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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경의 취리히통신] 국왕도 사임하는데 … 스페인 부패 정치인 무슨 낯짝일까요

중앙일보 2014.07.19 00:21 종합 18면 지면보기
지난달 사임한 스페인 국왕 후안 카를로스 1세(왼쪽). 스페인 시위대가 ‘디미티르는 러시아인 이름이 아니다’라는 문구의 팻말을 들고 있다. [중앙포토]
“디미티르(dimitir)는 러시아 사람 이름이 아니다(Dimitir no es un nombre ruso)!”



 스페인의 정치 관련 집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문구입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고요? ‘dimitir’는 스페인어로 ‘사임하다’ ‘사퇴하다’라는 뜻입니다. 러시아에 흔한 이름인 ‘드미트리(Dmitri)’와 비슷하게 들리지요. 최근 몇 년 동안 스페인은 경제 위기뿐 아니라 연이어 터지는 정치인들의 부패 스캔들로 휘청거리고 있습니다. 현재 스페인에서 비리에 연루된 혐의가 있어 조사받고 있는 정치인은 350여 명. 문제는 그중 자진해 사임한 경우가 거의 없다는 겁니다. 지난해 독일의 아네테 샤반 교육부 장관이 34년 전 쓴 박사 논문이 표절로 판정나 사임한 것이나, 프랑스의 제롬 카위자크 예산장관이 탈세 연루 의혹을 받고 검찰 수사 중 사임한 것과 대조됩니다. 위 문장은 그런 상황을 지켜보는 스페인 국민의 반발심이 깃든 언어 유희죠.



 그런데 최근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뉴스가 터져나왔습니다. 한때 스페인 민주화의 영웅으로 추앙받았던 사람, 그로 인해 ‘평생 직장’을 보장받았던 사람이 자진해 사임하겠다고 나선 겁니다. 주인공은 39년 동안 스페인 국왕으로 재위해 온 후안 카를로스 1세(76). 지난달 20일 아들 펠리페(46) 왕세자가 왕위를 이어받았으니 이제는 ‘전(前) 국왕’으로 불러야겠군요.



 카를로스 1세는 1975년 11월 22일, 독재자 프랑코가 사망하고 이틀 뒤 왕위에 올랐습니다. 프랑코 지지자들은 허수아비 왕을 세 우려 했지만 카를로스 1세는 그 기대에 부응하지 않았습니다. 스페인을 민주 법치국가로 정의하는 새 헌법이 제정됐고, 바스크·카탈루냐 등엔 자치권이 주어졌습니다. 노동조합 활동도 헌법에 의해 보장됐죠. 그러던 81년 2월 23일 저녁, 민병대 200여 명이 스페인 의회에 침입해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카를로스 1세는 그들의 협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총사령관 복장을 하고 TV 카메라 앞에 섰습니다. “민주적 절차를 힘으로 저지하려는 세력에 단호히 대처할 것을 선언합니다.” 반란군을 물러나게 하고 스페인이 군사 독재 체제로 회귀하는 걸 막아낸 그의 연설은, 윈스턴 처칠이나 넬슨 만델라의 연설에 버금가는 것으로 지금까지도 스페인 국민에게 회자됩니다.



 이처럼 국민의 존경을 받았던 카를로스 1세가 왕위를 내려놓게 된 배경은 뭘까요. 건강 이상설은 표면적 이유일 뿐입니다. 유럽 재정위기 이후 인기가 떨어져 가던 그는 2012년 아프리카 보츠와나에서 호화 코끼리 사냥 여행을 한 점이 알려지면서 여론의 뭇매를 맞았습니다. 공개 사과문을 발표했지만 추락한 지지도는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최근엔 딸 크리스티나 공주 부부가 탈세와 돈세탁에 연루돼 조사를 받았죠. 그의 개인 재산은 500만 달러(약 50억9000만원), 가족의 재산을 합치면 17억 달러(약 1조7303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국왕 사임 결정이 스페인에 미치는 영향은 만만찮습니다. 기업에서 뇌물을 받고도, 자녀가 취업 특혜를 입어도, 성(性) 추문이 터져도 뻔뻔하게 자리를 지키는 스페인의 정치인과 공무원들을 뜨끔하게 만들었기 때문이죠.



김진경 jeenkyungkim@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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