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용직의 바둑 산책] 조남철 있었기에 … '바둑=도박' 통념 깨고 문화로 일으키다

중앙일보 2014.06.26 01:04 종합 19면 지면보기
1962년 조남철 7단이 당시 여섯 살이었던 조카 조치훈의 손을 잡고 일본행 비행기에 오르고 있다. 18년 뒤 80년 조치훈은 오다케 히데오를 꺾고 일본 최고의 타이틀 명인을 획득했다. [사진 한국기원]
“저기, 송연이 아빠가 도박의 두목이라면서요?” 1955년 봄 서울 남산 자락의 한 빨래터. 건넛집 동환이네 엄마가 최충순(88) 여사에게 참아온 말문을 열었다. 송연이는 조남철(1923~2006) 9단(당시 5단)의 둘째 아들. 조 9단이 해방 후 바둑 보급에 나선 지 10년이 지났지만 바둑 하면 도박으로 통할 만큼 사회적 인식이 낮은 시절이었다.


55년 한국기원 설립, 첫 입단대회
신문사 순례 “기전 열어달라” 읍소
첫 우리말 바둑책 『위기개론』 발표
조치훈 일 유학 주선 … 국제화 물꼬

 다음 달 2일은 조 9단이 세상을 떠난 지 8년이 되는 날이다. 한국기원은 해마다 사무총장이 바둑계 원로들을 모시고 경기도 양평에 있는 선생의 묘소를 찾아 그의 발자취를 기리고 있다. 한국기원 차원에서 기일(忌日)을 챙기는 기사는 조 선생이 유일하다.



 조 9단은 한국 현대바둑의 대명사다. 메말랐던 우리 바둑에 살을 붙이고, 피가 돌게 했다. 1941년 일본기원에서 입단한 그는 고국에 돌아온 후 바둑 보급에 일생을 걸었다.



 조 선생은 바둑에 대한 소신이 확고했다. “제도적 뒷받침이 있다면 문화는 성장한다”는 지론으로 세상을 설득했다. 전문기사 제도가 그 첫 번째 성과다.



55년 한국기원을 설립하고 입단대회를 개최했다. ‘바둑=도박’이란 통념을 깨고 ‘바둑=문화’라는 정체성을 확립했다.



 60년대 초반 한국인의 1인당 평균 소득은 100달러 남짓. 음악·미술 등 예술과 마찬가지로 바둑도 시장논리에만 맡겨서는 발전하기 어려웠다. 후원자(patron)가 필요했다. 조 선생은 정·재계와 교류하면서 설득에 나섰다. 그는 이후락(1924~2009·한국기원 초대 총재), 서정귀(1919~74·5대 한국기원 이사장) 등 정치인들과 아주토건 등 재계의 도움을 받아 68년 서울 종로구 관철동에 한국기원 회관을 완공했다. “평생 세 번 울었다”는 조 선생은 축사 도중에 마지막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조 선생이 관철동을 선택한 이유가 있다. 신문사·은행·출판사 등이 밀집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문화의 거리’ 인사동도 바로 옆이었다. 그는 “사람을 알려면 친구를 봐라. 바둑을 알려면 바둑이 무엇과 함께 있는가를 보라”고 자주 말했다.



 보급의 길은 간난신고 말 그대로였다. 1945년 해방 직후 그는 철수하는 일본인을 찾아다니면서 바둑판을 모았다. 우전(雨田) 신호열(1913~93) 선생의 추산으로 해방 당시 남한의 바둑 인구는 2000명. 그만큼 바둑판은 귀했다. 6·25전쟁이 발발한 이튿날 그는 위험을 무릅쓰고 바둑판을 수레에 실어 옮겼다. 바둑판을 구석진 곳에 숨겨두고야 서울을 떠났다. 관철동에 정착하기 전 그는 손수 손수레에 바둑판을 싣고 네 차례나 기원 자리를 옮기기도 했다. 바둑 보급엔 신문이 요긴했다. 조 9단은 신문사를 찾아다니며 기전(棋戰) 개최를 집요하게 요구했다. 그가 오면 담당자가 자리를 피할 정도였다.



 조 9단은 바둑책 출판에도 한 획을 그었다. 55년 펴낸 『위기개론』(창원사)을 평생의 자랑으로 삼았다. 그 책은 일본 책만 몇 권 있던 시절에 ‘단수’ ‘걸치다’ 등 우리말을 사용한 첫 번째 바둑책이었다. 많은 바둑 용어가 그의 손을 거쳐 탄생했다. 그럼에도 그는 ‘걸다’ ‘빵따냄’ 등이 아니라 ‘걸치다’ ‘빵때림’ 등 강한 어투를 쓴 것을 아쉬워하기도 했다.



 그에 대한 일부 비판도 있다. 그가 일본의 시스템을 도입했기에 한국 바둑이 보수적 성향을 띠게 됐다는 지적이다. 하지만 그가 한국 바둑 60년의 터를 다지고, 지붕을 올렸다는 사실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다.



 조 9단은 한국 바둑의 국제화에도 큰 족적을 남겼다. 조카 조치훈(58)이 도일(渡日)하던 62년, 조 9단은 조치훈을 기타니(木谷) 도장에 맡긴 후 후지사와 슈코(藤澤秀行·1925~2009) 명인과 대국했다. 선(先)으로 4집을 이겨 한국 바둑의 성장을 알렸다. “순장바둑을 염두에 두고 화점포석을 의도적으로 시도했다”는 그는 한국 바둑의 전통을 소중하게 여겼다. 80년 일본 최고의 타이틀 명인을 획득했던 조치훈도 현재 일본에 살지만 국적은 여전히 한국이다.



 상금에 관련된 일화도 있다. 동아일보 주최 ‘국수전’은 66년 7기 우승 상금이 5000원이었다. 주변에 우승 턱을 내고 나면 빈털터리가 되었다. 그는 항의했다. “10만원이 아니면 국수를 반납하겠소.” 조남철이 출전하지 않는 기전은 바둑팬의 외면을 받았다. 신문사 측에서 약속했다. “8·9기엔 5만원으로, 10기부터는 10만원으로 올리겠다.” 9연패 기록을 세웠던 그였지만 정작 10기에선 김인(71) 5단에게 패배해 준우승에 그쳤다. 뒷날 그가 웃었다. “그게 세상살이지.”



 이처럼 한국 바둑과 조남철은 둘이 아니었다. 일종의 동심체였다. 60~70년대에 회자된 말이 있다. “이 바둑은 조남철이 와도 못 이겨.”



문용직 객원기자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