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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개의 떡살로 남은 사내'

중앙일보 2014.07.18 01:41 Week& 8면 지면보기
떡살 컬렉터 김길성(오른쪽)씨가 40년 동안 수집한 떡살과 다식판을 펼쳐 보이며 웃고 있다. 소나무 반닫이 세곳에 보관된 떡살은 절반만 깔았는데도 거실이 꽉 찼다. 그의 옆에서 아내 남영자씨가 떡살을 어루만지고 있다.



김서령의 이야기가 있는 집 (26) 부산 수영구 떡살 컬렉터 김길성씨

사람이 60년을 살고 나면 곁에 남는 게 무엇인가.



자식? 은행 잔고? 부동산? 명성? 친구? 아니 그런 외부적 잣대로 존엄한 우리 삶을 재단할 수 있다고는 물론 생각지 않는다. 하지만 ‘천 개의 떡살을 가진 사내’가 부산에 살고 있다는 소문을 들은 후에 나는 호기심을 누르지 못하고 부산행 KTX에 올랐다. 예전에 읽은 윤흥길의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에선 윤나게 닦은 아홉켤레 구두와 안동 권씨라는 뼈대만을 자랑하던 사내가 등장했다.



떡살 천개를 모은 남자의 삶도 자신이 모은 물건들 안으로 응축되는 것일까. 그래서 이번 호는 집 이야기가 아니다. 오로지 떡살 이야기다. 짧게는 길이 10㎝에서 길어도 50㎝ 미만의 도톰하고 야무진 나무 막대기! 100년 이상 사람의 손길을 받아 매끄럽게 윤이 도는 그 물건이 한 가족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양을 지켜본 이야기다.



글=김서령 칼럼니스트, 사진=송봉근 기자



처절한 컬렉터의 세계



김길성씨는 1975년부터 지금까지 꼬박 40년간 나무 떡살과 다식판(이하 떡살)을 모아온 사람이다. 물론 떡살만 수집한 건 아니다. 동양화, 서양화에 이어 베갯머리, 베갯잇, 횟대보, 서산(책 읽은 회수를 표시하는 종이막대), 머리빗, 소반, 옛사진, 카메라, 안경, 수저집 등등의 민속품을 모았다. 그러나 나머지 것들은 중간에 흥을 잃거나 흩어져버렸고 예순을 넘긴 지금 곁에 남은 건 1000여 점의 떡살들이다. 원래는 베갯머리 2000점, 떡살 2000점을 가졌으나 수놓은 베갯머리는 100개씩 장에 넣어 전시회를 한 후 구매자가 몰려들어 다 팔아버렸다. 떡살도 절반 정도만 엄정하게 추려놓고 나머지 1000여 점은 어느 박물관으로 보냈다.



김씨를 만나자마자 나는 거두절미하고 “컬렉터란 뭔가요? 그것도 직업이 될 수 있나요?”를 물었다. 그는 농담처럼 “컬렉터란 인생 끝자락이 처절한 사람들입니다. 언제나 돈에 쪼들리지요. 당연히 직업이 될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처절이라니 무슨 과장되고 비극적 언사냐고 따졌더니 그는 이렇게 답했다. “첫째 물건을 수집하느라 돈을 다 써버려 가진 돈이 없어요. 그래서 처절하고. 둘째, 가족들에게 저 좋은 일만 하는 이기적 인간으로 취급받아 고개를 들 수가 없어요. 그래서 처절하고. 셋째, 오래 수집에 몰두하다 보면 대개는 전문적 지식과 식견을 갖게 돼요. 그래도 사회적으로는 얼치기 취급을 받거든요. 논문 쓰고 학위 따서 대학에서 강의하는 학자의 말은 공신력이 있지만 우리 말은 잘 안 믿어주니 그것도 처절하지요.”



그래도 남들이 모르는 즐거움이 있을 거 아니냐고 묻자 얼굴 근육이 완연히 부드러워진다. 이건 분명 매혹을 맛본 자의 뿌듯함이다. “어디서 떡살 하나를 구하면 가방에 넣지 않고 품안에 품고 오지요. 차 안에서도 못 참고 꺼내서 들여다보고, 밤중에도 자다 깨서 쓰다듬고. 사람을 그만큼 아꼈으면 진작에 일 났을 겁니다.”



이쯤 되면 구미가 확 당긴다.



“수집벽은 들여다보면 사실 호기심과 욕심입니다. 거기다 나중에 값이 오를지도 모른다는 기대와 남이 안 하는 짓을 한다는 자부심 정도? 그런데 문제는 그런 기질이 DNA 속에 녹아있다는 겁니다. 우리 어머니는 지금 92세신데 미국 딸네집에 갔다 실크 모자를 쓰고 그저께 돌아오셨어요. 5·16 직후 부정축재자로 몰려 집안 살림에 벌겋게 압류가 붙었는데도 대한극장에서 상영하는 ‘벤허’를 보러 부산에서 서울까지 기차를 타고 올라가셨던 분입니다.” 김씨에겐 일란성 쌍둥이 형이 있다. 모습과 기질이 똑같은데다 혼인도 같은 날 했다. 유성온천으로 신혼여행도 같이 갔는데 가게 사람들이 ‘어제 왔던 남자가 여자를 바꿔서 또 왔다’고 수군거리던 걸 아직 기억한다. 당연히 형도 열렬한 수집가다. “어머니 말씀이 형이 어렸을 때 맨 처음 얻은 돈으로 사온 게 호루라기였대요. 형은 지금 광적인 오디오 매니어가 됐지요. 저 역시 그랬답니다. 군대 가면서 웬 궤짝 하나를 놓고 갔길래 어머니가 궁금해서 열어보니 쓸 데도 없는 바둑돌·단추·명찰 같은 것들이라 내다 버렸다 하더군요.”



꽃·물고기·문자 등 다양한 문양을 가진 떡살과 다식판들. 물고기는 다남, 모란은 부귀, 연꽃은 청정을 상징한다. 김씨는 떡살 외에도 다양한 민속품을 수집하고 있다. 해방 직후부터 6·25 사변 이후까지 한국을 다녀간 외국인이 기념품으로 사간 목각 인형들(오른쪽). 외국의 벼룩시장에 나와 한국으로 돌아온 ‘회귀 유물’이다.




전통문양의 보고, 떡살



김길성씨의 현재 직함은 이계전통문양연구소 소장이다. 나무에 박힌 문양의 아름다움 탓에 떡살을 매만지게 됐고 전통문양의 미에 깊이 빠져들었다.“ 떡살은 문양의 보고예요. 우리 민족만의 문양이 거기 다 들어있지요. 자연에서 체득한 미를 응용하는 심미안과 가슴 속 기원들과 가문의 동질성을 읽을 수 있어요. 우리는 생활도구를 간결하게 만들지만 무의미하게 두지 않고 무늬를 새길 줄 아는 민족이에요. 시대는 달라도 무늬를 만들어내는 가치관과 본질은 현재도 여전하지요.” 그는 떡살 하나를 놓고 능히 열 시간을 이야기 할 수 있는 사람이다.



떡살은 대개 꽃, 물고기, 글자, 기하학적 무늬가 들어있다. 다식판 역시 동식물과 글자로 구성되는데 문양마다 상징하는 의미가 다르다. 물고기는 다남(多男), 모란은 부귀, 매화는 회춘, 연꽃은 청정, 거북은 장수, 국수 모양으로 세로 선이 죽죽 간 문양도 장수. 아예 글자로 富·貴·多男·壽·福 ·喜·康寧을 새겨넣기도 했다. “옛사람들은 떡살에 문양을 찍으며 나쁜 것을 물리치고 부귀와 장수를 빌었어요. 흥미로운 건 상류층은 가진 게 많으면서도 끊임없이 부귀·다남 같은 복을 비는 문구를 선호해요. 서민들은 욕심을 부릴 만 한데도 그저 귀신을 쫓고 무탈하길 바라는 벽사를 선택하고! 하하.”



옛 조상이 떡살을 사용했던 것은 미감 때문만은 아니었다. “떡에 무늬가 들어가면 겹겹이 쌓아도 미끄러지지 않아요. 요철에 기름이 고여 맛도 더 고소해지고 선이 있어 자를 때도 편리하지요. 무늬만으로 누구 집안 떡인지를 알아 가문의 결속에도 기여했고, 교훈적 내용을 담았으니 아이 교육에도 한몫을 했지요.”



수집과 애호만으로 끝내서는 진정한 컬렉터라고 할 수 없다. 모은 물건을 분류·정리·해석할 줄 알아야한다. 사진 찍고 논문 쓰고 책을 내 사회에 돌려주는 것까지가 컬렉터의 몫이다. 김길성 소장은 지금까지 세 권의 책을 냈다. 『한국전통 다식과 떡살문양』『한국전통 자수 베갯모』 『한국근대 자수, 바늘그림』등이다. “곡식을 살 때 흔히 수북이 주세요. 하잖아요?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됫박 위로 높이 올리라는 말도 되지만 알고 보면 그게 수복희 예요. 壽福喜! 한국인의 가치관이 담겨있는 말이지요. 다식판과 떡살에 가장 자주 등장하는 것도 바로 이 말입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웠을지는 몰라도 컬렉터의 삶이 그의 말처럼 처절한 건 아니다. 떡살을 모은다고 실내가 온통 떡살로 뒤덮힌 것도 아니었다. 20년째 살고 있다는 김길성씨 집 거실엔 떡살이 보이지 않았다. 그건 소나무 반닫이 세 곳에 차곡차곡 쌓여있었다. 오히려 집을 가득 채우고 있는 건 그의 아내 남영자씨가 헝겊에다 수를 놓은 ‘바늘 그림’들이었다. 떡살의 문양에 매혹된 그는 전통 문양을 현대적으로 활용하는 방법을 찾다 아내에게 수놓기를 제안했다. 재작년엔 아내의 회갑기념으로 떡판과 다식판의 전통 문양을 실로 새긴 조촐한 자수전시회도 마련했다. 표정이 다채로운 물고기와 새와 꽃들, 나는 넋을 잃고 아름다운 그것들을 들여다봤다.



그는 쉰 어름까지 건축 사업을 하다 나중엔 전적으로 컬렉터의 길에 매진했다. 무슨 돈으로 1남 1녀를 키웠냐고 묻는 내게 김길성씨는 결국 고백했다. “베갯머리 판 돈으로 5, 6년간 잘 먹고 살았지요. 떡살 정리한 걸로 또 한 5년 생활비로 쓰고.” 컬렉터가 직업이 될 수 없다는 말도 그러고보니 곧이곧대로 들을 일은 아닌가보다.







증조할머니의 은수저



아내 남영자씨는 입으로는 “떡살이라면 지긋지긋 합니더”라면서도 손으로는 쉬지 않고 떡살을 매만졌다. 하긴 30년 전 월급이 30만원도 못될 때 남편이 50만원을 주고 떡살 하나를 산 적도 있다니 살림사는 사람으로선 지긋지긋도 하겠다. 남편은 민망한지 얼른 말을 돌린다. “이건 감나무예요. 떡살 만드는 나무는 결이 치밀하고 탄력성이 좋아야 하거든요. 냄새 나는 소나무·전나무는 안 되고 강도가 무른 오동나무·피나무·버드나무도 안 되고 나이테가 뚜렷해 부분 마모가 우려되는 느티나무· 가죽나무도 안 되고 강하지만 잘 틀어지는 참나무·떡갈나무도 적당치 않아요. 야물고 결 고운 은행나무·호두나무·때죽나무·팽나무·돌배나무·살구나무·벚나무·팽나무·고로쇠나무가 좋지만 최고로 치는 건 역시 감나무·대추나무·박달나무지요.”



 이 집은 혼수도 떡살이었다. 딸이 시집갈 때 가장 아끼는 떡살 넷을 골라 보냈다. 객관적 평가가 궁금해진 딸이 ‘TV쇼 진품명품’에 들고나갔더니 양의숙 위원이 감정가 550만원을 매기며 극찬했다 한다. 손자가 태어난 날 김씨는 일부러 부산역에 나가 그날치 온갖 신문을 1부씩 샀다. “무명 보자기에 고이 싸뒀다가 돌날 선물로 줬지요. 나중엔 금반지보다 더 좋은 선물이 될 겁니다. 20년 후 성인이 되면 본인에게 전하라고 했어요. 자기 태어난 날의 정보가 깨알같이 담겨 있을 거 아닙니까” 컬렉터다운 선물이다. 그는 지금도 증조할머니가 남겨준 은수저로 밥을 먹는다. 역사는 박물관이 아니라 일상 안에 있다. 아름다움도 갤러리 안이 아니라 의식주 깊숙이 스며들어 있어야 진짜다.



 집을 나오며 저 1000여 개의 귀하고 아까운 떡살을 계속 반닫이 속에 넣어둘 거냐고 나는 물었다. 그는 몹시 난감해 했다. “솔직히 나는 별 대안이 없어요. 박물관을 짓는 것이 컬렉터의 최종 꿈이지만 그만한 경제력이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요.” 그러고는 울적하게 말했다. “박물관을 짓겠다는 사람이 있으면 넘겨주고 싶어요. 물론 정당한 값을 받아야지요. 내 형편이 어렵다고 아무렇게나 흩어버리긴 싫습니다. 정 임자가 없으면 갖고 있다 아들 딸에게 물려줘야지요. 그게 40년간 함께 해온 저 떡살과 내 삶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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