가차운디 사시는 개뷰.

- 도곡동 아파트에 살아요.

(흡... 호 혹시 타...타워...거시기?)

- 올해 여기 밭을 처음 얻었어요. 손자하고 며느리가 갑자기 와서 뭐 줄까 하다가 토마토 따러 나온 거예요.

- 거그서 자전차 끌구 오신규? 거리가 꽤 되는디.

- 네 30분 정도 걸리네요.

- 농사를 엄청 찰지게 지으시네유. 삽자루 꽤나 잡아보셨는개뷰.

- 아녜요. 올해가 처음이에요. 은퇴했는데 심심해서 소일거리로 해요.

- 지는 모르는 거 있으믄 옆에 있는 분들 헌티 물어보는디,

- 토마토하고 고추는 시원찮아요. 무턱대고 시작했다가 순을 질러줘야 하는 걸 몰랐어요. 책보구 배우고 있지요.

- 여그 밭쥔장이 농사는 도사잖유.

- 에이 그 양반 말도 꺼내지 마세요. 못써요.

- 사람이 서글서글허구 괜찮은디...

- 저기 산 쪽으로 내 밭 옆에 수조가 있잖아요. 땅이 말라 주인한테 물 좀 받아놓으라고 했는데 들은 척도 안 해요. 바닥에 깔린 물이 녹색, 아니 다 썩은 갈색이에요 애벌레들이 둥둥 떠다니고. 여기 수도까지 와서 물을 길어가려니 너무 힘들어요. 돈 받고 땅을 빌려준 사람이 그렇게 게을러서야. 에이 쯧쯧...



아자씨는 단단히 화가 나있었다.



- 다섯 평에 13만원씩 받으면 120구좌면 얼마에요. 1200만원에다가 13곱하기 20이면...

- 저짝 비니루하우스 뒤에도 밭이 있는디유.

- 그래요? 게다가 저 하우스 안에서 음식두 하잖아요. 그거 다 하면 돈이...

아자씨는 다시 한 번 머리 속 계산기를 분주하게 두들겼다.

- 그런데 물통도 안 채워놓는단 말이에요. 주말농장이 여기만 있는 줄 알아요? 저기 길 건너에도 있고, 청계산 들어가는 쪽에도 있어요. 난 내년에는 여기서 안 할 거예요. 그리고 이런데서 음식하면 안 돼요.

- 동네 순사덜두 여그 순찰오구 그러던데유.

- 보나마나 응응응 아니겠어요?

- 아니 요새 같은 때 누가 응응응을 하겠어유. 시상이 아무리 드럽다구 혀두 전에 비하면 엄청 깨끗해졌잖유. 조 아래 동사무소두 있는디.

- 내가 식품위생법을 잘 알아요. 단속권은 동사무소가 아니라 구청에 있어요. 내가 은퇴를 해서 가만히 있는 거지 조금만 젊었어도 그냥 칵...

말하는 뽄새로 보아 아자씨는 공직에서 오래 일한 분이었다.

- 그리고 이 물이 지하수잖아요. 지저분하니 절대 먹지 마세요. 분명 대장균이 우글거릴 거예요.



아자씨는 한참을 더 투덜투덜 궁시렁궁시렁 대다가, 핸드폰의 클래식을 들으며 땡볕 속으로 페달을 밟아 내려갔다. 깡마른 등 뒤로 찬바람이 휘이휘이 불었다. 아, 이거 뭐. 그러면 지금까지 수도꼭지에 입 대고 몇 년을 마셔온 나는 뭐냐.



이보오 밭쥔장, 그러게 수조에 물 좀 제대로 받아놓지..

에라 이미 버린 몸, 수도꼭지 한껏 틀어놓고 벌컥벌컥.

물맛 좋기만 하구먼.



안충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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