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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아베, 한·일 간 다리 불사르다

중앙일보 2014.06.27 00:27 종합 32면 지면보기
[일러스트=강일구]


남정호
국제선임기자
아베 정권의 고노담화 검증 가운데 최악은 교묘한 역사왜곡이 아니다. 이는 착수 때부터 예견됐던 거라 그리 놀랄 것도 없다. 도리어 영겁 속에 묻어야 할 외교 기밀이 까발려졌다는 게 충격적이다. 정치적 목적을 위해 최소한의 금도(襟度)까지 넘을 줄은 몰랐다.



 유사 이래 외교상 비밀은 필요악 같은 존재다. 유럽 절대왕정 시대에는 외교상의 기밀(confidentiality) 유지는 물론이고 아예 접촉 자체를 숨기는 ‘비밀외교(secret diplomacy)’가 기본이었다. 식민지 나눠먹기를 위한 왕실 간의 비밀스러운 거래가 난무했고 밀사가 유럽 곳곳을 누볐다. 17세기 바로크 미술의 거장 루벤스는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가 임명한 밀사였다. 각국 왕실의 초대를 받아 유럽을 누비던 루벤스는 그 나라 사정을 염탐하면서 비밀 메시지를 전달하기에 딱이었다.



 이런 유럽 외교의 비밀주의가 심각한 도전을 받은 건 20세기 초다. 1917년 11월 볼셰비키 혁명으로 제정 러시아를 무너뜨린 블라디미르 레닌은 정권을 잡자마자 금기를 깨부순다. 차르 정부의 비밀 외교문서를 찾아내 만천하에 공개한 것이다. 여기엔 러시아 왕실이 영국·일본 정부와 협잡해 페르시아·중국 등을 나눠먹으려던 행각이 낱낱이 담겨 있었다.



 당시 레닌의 동지이자 외교를 담당했던 레온 트로츠키는 비밀문서를 공개하며 이렇게 천명한다.



 “비밀외교는 자신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대중을 기만하려는 소수 유산계급의 도구에 불과하다”고.



 그러나 이렇듯 호기롭게 출발한 소련 정권마저 불과 3~4년 만에 비밀외교로 돌아선다. 1920년대 초 아시아 내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 극비리에 티베트에 대표단을 파견해 달라이 라마와 접촉했던 사실이 훗날 밝혀졌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을 거쳐 냉전이 격화되면서 소련의 비밀외교는 더욱 판치게 된다.



 정의를 외치는 미국도 다를 바 없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각국 간 물밑 거래 탓에 일어났다고 믿은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전쟁이 끝날 무렵 평화정착을 위한 14개 조항을 발표한다. 이 조항의 첫째가 바로 ‘비밀외교 폐지’였다.



 그러나 미국조차 외교상 기밀 공개는 물론 비밀외교 관행도 없애지 못했다. 73년 성사된 베트남 평화협정도 미국과 북베트남 간 비밀외교의 산물이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지난해 말 이란 핵문제가 극적으로 타결된 것도 오바마 정부의 비밀외교 덕으로 드러났다. 지난해 6월 온건파인 하산 로하니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측근을 보내 오만 등에서 다섯 차례 비밀회담을 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외교에서 비밀이 필요한 이유는 뭔가. 무엇보다 지금 나누는 대화가 공개되지 않을 거란 믿음이 있어야 협상 당사자는 솔직해질 수 있다. 외교 협상을 하다 보면 자기 나라의 어려운 형편을 솔직히 토로하고 양보를 구해야 할 때가 있다. 때론 국익을 위해 거짓말도 해야 한다. 오죽하면 “대사란 조국을 위해 거짓말을 하도록 외국에 보내진 선량한 사람”이란 영국 정치가 헨리 워튼의 정의가 통용되겠는가.



 또 모든 타협이 그렇듯 외교의 기본은 주고받는 거다. 일정 부분은 양보해야 챙길 수 있다. 어떤 경우 어음을 끊어주듯 당장은 아니더라도 나중에 편의를 봐주겠다고 약속해야 할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이 워낙 복잡해지고 이해관계가 첨예해진 탓에 어떤 외교정책이든 덕 보는 사람이 있으면 손해 보는 이도 있기 마련이다. 그러니 교섭 내용과 그 과정이 낱낱이 까발려지면 국내 이익단체가 들고일어나 타협이 이뤄질 리 있겠는가.



 세상사 진실이라고 해서 모두 공개하는 게 능사가 아니다. 세상엔 무덤까지 가져가야 할 비밀도 있다. 신부에게 고백한 고해성사, 기자에게 정보를 준 취재원의 정체, 의사가 알게 된 환자의 병력, 그리고 변호사가 파악한 의뢰인의 개인정보 같은 게 대표적 사례다. 외교상 비밀도 마찬가지다.



 일본 정부가 이전 정권에서 이뤄진 외교적 비밀을 공개한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09년 정권을 잡은 하토야마 민주당 정권은 60년 미·일 안보조약 개정 당시 맺었던 핵 관련 밀약을 터트려버렸다. 유사시 미국이 핵무기를 일본에 반입하게 되더라도 이를 사전에 통보하지 않아도 된다는 게 그 핵심이었다. 갑자기 일본 정부가 밀약을 폭로하자 미국 측에서 격분한 건 물론이다.



 이번에도 아베 정권은 한국 외교부 장관의 실명까지 거론하며 고노담화 작성 당시 한국 측과 주고받은 이야기를 공개해버렸다. 이를 두고 외교부 고위 인사는 이렇게 개탄했다. “아베가 한·일 간에 놓여 있던 다리마저 불살라버렸다”고.



 이런 식으로 하면 누가 일본 정부와 외교를 하겠나. 조태용 외교부 1차관이 벳쇼 고로(別所浩郞) 일본대사를 불러 “앞으로 한국뿐 아니라 다른 나라들도 일본과 신뢰를 가지고 외교를 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분개한 것도 무리가 아니다. 이런 상황에선 매달 열리던 위안부 관련 한·일 간 국장급 회담이 한국 정부에 의해 취소된 것도 당연해 보인다. 일본 언론들마저 “일본 외교가 신뢰를 잃을 수 있다”고 개탄해 마지않았다. 이러다 아베가 사라질 때까진 일본과는 아예 상종하지 말자는 분위기가 온 나라에 퍼질까 걱정이다.



남정호 국제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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