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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른 삶 느린 생각] 우리는 지금 새 질서 향한 큰 굽이에 서 있는 건 아닐까

중앙선데이 2014.07.13 02:36 383호 28면 지면보기
일러스트 강일구
시대와 역사를 움직이는 여러 요인들은 일정한 구조와 형상으로 안정되기도 하고, 그것이 무너지면서 혼란과 갈등의 상태로 옮겨가기도 한다. 그리고 운수가 좋으면, 그것은 다시 일정한 형상으로 안정된다. 이러한 변화의 화전(和戰)의 순환은 정치나 사회의 방향 재조정에도 적용된다.

전환기의 낙담과 희망

최근 중국 시진핑 주석의 한국 방문은 동아시아의 국제관계 그리고 남북관계에 있어서 중요한 변화를 나타내는 것으로 일컬어진다. 그의 방문은 중국이 북보다 남에 가까워지게 되었거나, 적어도 종전보다는 남북에 대한 관계에서 등거리(等距離)의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는 증거가 된다. 이러한 한중 관계의 재조정의 배경에는 영토문제로 긴장 상태에 들어가 있는 중일 관계가 있다. 일본은 피랍자 문제와 관련하여 북에 대한 제제를 완화하고 경제적 지원을 하겠다는 의도를 보였다. 일본이 ‘집단자위권’을 확대하는 결정을 내리고, 북한이 핵실험의 강행과 빈번한 미사일 실험으로 공격적인 태도를 굳히고 있는데도 이러한 교섭의 전망이 트이게 된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사건들의 전개는, 지금까지 한·미·일이 유지하고 있는 동맹적 관계에 비추어, 한·중·일 세 나라에의 관계에 상당한 변화가 있을 것을 예상하게 한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보다 쉽게 마찰이 유발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하는 한편, 새로운 합종연횡(合縱連衡) 가운데 이루어질 새로운 균형을 예상하게 한다.

지난해로 기억되는 일로, 금년의 금융위기를 설명하면서, 런던정경대(LSE)의 명예교수이며 귀족원 의원인 인도 출신의 메그나드 데사이 경(卿)은 자본주의의 중심이 아시아로 옮겨가고 있는 것이 위기의 가장 큰 원인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동아시아의 국제관계와 정치 상황에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도 결국 아시아, 특히 중국의 경제력의 거대화로 인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자본주의 중심 이동이 더 분명해짐에 따라, 그것은 일정한 질서로 정착하게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에 이어지는 것인지 아닌지는 확실치 않으나 사회나 정치가 그 국면을 바꾸는 전환기에 들어섰다는 느낌은 한국 사회에도 해당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일단 우리가 받는 인상은 사회의 어떤 부분이 막바지에 이르렀다는 것인데, 그것은 다른 한편으로 우리가 새로운 질서로 나아가는 하나의 굽이를 돌고 있는 때문일 수도 있다.

막바지에 이른 듯 한 느낌을 극적으로 표현한 것이 세월호 사건이다. 이 참사는 사람들로 하여금 사회가 기능부전에 빠져 있고, 부패·비능율·도덕적 무감각 등이 얽혀서 그러한 참사가 일어나게 되었다는 것을 충격적으로 느끼게 했다. 고성의 군부대에서 있었던 병사의 총기난사 사건은 군부대의 기율 문제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우리 사회의 인간관계의 비인간화를 생각하게 한다. 수사 대상이 되었던 철도시설공단 이사장의 투신자살, 살인 교사 혐의를 받고 있는 시의원의 뉴스 등 공직자들의 비리문제는 오늘의 사회상에 대하여 더 심각한 회의를 불러일으킨다. 이것을 심화하는 것은 내각과 정부 고위직 후보자들이 청문회를 열기도 전에 드러나는 도덕적 결함으로 하여 탈락하는 사태다.

청문회 모습 추하지만 비리 예방 효과도
그러나 위안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의혹들을 폭로하는 절차가, 반드시 아름다운 일은 아니면서도, 그것을 제거하는 데에 도움을 주는 과정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국민 일반에게 새로운 윤리도덕의 필요를 인식하게 하고 앞으로의 공직 지망자에게 예비적 경고를 발하는 효과를 갖는다.

문창극 총리 후보의 경우는 그에 관련된 조금 더 미묘한 사회적 의미들을 생각하게 한다. 문제가 되었던 것은 부패나 부정의 문제가 아니라 사상이었다. 한국의 특수한 역사적 경험에 비추어, 일본 제국주의 지배를 정당화하고 또 민족의 과거를 폄하하는 등의 발언이 문제가 되는 것은 이해할 만한 일이라 할 수 있다(그의 발언이 참으로 그러한 것인가는 달리 문제가 될 수 있다. 개혁 교회의 예정설은 신의 벌과 구원이 인간의 의지와 관계없이 미리 정해진 것이라 하고, 구원의 약속은 신앙의 확실성에서 오며 그 증거는 매일 매일의 정진에서 나타난다고 한다. 개혁 신학이 말하는 영원한 형벌의 가능성이 나날의 일에 정진하게 하는 윤리를 낳고 그것이 자본주의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는 것은 막스 베버의 자본주의의 정신적 뿌리에 대한 유명한 설명이다. 문창극 후보가 일본의 지배를 신이 내린 형벌로 말한 것도 이 비슷한 테두리에서 해석돼야 할지 모른다). 그의 신앙의 개조를 문제 삼는 것은, 그의 지지자들이 주장하듯이, 민주적 절차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국정을 맡을 사람의 생각의 흐름을 확인하고자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법률적 절차의 문제에 더 하여, 또 하나의 문제는 역사의 어떤 부분에 대한 견해가 참으로 국정을 맡을 사람의 마음가짐을 시험하는 요건이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의 정치 상황이 조금 더 안정된 것이라면, 검증 절차에서 중요한 것은 정치·경제·사회적 과제에 대한 소견을 듣는 일일 것이다. 그러는 사이에 답변자의 소신은 저절로 드러나게 될 것이다. 그러한 과제를 간단히 말할 수는 없지만, 예컨대, 경제·정치의 능동적 기능의 제고(提高) 문제 이외에 건강·교육·연금·실직 보상금, 또는 더 확대하여, 문화·주거·휴가 등을 위하여 정치가 무엇을 어느 정도 해야 하는가, 그리고 거기에 경제와 재정정책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의 문제들이 과제들에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방금 든 뒷 부분, 즉 주로 복지에 관련되 부분은, 프랑스의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가 그의 저서에서 되풀이해 강조하는 국가 재정 운영의 과제를 빌려 온 것이다. 지난번의 칼럼에서도 언급했지만, 피케티의 『21세기 자본론』의 주제는 소득과 자산 격차가 기하급수적으로 커질 수밖에 없는 것이 자본주의의 본질적 속성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것은 자유와 평등의 민주주의의 이상을 무력화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생각으로는, 미국을 포함하여 서구 여러 나라들이 이룩한 것은 분배의 균형을 지향하는 ‘사회국가’이다(그는 중국이나 인도도 결국 여기를 향하는 것으로 말한다). 이것은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의 실패에 대조된다(앞에서 언급했던 영국의 데사이도 빈곤 문제 등 사회문제의 해결에 마르크스주의가 실패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마르크스주의로부터 자본주의 경제학으로 전향한 사람이다).

성장 이룬 한국, 이념 극복할 능력 충분
물론 사회국가의 실현을 위해서는 다른 요인들이 있다. 투자와 성장과 이윤이 경제의 원동력이라는 것은 시인하지 않을 수 없는 사실이다. 정부나 공공기구의 투명성의 확보는 또 하나의 조건이다. 숙의(熟議)의 민주주의는 다른 또 하나의 조건이다(이것이 반드시 대결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서 사회정의를 비롯한 사회적 이념이 현실화된다. 롤스가 말한 바와 같이, 불평등도, 이러한 숙의를 통하여, 가장 불리한 입장에 있는 사람이 그것으로 혜택을 입게 된다는 조건하에서 정당화된다. 또 인간적 삶과 평화 등의 도덕적 가치에 대한 신뢰가 일반화되는 것도 중요하다. 이러한 요건들로 하여, 피케티의 생각에, 경제학은 정치경제학이어야 한다.

말할 것도 없이 여기에서 논하려는 것은 피케티의 자본주의론이 아니다. 이글의 목적은 그의 생각에 비추어 오늘날의 우리가 어디에 있는가를 가늠해보자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문창극 총리 후보의 검증 문제로 돌아가면, 문제 된 것은 그의 역사관이었다. 이것은 더 확대하면, 그 옳고 그름을 떠나서, 이데올로기가 우리에게 중요한 정치적 사고의 동기가 된다는 것이다.

최근 세계적으로 큰 뉴스가 된 사건의 하나는 전쟁 상태로 돌입하는 이라크 사태이다. 여기의 무력 충돌에 큰 동기를 부여하고 있는 것은 이슬람 근본주의의 교리다. 달리 말하면, 종교 이데올로기가 무장봉기의 열정을 북돋는 것이다. 그러나 이라크에서 시아파·수니파·쿠르드인이라는 신앙적·종파적·인종적 구분은 단순히 종교와 이데올로기적 의미를 넘어 정치적·사회적 차별의 구실의 역할을 하였다. 이데올로기는 현실의 문제가 현실에서 바르게 풀리지 못할 때 큰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중동지역은 현재 세계에서 가장 분규와 갈등이 심한 지역의 하나다. 피케티는 국가의 총생산에 비해 사회적 지출의 비율이 극히 작은 지역으로 중동의 몇 나라를 들고 있다. 이러한 사정은 현실문제가 풀리지 않을 때, 이데올로기 투쟁이 격화된다는 사실을 말한다 할 수 있다(물론 서방의 여러 나라의 석유 이권의 문제가 여기에 크게 개입돼 있는 것도 사실이다. 피케티가 제안하는 불평등 문제의 해결책은 궁극적으로 소득과 자본 이득에 대한 세계적 투명화와 과세를 포함한다).

이러한 사정을 생각하면, 세계적 관점에서 어느 정도로 빈곤을 넘어서는 경제발전을 이룩한 한국은 이제 이데올로기를 극복할 수 있는 단계에 들어서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든다. 세월호 사건에서 높아진 공적 책임에 대한 요구, 고위 공직자 청문회 등에서 드러나는 투명성의 필요 등도 보다 정의로운 사회를 향해 가는 과정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보다 넓은 관점에서의 인간관계의 인간화는 그보다는 더 넓은 윤리의식의 보편화, 그를 뒷받침할 수 있는 사회구조와 물질적 기반의 재구성을 요구한다.

평화와 인간적 삶에 대한 과정적 이해는 서두에서 언급한 동아시아에서의 국제관계에도 해당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이미 있던 질서의 해체는 불안정과 불안의 원인이 된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 경제발전의 논리로 보면, 동아시아 국가들은 지금까지 이것을 이룩했거나 이룩하려고 노력하는 나라들이다. 불안이 없지 않은 채로, 국내적으로나 국가적으로나 평화와 정의를 공고히 하는 일이 다음 단계의 과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위에서 전지구적 평등화에 대한 피케티의 생각을 언급하였다. 지역 단위의 평화와 평등은 그것을 향한 하나의 예비가 된다. 물론 붙여 말해야 할 것은 이러한 낙관론은 여러 가지로 오늘날 느끼지 않을 수 없는 도덕적 낭패감에 대한 하나의 보상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다는 점이다.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 서울대에서 영문학을 공부한 뒤 미국 하버드대에서 미국문명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7년 첫 저서 『궁핍한 시대의 시인』 이후 『지상의 척도』 『심미적 이성의 탐구』 『자유와 인간적인 삶』 『기이한 생각의 바다에서』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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