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 속으로] 왜 산소라고 했을까 … 옛 사람들의 산 사랑

중앙일보 2014.07.19 00:51 종합 23면 지면보기
사람의 산,

우리 산의 인문학

최원석 지음, 한길사

640쪽, 2만원




‘고요한 아침의 나라’는 산 때문에 붙인 이름 아닐까. 이른 아침 산의 그윽한 기운이 묻어난다. 한국인은 산을 사랑해 왔다. 이 땅 어디에서든 사방을 둘러보면 반드시 산이 있다. 서울에만 산이 43개다. 해발 937m의 위엄 서린 북한산도 있지만, 55m짜리 동네 뒷산인 강서구 증산(甑山)도 있다.



 책은 산과 인간이 주고받은 연애일기다. 저자는 처음엔 산을 두려워하며 쩔쩔맸던 우리 조상이 어떻게 그를 품에 받아들이고 서로 교감해왔는가를 애정 어린 시각에서 써내려간다. 무릇 모든 사랑이 그렇듯, 산과 인간의 ‘러브 스토리’도 사연이 참 많다.



 한국인에게 산은 자연 그 자체다. 우리 산맥의 얼개가 형성된 건 신생대 제3기 중엽(약 2600만년 전). 그로부터 한참 뒤 이 터전을 찾아온 인간에게 국토의 70%를 차지하는 산은 꼼짝없이 더불어 살아야 할 존재였다. 생명을 낳는 뿌리이고 죽어서 돌아갈 곳이다. 그래서 우리는 마지막 깃들 곳을 ‘산소(山所)’라 부른다.



 한민족의 뿌리인 환웅이 무리를 이끌고 처음 닿은 곳도 태백산 꼭대기였다. 금관가야·신라·고려·조선 모두 도읍지를 정할 땐 산의 형세를 살폈다. 높이 솟은 산은 하늘의 기운을 땅에 구현하는 존재였다. 뻗어져 나온 산맥이 물을 만나면 용(龍)의 맥이 솟구친다고 여겼다.



 조선 땐 고을마다 진산(鎭山)을 배정해 백성의 안위를 바랐다. 고을이 들어선 곳에 산의 기운이 부족하다 싶을 땐 마을 사람이 힘을 합쳐 산을 만들기도 했다. 허전한 곳에 돌무더기나 흙더미를 쌓거나 암석을 가져와 야트막한 산을 세웠다.



 때론 산을 고려해 읍성의 구조를 바꿨다. 금기시하는 일을 정해놓기도 했다. 함안읍은 화재를 자주 당하자 화산(火山) 꼴로 생긴 남쪽 여항산 때문이라 여기고 성의 정문을 남향에서 동향으로 틀었다. 하동군 진교면 고외마을은 마을의 지형이 배(船)를 닮았기에 우물 깊게 파는 일을 금했다. 우물 파는 일을 배 밑바닥에 구멍 내는 일로 생각해서다.



 우리 조상의 이러한 ‘풍수 사상’은 비과학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 사상의 기저엔 애정과 경외심이 깔려 있다. 임진왜란이나 일제강점기, 일본인이 산허리를 끊거나 쇠말뚝을 박자 산이 피눈물을 흘렸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우리 조상의 산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를 짐작할 수 있는 이야기다. 그들은 산을 늘 조심스레 대해 왔다. 길을 만들려고 간단히 산을 깎고, 흙이 파헤쳐지든 말든 등산에 열중하는 ‘과학적인’ 현대인에 비해선.



[S BOX] 한국인 이상향 청학동, 진짜는 어디에



한국인의 대표적 이상향은 청학동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경남 하동군 청암면 묵계리에 있는 ‘지리산 청학동’을 떠올릴 거다. 하지만 역사상 첫 번째 청학동으로 추정된 곳은 다른 데 있다.



 청학동은 이인로(1152~1220)의 『파한집』에 처음 등장했다. 이인로는 청학동을 현재 하동군 화개면 운수리 인근으로 추정했다. 하지만 정확한 장소는 찾지 못했다.



 청학동은 이후 여러 책에 나타난다. 조선 중기 조여적이 쓴 『청학집』에선 신선이 청학동에 터를 잡았다는 내용이 나온다. 조선 후기 접어들면서 상상 속 공간이었던 청학동은 동네 이름으로 쓰이기 시작한다. 구한말엔 전국에 청학동·청학리라는 지명이 45곳에 이르게 된다.



 현재 여러 청학동 중 하동 묵계리의 청학동이 가장 알려진 계기는 1973년 그곳에 모여 살며 전통 방식을 지켜오던 선비들이 언론에 소개되면서부터다. 86년 청학동이라는 행정지명을 얻으면서 유명한 관광지가 됐다.



이정봉 기자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