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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썸남썸녀

중앙일보 2014.06.28 00:06 종합 31면 지면보기
‘썸 탄다’는 말이 있다. 연인 직전의 설레는 사이란 뜻이다. 남녀 사이에 뭔가 있다는 ‘썸싱’에서 왔다. 요즘엔 ‘삼귀다’란 말도 나왔다. ‘사(4)귀기’ 직전이라 ‘삼(3)귀다’란다.



 요즘 연애 문화의 트렌드를 보여주는 ‘썸’은 대중문화 코드로도 떠올랐다. 가수 정기고와 소유가 함께 부른 ‘썸’은 올 상반기를 대표하는 히트곡이다. 후렴구 ‘내 꺼 인 듯, 내 꺼 아닌, 내 꺼 같은 너’는 유행어 반열에 올랐다. ‘썸남썸녀’라는 같은 제목의 노래도 두 곡이나 된다.



 남자들이 모여서 성과 사랑에 대해 솔직하게 얘기하는 JTBC ‘마녀사냥’은 ‘이게 과연 썸일까?’ 고민하는 시청자 사연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아예 ‘애타는 수다-썸’이란 제목의 케이블 토크쇼도 나왔다. tvN 코미디 ‘코미디 빅리그’에서는 ‘썸 앤 쌈’ 코너가 화제다. 로맨스 드라마에서 방금 튀어나온 듯한 선남선녀 커플이 썸타는 이야기에, 스스로는 썸이라고 착각하지만 사실은 상대 남자로부터 모질게 구박당하는 안 예쁜 여자를 대비시켰다.



 아마도 이런 썸 프로그램의 원조는 스타들이 가상으로 연애하는 MBC ‘우리 결혼했어요’일 것이다. 공공연하게 호감이 싹트는 과정을 보여준, 썸의 집약체다. 유사 프로의 홍수 속에 요즘엔 중년 연예인의 가상 재혼 프로까지 나왔다.



 그런데 왜 갑자기 ‘썸’일까? 개인적으로는 본격 사랑 직전의, 사랑인지 아닌지 애매한 단계가 오히려 진짜 사랑 못잖다고 생각한다. 연인이라는 관계로 공식화되기 직전의 긴장감과 자유로움, 사랑이란 감정의 게임에서 주는 만큼 마땅히 받아야 한다며 손익을 따지기 이전 단계이기 때문이다. 연애 감정의 라이프 사이클에 비춰 본다면 그저 파릇파릇한 유아기에 해당된다.



 그런데 요즘 젊은 세대의 ‘썸’은, 여기에 날로 자본주의로 포획되는 연애의 어려움이 더해지는 것 같다. 사랑은 이벤트로만 존재하고 기념일을 챙겨야 하며, 그 기록을 SNS에 올릴 때 비로소 애정이 증명·완성되는 시대의 피곤함 말이다. TV 드라마 등에 제시되는 연애의 각본을 좇아야 하는 부담도 크다.



 “연애를 시작하면 각종 이벤트를 해야 한다는 의무감, 좋은 선물을 해야 한다는 의무감, 하루에 적어도 몇 번 이상은 연락하고 서로의 근황을 체크해야 한다는 의무감. (차라리 썸 타다 깨지는 게 낫다는 건) 연애의 의무를 수행하느라 애쓰고 투자한 것들이 없으니 좀 덜 억울할 거라는 얘기 아닐까.” 페미니즘 연구자 로리주희의 말이다.



양성희 문화스포츠부문 부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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