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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보균의 현장 속으로] 공포통치 원형 '젊은 스탈린'을 찾아 … 고향 조지아를 가다

중앙일보 2014.07.19 00:01 종합 10면 지면보기
 
 
 
 
 
 
 
 
 
 

스탈린(러시아어 Сталин)은 공포의 서사시(敍事詩)다. 그 시어는 잔혹하다. 학살과 숙청, 폭정과 독재, 음모와 고문-. 희생자 숫자는 나치 독일 히틀러의 만행을 압도한다.

성직자 꿈꾼 낭만 시인, 아버지 폭력에 분노조절 장애
부인 둘 잃고 냉혈인간 변신 … 섬뜩한 공산 독재자의 길


 그의 삶은 파란과 반전(反轉)의 드라마다. 그는 시인이었다. 기독교 정교(正敎) 성직자는 그의 꿈이었다. 청소년 시절 자화상이다. 20대 초반 그는 볼셰비키 혁명가로 나선다. 그의 내면은 재구성된다. 그의 지적 열기는 왕성했다. 공산당 기관지 프라브다(Правда·진실)의 창간 편집인은 그의 경력이다.

 그는 거대국가 소련(소비에트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을 완성했다. 냉전시대 세계의 반을 지배했다. 그는 러시아 출신이 아니다. 고향은 옛 소련의 남쪽 변방 그루지야(조지아 )다. 스탈린은 의문의 서사시다. 그는 자신의 내면을 감췄다. 공포 통치는 어떻게 작동했나. 그 진실은 무엇인가. 낭만의 시인에서 섬뜩한 통치자로 변신은 무엇인가. 광기(狂氣)의 카리스마는 어떻게 배양되었는가.

 스탈린의 음산한 그림자는 한반도에 드리워졌다. 그 속에 분단과 전쟁이 있다. 그는 북한에 위성국가를 만들었다. 6·25 남침을 지원했다. 그 그림자는 한국 사회에도 스며들었다. 거짓 선동, 계층·세대 간 갈등 조장, 진실 뒤틀기의 뿌리에 스탈린의 흔적이 있다.
 
레닌 사후 트로츠키와 권력 투쟁 무렵(48세)의 스탈린 그림. 전시품 앞에 박보균 대기자.(스탈린 박물관)
나 는 스탈린을 찾아 나섰다. 올 늦은 봄에 조지아에 갔다. 캅카스(Кавказ, 영어 코카서스 Caucasus) 산맥 남쪽이다. 북은 러시아와 국경, 옆은 흑해다. 남쪽 이스탄불(터키)에서 수도 트빌리시(Tbilisi)까지 비행거리 2시간15분. 트빌리시(당시 티플리스)는 젊은 시절 스탈린의 무대다.

 조지아는 오래된 기독교국가다. 문화 전통은 강렬하다. 트빌리시 풍광은 매력적이다. 장구한 역사를 담은 므츠바리(쿠라) 강과 작은 산, 시인 푸시킨 이 찾은 유황온천, 그루지야 정교 교회당, 거대한 동상, 성곽, 그림과 발레. 조지아 문자는 독창적이다.

 나는 옛 시가지 화랑에 들어갔다. 40대 주인은 “조지아 문화가 담겼다”며 그림 몇 개를 내놓는다. 알렉산드르 카즈베기(Казбеги) 초상화가 있다. 카즈베기는 19세기 그 나라 대표 문학가다. 그의 소설 『부친 살해』의 주인공 ‘코바(Коба)’는 의적(義賊)이다. 훔친 재물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준다. 캅카스 산맥의 임꺽정. 코바의 보복은 소름 끼친다. 10대 스탈린은 코바의 세계에 열광했다. 스탈린은 부탁했다. “나를 코바라고 불러 달라.” 코바는 평생 애칭이다. 50대 가이드 오스파슈빌리는 말한다. “코바는 스탈린 내면을 추적할 단서”라고 했다.

 니코 피로스마니 의 ‘마르가리타 ’ 복제품도 있다. ‘백만 송이 장미’ 사연이 담겼다. 심수봉 노래가 떠오른다. “진실한 사랑을 할 때 피어나는 장미”-. 피로스마니는 트빌리시 화가다. 그는 여배우 마르가리타를 사모했다. 그는 재산을 팔았다. 장미 백만 송이를 샀다. 그걸 선물했다. 가난한 화가의 절실한 사랑 고백. 화랑 주인은 “극한 상황에서 극단의 미를 찾는 정서”라고 했다. 스탈린의 심성은 극단의 악마적 변형인가.
 
 나는 코바를 추적했다. 스탈린의 고향으로 떠났다. 고리(Gori)-. 트빌리시에서 자동차로 70분, 북서쪽 80㎞쯤 떨어졌다. 고리 중심가에 스탈린 박물관이 있다. ‘스탈린 고딕’ 양식의 탑이 있는 웅장한 2층 건물. ‘젊은 스탈린’을 만나는 유일한 곳이다.

 스탈린의 본명은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주가시빌리(Иосиф Виссарионович Джугашвили)다. 그는 1879년 12월 21일(박물관 공식기록, 실제는 1878년 12월 6일) 태어났다. 그때 조지아는 제정(帝政) 러시아 땅이었다. 부모는 원래 농노였다. 아버지 비사리온 주가시빌리(Виссарион·1850~1909)는 작은 구둣방을 열었다. 스탈린은 유일한 혈육. 먼저 난 두 아들은 어릴 때 숨졌다. 박물관 앞에 스탈린이 태어난 집이 있다. 나무와 흙벽돌로 지은 두 칸짜리(15평) 오두막이다. 그리스 신전풍의 대리석 파빌리온이 지붕부터 집을 감싸고 있다. 숭배의 전당 같다.

 어머니 예카테리나 케테반(애칭, Кеке 케케·1858~1937)은 아들을 교회 성직자로 키우려 했다. 아버지는 구둣방을 넘기려 했다. 아버지는 심한 술주정에다 난폭했다. 아내와 아들을 마구 때렸다. 어머니는 헌신적이었다. 스탈린과 히틀러의 유년은 비슷하다. 그런 체험은 분노조절 장애, 복수욕을 낳는다. 김학준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러시아혁명사)은 "세상은 폭력으로 가득찼다고 어린 스탈린은 믿게 됐다”고 했다.

박 물관은 10여 개 스탈린상(像), 초상화 등 그림 30여 점, 사진, 자료, 신문기사를 무더기로 펼친다. 전시실 입구부터 스탈린 동상이다. 위압적이고 시위하는 표정이다. 그 시대의 영광만을 기억하라는 명령 같다. 어린 스탈린, 주가시빌리는 소셀로(Сосело), 소소(Сосо)로 불렸다. 그는 고리의 교회학교에 들어갔다. 박물관 영어 안내원이 설명한다. “소소는 영리했고, 공부를 잘했다. 찬송가도 잘 불렀다.” 학교 밖에선 심술궂고 싸움에선 집요했다.

 소년 스탈린 동상이 있다. 옆 전시판에 소설가 카즈베기의 사진이 붙어 있다. ‘코바’가 스탈린의 감수성을 자극하는 듯하다.
 

 그는 장학생으로 뽑혔다. 트빌리시 신학교에 들어갔다(15세). 기숙사 생활의 엘리트 교육을 받았다. 그는 첫해에 전체 과목에서 거의 최고점수를 받았다. 어머니의 소원은 이루어지는 듯했다. 그는 문학과 역사에 심취했다. 그가 신학교 재학 때 그루지야어로 쓴 시가 전시돼 있다. 설명문은 이렇다. “소셀로의 시 ‘아침’, 교과서에 실림”-. 유럽 단체 관광객들이 궁금해한다. 안내원이 ‘아침’을 영어로 바꿔 읽는다. 도널드 레이필드(Donald Rayfield) 런던대학 교수의 번역이다.

 “분홍 꽃봉오리 피더니/ 연한 푸른 빛 제비꽃이 되네/ 부드러운 산들바람에/ 계곡의 백합 풀 위에 눕고/ 짙푸른 하늘에서 종달새 노래하며/ 하늘 높이 날고/ 목청 좋은 나이팅게일새/ 덤불에서 아이들에게 노래하네/ 꽃이여 아! 나의 그루지야여/ 평화가 내 나라에 퍼지게 하라/ 친구여 노력하자/ 나라를 빛내자”-. 트빌리시 문단은 시를 호평했다. “자연과 조국에 대한 순수한 감성.”
 
 신학교 교사들은 바깥세상을 불온하게 여겼다. 제정 러시아 체제 비판 소설, 시, 사회주의 이론서는 거부됐다. 교사들은 소지품을 검사했다. 학생들 사이의 감시와 밀고를 조장했다 -. “학생들은 금서들을 학교에 몰래 들여왔다. 스탈린은 빅토르 위고의 『93년』을 읽었다. 도스토옙스키의 『악령』, 체르니셰프스키의 『무엇을 할 것인가』도 읽었다. 스탈린은 이미 신에 대한 의문을 가졌다. 다윈의 『종의 기원』의 영향이다.”(『Young Stalin』, 2008시몬 세백 몬테피오레)

 카를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은 그의 사고를 자극했다. 유년과 10대의 기억은 마르크스 폭력혁명론에 빠지게 했다. 그는 졸업을 앞두고 사제(司祭)의 길에서 이탈했다. 청년 스탈린, 코바의 초상화가 눈길을 끈다. 목을 감싼 스카프와 검은색 재킷. “타오르는 눈빛을 가진 젊은이”다. 러시아 군주 체제에 저항하는 눈빛이다. 강렬하다. 그 눈빛은 세상을 뒤엎으려는 열망을 내게 쏟아낸다. 그는 거친 볼셰비키였다. 낭만적 시심(詩心)을 마음에서 제거했다.

비 밀경찰 오흐라나(Охрана) 의 스탈린 수배전단이 붙어 있다. 안내문은 “일곱 살에 걸린 천연두 자국이 얼굴에 남아 있고 왼팔은 오른팔보다 짧다”고 돼 있다. 그는 마차에 치였다(12세). 그 사고로 왼쪽 팔이 짧아졌다. 제1차 세계대전 때 그는 징집 면제를 받았다. 그는 한 손을 코트 안에 밀거나 뒷주머니에 넣는다. 안내원은 “사고로 인한 습관일 것”으로 추정했다.

 그는 집념과 의지의 혁명가였다. 1902년부터 11년간 일곱 번 체포됐다. 그리고 시베리아 유형지에서 여섯 번 탈출했다. 전시실에 지도가 있다. 초록색(시베리아 유형)과 보라색(탈출 표시) 화살표가 어지럽게 섞여 있다. 혹한의 시베리아에서 그는 썰매를 타고 도망쳤다. 그의 내면은 단련된다. 1912년 그는 당 중앙위원이 됐다. 그 무렵 이름을 스탈(Сталь·강철)에서 따온다. 스탈린이 등장한다. 그는 레닌의 신임을 받았다.

전 시실 한쪽은 스탈린 가족 코너다. 그는 두 번 결혼했다. 첫 부인은 케테반 스바니제(Сванидзе·1885~1907)는 신학교 친구의 여동생이다. 상냥한 미인으로 양장점 재봉사였다. 첫 아들을 얻었다. 결혼 1년여 뒤 부인은 결핵으로 숨졌다. 스탈린은 충격에 빠졌다. “내 마음속에 사람에 대한 마지막 온정도 사라졌다-. 신학교 친구는 단언했다. 스탈린은 앞으로 도덕적 속박(moral restraint)에서 벗어나 야망과 복수의 지시만 받을 것이다.”(『스탈린』 로버트 서비스, 2005년)

 두 번째 결혼은 1919년. 나데즈다 알릴루예바(Аллилуева)는 18세였다. 둘은 1남1녀를 낳는다. 알릴루예바는 자존심이 강하면서 주변을 배려했다. 스탈린은 어린 아내를 자주 무시했다. 1932년 혁명 기념 파티에서 부부싸움을 했다. 그날 밤 아내는 의문의 권총 자살한다(31세). 사건에 대한 외동딸 스베틀라나(Светлана·1926~2011)의 기억이다(영어회고록, Twenty Letters to a Friend, 1967). “아버지는 어머니의 자살을 등 뒤에서 가해진 배신으로 받아들였다. 사람에 대한 신뢰는 뿌리째 쓸어내려갔다.” 스탈린의 냉혈한적 면모는 강화된다. 보복과 지배욕은 공산주의 국가폭력으로 실천된다.

 스탈린이 그의 어머니 케케와 다정하게 있는 그림도 있다. 케케는 자식의 10대 시절을 그리워했다. 케케는 트빌리시에 살았다. 철권통치자 스탈린은 어머니를 찾았다. “나는 네가 성직자가 되길 바랐다.”-. 어머니의 말에 스탈린은 반쯤 웃었다.

 세 자녀 모두 비운의 삶을 살았다. 첫 아들 야코프(Яков)는 독·소전에 참전,포로가 된다. “항복과 포로는 반역이다.”- 스탈린은 독일군의 포로교환 제의를 거부했다. 1943년 야코프는 수용소에서 숨진다(36세). 둘째 아들 바실리(Василий)는 젊은 공군장군이었다. 알코올중독자로 생을 마감한다(41세). 스탈린은 스베틀라나를 귀여워했다. 딸에게 보낸 편지들, 안고 있는 사진-. 편지의 끝은 “뽀뽀한다, 아빠”로 돼 있다. 스탈린의 극단적 비정함은 여기선 사라진다. 스베틀라나는 미국 망명, 귀국, 영국 거주. 마지막에 미국에서 숨졌다.

군주론 심취, 이반 뇌제 억압체제 연구 … '붉은 차르'가 되다

스탈린은 평생 독서광이다. 그는 레닌(Ленин·1870~1924)을 배우려 했다. 레닌은 그의 롤 모델이었다. 둘 사이의 친밀함을 드러내려는 그림, 사진이 많다. 니콜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애독서였다. 『군주론』은 인간과 권력 관계의 불편한 진실을 담았다. 그 책은 권력운영에서 술책과 용기, 대중 관리에서 공포와 사랑을 비교 분석한다. 스탈린은 이반 뇌제(雷帝)의 공포 통치를 주목했다. 그 통치술은 마르크스 폭력혁명론에 접목된다. 스탈린은 ‘붉은 차르(Царь)’가 된다.

 대숙청(1934년 12월~38년)은 공산주의 폭정의 상징이다. “아버지가 상대방을 인민의 적(敵)으로 판단하면 어떤 인연이든 소멸한다. 파멸의 운명이 된다.”(스베틀라나 회고록) 혁명 동지들은 무참히 숨져갔다. 친인척들도 투옥, 처형됐다. 스탈린은 근원을 제거한다. “사람이 없으면 문제가 없다.(нет Человек,нет Пробпема, 녜트 칠로베카 녜트 프라블렘)”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의 추정 규모는 600만. 스탈린 시절 희생 숫자는 두 배 이상이다. 우크라이나 기근 때 700만~1000만, 대숙청은 800만쯤이다.

 전시실은 대숙청 기록을 생략한다. 그것은 스탈린 박물관의 결정적 약점이다. 스탈린 찬양만 고조된다. 피의 도살자인 야고다·예조프·베리야의 사진은 없다. 베리야는 스탈린과 같은 조지아 출신이다. 숙청당한 지노비예프·카메네프·부하린 사진도 없다. 레온 트로츠키의 작은 사진만이 눈에 띈다. 그는 레닌 사후의 권력 승계 투쟁에서 패배한다. 1940년 망명지 멕시코에서 암살당한다. 스탈린은 프락티크(Практик)다. 실용과 실천을 중시한다. 트로츠키는 혁명의 장엄한 미래를 말했다. 1922년 4월 4일자 당 기관지 프라브다 1면이 붙어 있다. 스탈린의 공산당 서기장 등장 기사다. 서기장은 권력 장악의 발판이었다. 그 자리의 잠재력을 아는 사람은 처음엔 없었다.

박 물관 밖에 아담한 석상이 있다. 외부에 존재하는 전 세계 거의 유일한 스탈린 조각상이다. 스탈린 유적은 고향에서도 불안하다. 2010년 고리 중앙광장에서 6m 높이의 스탈린 동상이 철거됐다. 친미노선의 미하일 사카슈빌리 정권 시절이다. 2013년 친러시아 정권이 들어섰다. 스탈린 박물관은 살아남았다. 박물관은 1957년 문을 열었다(스탈린 사망 4년 뒤).

 조지아 사람들의 스탈린 평가는 엇갈린다. 존경과 향수, 증오와 비판이다. 긍정적 시각은 자부심이다. “2차 대전 승리. 소련을 초강대국으로 만든 고리의 사나이”라는 것이다. 반대쪽에선 ‘배신자’라고 한다. “스탈린은 조지아 출신의 약점을 덮기 위해 고향 사람들을 더욱 가혹하게 다뤘다”는 비판이다.

 나는 트빌리시로 돌아갔다. 옛 시가지 쪽 식당에 갔다. 관광가이드 오스파슈빌리가 사페라비(Saperavi) 와인을 시켰다. 상표에 대원수 군복의 스탈린 사진이 붙어 있다. 조지아는 와인 발상지다. 그는 "음식과 어울리는 와인 고르기가 스탈린의 취미였다”고 했다.

 우리는 젊은 스탈린에 대한 추적을 정리했다. 영어가 능숙한 오스파슈빌리는 전직 교사다. 여러 연구 서적도 참고했다. 스탈린 공포는 어떻게 생산되었는가. 폭정의 요소는 무엇인가. 어린 시절 가정폭력 체험, 습관적인 의심과 생존본능, 캅카스 산맥의 복수 문화, 신학교 시절의 억압, 지적 학습능력, 결혼 실패 충격, 공산주의 폭력혁명 심취, 교활한 지배욕구, 대국 소련 발전의 사명감.-

 스탈린 공포통치는 최악이다. 권력 독점과 대중 장악의 그 진실은 복잡하다. 시대 상황, 증오의 공산주의 이념, 냉혹한 천성이 섞여 배합됐다. 그것이 악성 변종(變種)했다.

[S BOX] 혁명자금 마련 위해 은행강도 사주 … 진실 아는 자 숙청

은행 강도는 젊은 스탈린의 이력이다. 혁명 자금 조달 수단이다. 1907년 6월 ‘트빌리시 은행 강도 사건’-. 25세 행동대장의 별명은 카모(Камо). 전설적 볼셰비키다. 그는 아르메니아 사람이다. 태어난 곳은 스탈린 고향인 고리. 스탈린과 감옥 동기였다.

 범행 장소는 에리반 광장. 지금은 ‘자유 광장’이다. 2003년 장미혁명 현장이다. 카모는 대원 열 명을 농부로 위장시켰다. 광장 주변에 배치했다. 카모는 기병대 장교 차림. 돈을 실은 역마차가 다가왔다. 범인들은 수류탄을 던지고 총을 쏘았다. 아우성 속 카모의 동작은 전광석화였다. 돈 자루를 훔쳐 마차에 싣고 달아났다. 자루 속 돈은 34만 루블(340만 달러 추산). 초대형 사건이었다. 배후에 스탈린이 있었다. 스탈린은 의적 코바의 심정으로 연출했다. 그 돈은 레닌에게 전달됐다. 1922년 카모는 교통사고로 숨졌다. 묘비가 광장 앞(지금은 푸시킨공원)에 있었다. 스탈린은 권력 장악 후 묘비를 없앴다. 그는 과거 정체를 숨겼다. 그의 진실을 아는 사람은 숙청됐다.

 스탈린 만찬은 풍성했다. 조지아(옛 그루지야) 식이다. 술, 노래, 담배가 곁들여졌다. 그는 성가대 출신이다. 야비한 습관이 가끔 작동됐다. 상대방 약점을 잡으려 했다. 보드카 건배는 유용했다. 그는 자기 잔엔 화이트 와인을 몰래 채웠다. 상대방의 ‘취중 진담’을 주목했다.

트빌리시·고리(조지아 공화국)=글·사진 박보균 대기자

◆조지아(Georgia)=2010년 국명을 러시아어 그루지야(Грузия) 대신 영어 조지아로 바꿨다. 인구 494만 명, 크기 6만9700㎢(한반도의 30%), 1인당 GDP 3558달러, 수도 트빌리시(인구 130만 명). 오랜 기독교(330년 공인) 국가. 1801년 제정 러시아에 편입, 1878년 완전 병합됐다. 소련 해체 무렵인 1991년 독립. 셰바르드나제 집권→장미혁명(2003년)→사카슈빌리 정권(친미)에 이어 2013년 10월 친러시아 정권이 들어섰다. 2008년 남오세티아를 놓고 러시아와 전쟁. 그 시절 친미 정권은 스탈린 박물관의 성격을 ‘기념’

사진 설명

23세 청년 스탈린 초상화 ‘타오르는 눈빛을 가진 젊은이’.(스탈린 박물관 전시)

박물관 앞의 스탈린 석상은 건재하다. 뒤쪽 대리석 파빌리온 속에 스탈린 생가가 있다.

대조국 수호전쟁(2차 세계대전) 승전 홀.

희귀한 스탈린 가족사진(1935년 촬영). 어머니 케케, 큰아들 야코프, 작은아들 바실리(왼쪽), 앞은 외동딸 스베틀라나. 모두 비운의 삶을 살았다.

첫 부인(스바니제), 결핵으로 숨졌다(사진 왼쪽), 두 번째 부인(알릴루예바), 자살했다(오른쪽).

스탈린이 신학교 재학 때 쓴 낭만시 ‘아침’이 실린 교과서(1916년 판).

스탈린이 사주한 ‘트빌리시 은행 강도’ 현장인 에리반 광장의 지금 모습(자유광장). 자유 기념탑(세인트 조지 동상)이 서 있다.

꽃병에 어린 스탈린 ‘소소’가 그려져 있다.

고리 교회학교 재학 때 어린 스탈린 소소(왼쪽 둘째)가 독서토론하는 모습. (스탈린 박물관 전시그림).

스탈린 전용 방탄 객차

스탈린과 그의 어머니(어머니는 아들을 성직자로 키우려고 했다).

북한에서 번역한 전집 ‘이·쓰딸린’(스탈린 박물관 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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