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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 월드컵] 심장도 머리도 없었다

중앙일보 2014.06.28 01:49 종합 8면 지면보기
축구대표팀 막내 손흥민(왼쪽)이 27일 상파울루 코린치앙스 경기장에서 열린 벨기에전을 마친 뒤 눈물을 쏟아냈다. 선배인 한국영이 손흥민의 어깨를 안고 말없이 위로하고 있다. 손흥민은 2차전 알제리전에서 1골을 터트렸지만 마지막에는 웃지 못했다. [신화=뉴시스]


브라질 월드컵은 처참한 실패로 끝났다. 조별리그 1무2패.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때와 같은 성적이다. 한국 축구가 월드컵 본선에서 1승도 얻지 못한 것도 프랑스 월드컵 이후 16년 만이다.

한국축구, 잃어버린 새벽
16강 실패, 16년 만에 월드컵 0승
정해진 틀로만 뛰어 창의성 실종
평균 2년도 안 돼서 바뀌는 감독
그나마 믿었던 투지도 사라져



 첫 경기에서 러시아와 1-1로 비기며 가능성을 보여주는 듯싶었지만 알제리와 치른 2차전에서 2-4로 완패했다. 27일 상파울루에서 열린 벨기에와의 최종전에서는 전반 44분 스테번 드푸르(26·포르투)가 퇴장당했지만 힘 한번 제대로 써보지 못했다. 그러다 후반 33분 얀 페르통언(27·토트넘)에게 역습을 당해 0-1로 무릎을 꿇었다.



벨기에전이 끝난 뒤 주장 구자철을 안고 위로하는 홍명보 감독(오른쪽). [상파울루=뉴스1]
 ◆생각 없는 로봇 축구=러시아와 비기며 16강에 진출한 바히드 할릴호지치(62) 알제리 감독은 한국 축구에 대해 “선수 개개인의 능력은 뛰어났다. 하지만 플레이가 지나치게 스테레오타입(stereotype)이었다”고 일침을 가했다. 판에 박힌 것 같다는 의미다.



 유럽 축구에서는 한국 축구를 ‘로봇’에 비유한다. 칭찬이 아니다. 융통성과 창의성 없이 기계적으로 움직여서다. 한국은 0-1로 뒤진 후반에 다득점이 필요했지만 무기력하고 단조로운 플레이를 반복했다. 과감히 공격적으로 나서야 했지만 누구도 능동적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전략도, 기술도, 투혼도 찾아볼 수 없는 ‘깡통 로봇’ 같은 축구였다.



 전술적인 다양성도 부족했다. 벨기에전에서 최전방에 박주영(29·아스널) 대신 김신욱(26·울산), 골키퍼 정성룡(29·수원) 대신 김승규를 선발 투입하며 전술 변화를 꾀했을 뿐 튀니지·가나와의 평가전부터 러시아·알제리전까지 똑같은 베스트 11과 전술로 경기에 임했다. 홍 감독의 카리스마는 강했지만 전술은 단조로웠고 그라운드에서 뛰는 선수들은 위기나 기회 때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다.



 ◆흔들리는 사령탑=대표팀은 선발 과정부터 혹독한 비판을 받았다. 23명 최종 엔트리가 지나치게 인연에 치우쳤다고 해서 ‘의리 논쟁’이 일었다. 소속팀에서 거의 출전하지 못한 박주영을 비롯해 런던 올림픽 때 멤버를 대거 발탁해서다. 박주영은 끝내 감독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도리어 그가 빠진 후 한국의 공격이 살아났다. 선발은 감독의 권한이지만 책임도 피할 수 없다. 홍 감독이 “내 잘못이 제일 크다”고 인정한 것도 이 때문이다.



 홍 감독에게도 어쩔 수 없었던 사정이 있다. 지난해 7월 월드컵 본선 진출을 확정하고 최강희(54·전북) 감독이 물러난 후 개막이 1년밖에 남지 않은 시점에 지휘봉을 잡았다. 훈련 기간이 크게 부족해 런던 올림픽 때부터 한솥밥을 먹으며 손발을 맞춰온 선수를 중심으로 팀을 꾸릴 수밖에 없었다.



 한국 대표팀 감독을 독이 든 성배라고들 한다. 월드컵 본선에 맞춰 4년 주기로 감독을 뽑은 뒤 임기를 보장해 주는 게 선진 축구의 기본 시스템이다. 한국은 너무 자주 감독을 바꾼다. 최근 한국 감독의 평균 재임 기간은 2년을 크게 밑돈다.





 홍 감독의 임기도 애매하다. 2015년 1월 아시안컵까지다. 월드컵에 맞춰 물러나거나 재계약하는 다른 나라 감독과 달리 거취도 오리무중이다. 홍 감독의 임기를 지켜주자는 주장과 차제에 유능한 외국인 감독을 모셔서 4년간 확실하게 기회를 주자는 의견이 팽팽하다. 월드컵이 끝난 직후는 좋은 감독이 시장에 많이 나와 있는 시기다. 일본축구협회는 발 빠르게 차기 외국인 감독을 고르고 있다. 홍 감독은 벨기에전을 마친 후 “책임은 나에게 있으니 어떤 게 올바른 길인지 판단하겠다”고 말해 자진 사퇴 의사를 비쳤다.



 ◆열망 사라진 선수들=체격조건이 좋아지고 유럽파가 크게 늘어나는 등 하드웨어는 향상되고 있지만 한국 축구의 상징과도 같았던 ‘투지’와 ‘승부근성’은 점차 사라지는 분위기다. 홍 감독이 ‘원 팀, 원 골, 원 스피리트’를 유난히 강조한 건 역설적으로 그게 예전에 비해 잘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월드컵 예선 기간에 불거졌던 해외파와 국내파의 갈등을 봉합하려는 노력이었다.



 월드컵 본선 과정에서도 크고 작은 잡음이 팀 안팎에서 들렸다. 27일 쿠리치바에서 만난 아브람 그랜트(59) 전 첼시 감독은 “한국 축구대표팀 부진의 근본 원인은 정신적인 부분에 있었다”며 “정신적으로 강할 땐 좋은 경기를 했지만 그렇지 못할 때는 단번에 무너졌다”고 분석했다. 그랜트 감독은 “축구는 피라미드와 같다. 아래부터 기본적인 것들을 채우지 않으면 안 된다”고 정신력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상파울루=송지훈 기자, 쿠리치바=김민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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