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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을 구원할 수 없는 영혼 없는 경제의 민낯

중앙선데이 2014.06.28 02:17 381호 24면 지면보기
“단 한 명이라도 국민들 목숨을 구해야 되는 거 아냐?” “그건 경찰이나 군대가 알아서 할 거야. 우리 일은 사람 목숨보다 통치야. 국민들이 불안을 느끼지 않게 해야 돼.”

연극 ‘배수의 고도’ 6월 10일~7월 5일 두산아트센터 Space111

국가재난상황에 처한 언론인과 정치인의 흔한 대화다. 지난 4월 세월호 참사 때도 이런 대화가 무수히 오갔을 것이다. 참사를 지켜보며 국민이 가장 비통해했던 건 사고 자체가 아니었다. 국민의 목숨보다 정치경제적 이해관계를 먼저 따지는 정부의 대응과, 사고의 원흉인 선박 개조와 화물 적재량 초과의 배경이 된 정글 자본주의가 드러낸 대한민국의 민낯이었다. 뻔히 알면서도 애써 외면하며 살려 했던 시대의 문제들이 더 이상 회피할 수 없이 까발려진 상황이지만, 누구도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한 채 국가는 다시 ‘경제만능’을 외치고, 바쁘게 돌아가는 일상에 휘둘려 우리는 어느새 비극을 잊어가고 있다.

사실 앞의 대화는 연극 ‘배수의 고도(背水の孤島)’에 나오는 대사다. 일본의 3·11 대지진과 원전 폭발 사고 이후의 각종 문제를 다룬 이 작품은 우리보다 한발 앞서 더 큰 비극을 경험한 이들이 “비극의 경고를 결코 잊어선 안 된다”며 우리의 뒷덜미를 붙잡고 애써 비춰주는 미래의 거울이다. 매년 상반기 우리 사회에 묵직한 화두를 던지는 두산아트센터의 기획시리즈 ‘두산인문극장’의 올해 테마인 ‘불신시대’ 마지막 작품으로, 2011년 일본 초연 시 치밀한 취재에 바탕을 둔 리얼한 현실 고발로 일본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킨 작품이다. 국민 한 사람의 100년의 삶보다 임시변통된 전체의 안정을 우선하는 사회 시스템이 과연 지속 가능하며, 그 속에서 우리가 함께 살아갈 수 있는지를 묻는다.

2011년, 피해 지역의 다양한 인간군상을 소름 끼치도록 생생하게 묘사한 것이 1막이다. 지진 당시 방송국 기자로 현장을 누비며 정부, 기업과의 복잡한 이해관계 속에서 양심적 보도에 한계를 느낀 코모토는 다큐멘터리 연출부로 옮겨 9개월간 이재민들의 현실을 카메라에 담는다. 재난을 겪은 한 가족과 주변인들의 일상에서 드러난 밑바닥 인간들의 실상이란 모순덩어리다.

카타오카 일가는 매일 맨밥에 된장국으로 연명하는 형편이지만 아버지 다이고는 정부보조금으로 편히 살겠다며 굳이 일을 하지 않는다. 복구작업을 돕는 자원봉사자들은 숨어서 바비큐 파티를 벌이고, 비참한 현실만 알려야 한다며 피해자들에게 세탁기도 못쓰게 하는 코모토 일행은 그들의 면전에서 고급 도시락을 까먹는다. 지진 당시 마을 공무원 노자키에게 겁탈당한 딸 유우는 노자키에게 임신중절 비용을 대라고 종용하고, 노자키는 돈을 구하려 막노동을 하다 피폭을 당한다. 아들 타이요는 누나의 수술비용을 위해 파괴된 통조림 공장의 통조림을 주워 팔고, 빚에 쪼들리던 통조림 회사 사장은 타이요를 다그치다 자살하고 만다. 누가 피해자고 누가 가해자며, 누가 누구를 돕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지옥도다.

2막은 그로부터 12년이 지난 2023년의 상상도다. SF영화처럼 설마 저런 날이 올까 싶은 먼 미래가 아니다. 여전히 리얼하며 한층 더 절망적인 가까운 미래다. 전력부족으로 기업이 줄줄이 해외로 이전하자 실업률은 상승하고 일본 경제는 몰락 직전이다. 원전 반대를 외치며 태양광 에너지 대안을 제시하던 야당은 막상 정권을 잡자 앞장서 원전 건설을 추진하고, 비용 마련을 위한 고금리 국채발행으로 나라를 팔아먹을 판이다. 도쿄에서는 원전 반대 데모가 한창이지만 후쿠시마 기업인과 정치인은 오히려 원전 건설을 환영한다. 보조금을 받는 피폭자를 부러워하는 실업자가 즐비한 지방에선, 뒷일은 어찌됐든 당장 급한 불을 끄려면 경제가 돌아가고 주민들이 일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결국 무조건 경제를 굴리는 것이 정답일까. 이 물음은 ‘불신시대’의 전작 ‘엔론’으로 회귀한다. ‘엔론’은 한 미국 굴지 기업의 몰락을 통해 2008년 이후 세계 경제를 위기로 몰고 간 미국식 금융자본주의가 과연 지속 가능한가를 보여줬었다. 제조업이 침체되자 회계를 조작해 주가를 부풀리고 각종 파생금융상품을 발명해 실체 없는 자본으로 시스템을 돌리다 결국 거품이 터져버린 ‘엔론’이 이미 ‘배수의 고도’의 질문에 정답을 제시한 셈이다. 영혼 없이 굴러가는 경제는 결코 인간을 구할 수 없다는.

“현재 우리나라의 원전 개수는 23개이며, 추가로 5개가 건설 중입니다. 또한 건설 계획 중인 원전이 6개이고, 삼척과 영덕을 신규부지로 결정해 원전을 더 지을 계획입니다. 이로써 우리나라는 원전밀집도 세계 1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암전 후 에필로그는 ‘배수의 고도’란 남의 나라 사정이 아닌 이미 우리에게 도래한 현실임을 경고한다. ‘불신시대’의 끝자락에 이 땅에서 더 이상 희망을 말할 수 있을지, 섬뜩해지는 대목이다. 그래도 세상은 속절없이 돌아가고, 인생은 별수 없이 계속된다. 빨리 감기로 미리 본 미래의 어느 외딴섬을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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