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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이든 운명이든 롤리타는 애너벨에서 비롯됐다”

중앙선데이 2014.06.28 02:28 381호 28면 지면보기

“롤리타, 내 삶의 빛, 내 생명의 불꽃. 나의 죄, 나의, 영혼, 롤-리-타.”

로쟈의 문학을 낳은 문학 <17> 에드거 앨런 포의『애너벨 리』 vs 나보코프의 『롤리타』


러시아 태생의 망명작가 나보코프의 『롤리타』는 이렇게 시작한다. 중년의 사내 험버트와 그가 ‘님펫’이라고 부르는 소녀 롤리타의 사랑 이야기다. 님펫은 아홉 살에서 열네 살 사이의 소녀 가운데 특별한 매력을 가진 아이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자기보다 몇 배 더 나이가 많은 남자들을 매료시키는 마성을 지녔다. 험버트가 그런 마성에 사로잡히는 경험은 주관적인 것이고, 객관적으로는 미성년자에 대한 성적 학대로 보인다. 작품이 출간되자 도덕적 논란에 휩싸인 이유다.

하지만 그런 논란은 『롤리타』가 실제가 아닌 가상의 현실을 다룬 작품이라는 점에서 오해된 면도 있다. 소설은 물론 허구의 세계이지만 작가는 보통 그것이 실제 현실처럼 보이게 하려고 애쓴다. 반면 나보코프는 유사 현실의 세계를 그려내면서 동시에 그것이 고안된 세계임을 끊임없이 암시한다. 『롤리타』에서 그가 창조한 것도 ‘원더랜드’(이상한 나라)에 빗댄 ‘험버랜드’이며, 환상 속 ‘바닷가 공국’이다.

‘바닷가 공국’은 에드거 앨런 포의 시 ‘애너벨 리(Annabel Lee)’에 나오는 ‘바닷가 왕국’을 비튼 말인데, 『롤리타』의 처음 제목이 ‘바닷가 왕국’이었다는 점에서 포에 대한 참조는 확실해진다. 아니, 나보코프 자신이 이 점을 숨기지 않는다. 님펫에 대한 험버트의 환상 혹은 이상 성욕을 소재로 삼으면서 험버트에게 포를 모델로 한 문학적 전기를 부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흔 살의 나이로 불운한 생애를 마친 포에게 유일한 행복은 버지니아 클렘과의 결혼생활이었다. 1935년 스물여섯 살 때 포는 사촌이었던 클렘과 결혼하는데, 당시 그녀의 나이는 고작 열세 살이었다. 둘은 열렬히 사랑했지만 클렘은 결핵에 걸려 스물네살에 사망한다. 상심한 포가 아내를 추억하며 쓴 시가 ‘애너벨 리’이며, 포는 이 시를 쓰고 난 얼마 뒤 술에 만취해 정신착란 증세를 보이다가 세상을 떠난다.

“아주아주 오랜 옛날, / 바닷가 왕국에, / 아마 당신도 알지 모를 소녀 / 애너벨 리가 살았답니다. / 나를 사랑하고 내게 사랑받는 생각만으로 그 소녀 살았답니다.” ‘애너벨 리’의 첫 연이다.

포는 아내와의 사랑을 바닷가 왕국의 이야기로 변형시키는데, 애너벨 리는 천사들의 시샘으로 죽어 차갑게 식고 바닷가 왕국 묘지에 유폐된다. 그럼에도 둘은 한층 더 강렬히 사랑했다. “그래서 높은 하늘나라 천사들도 / 깊은 바다 아래 악마들도 / 내 영혼과 아름다운 애너벨 리 영혼을 / 결코 갈라놓을 수 없답니다.” ‘애너벨 리’는 죽음까지도 넘어서는 사랑을 노래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롤리타』에서 험버트는 포의 러브스토리, 혹은 애너벨 리의 전설을 롤리타 이야기의 모델이자 전사(前史)로 가져온다. “사실 어느 여름날, 내가 첫 번째 여자애를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롤리타는 아예 없었을지도 모른다. 어느 바닷가 공국에서였다.” 1910년생인 험버트가 1923년 열세 살의 여름에 만난 첫사랑, 혹은 그 ‘첫 번째 여자애’의 이름이 ‘애너벨 리(Annabel Leigh)’이다. 험버트와 애너벨 리는 같은 또래였고, 바닷가 휴양지에서 만난 사춘기의 이 소년소녀는 서로 사랑에 빠진다. “우리는 갑작스럽게, 서투르게, 뜨겁게, 고통스럽게, 미친 듯이 서로에게 빠져들었다. 절망적이라는 말도 덧붙여야겠다”라고 험버트는 회고한다. 그들의 사랑이 절망적이었던 건 아직 육체적 경험이 없는 미숙한 아이들이었기 때문이다. 서로 입맞춤을 해보기도 하지만 그런 접촉은 “건강하고 경험 없는 어린 육체들을 오히려 더 격앙시킬 뿐”이었다. 두 사람에겐 시간이 더 필요했지만 애너벨은 넉 달 뒤에 티푸스로 목숨을 잃는다.

소년 험버트와 포의 사랑이 모두 애너벨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지만 둘의 관계는 나이에서 차이가 난다. 포는 애너벨(아내 크렘)보다 열다섯 살이나 많았지만 험버트는 애너벨과 동갑이었다. 바닷가 왕국에서의 ‘사랑 이상의 사랑’을 재연하기에는 자격 미달이라고 해야 할까? 따라서 롤리타에 대한 험버트의 열정은 어릴 적 애너벨에 대한 열정의 재생이자 반복이면서 동시에 재시도다.

“마법 때문이든 운명 때문이든 간에 롤리타는 애너벨에서 비롯되었다”라고 험버트는 믿는데, 애너벨을 잃은 뒤 24년 만에 님펫으로서의 롤리타가 애너벨의 재현으로 그 앞에 다시 나타난다.

“그 미모사 덤불, 별무리, 전율하던 느낌, 불꽃 같은 열정, 달콤한 이슬, 통증은 내게 남아 있다. 그리고 그 이후로 내내 해변의 귀여운 팔다리와 뜨거운 혀는 나를 쫓아다녔고 마침내 24년이 지나 나는 그녀의 마력에서 벗어난다. 오직 또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 그녀에 의해서.”

님펫은 두 남녀 사이의 일정한 나이 차를 전제로 하기에 어린 시절 험버트의 애너벨은 님펫이 아니었다. ‘죽음 너머의 사랑’을 ‘님펫에 대한 사랑’으로 변형시키면서 험버트는 롤리타에 대한 사랑이 어린 시절에 대한 향수의 의미도 갖게 만들었다. 아니, 그런 의미를 숨겨놓은 건 나보코프다. 어릴 적 나보코프가 가장 좋아한 작가 중 한 명이 바로 포였으니까.



필자 이현우는 서울대 대학원(노문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대학 안팎에서 문학과 인문학을 강의하고 있으며, ‘로쟈의 저공비행’이라는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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