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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5일간, 정치에 이성은 없었다

중앙일보 2014.06.25 02:07 종합 5면 지면보기
권호
정치부문 기자
박근혜 대통령이 문창극 총리 후보자를 지명한 지난 10일부터 문 후보자가 자진 사퇴한 24일까지의 15일은 한 편의 블랙코미디였다. 인사청문회의 법적 절차, 후보자의 소명권과 청문 의무는 무시된 채 단기적 여론에만 좌우되는 한국 정치의 단면이 드러났다.


[현장에서]
야당은 후보 말 들을 생각 안했고
여당은 그런 야당에 끌려다녔고
청와대는 동의안 제출 주저했다

 발단은 공영방송 KBS였다. KBS는 후보 지명 이튿날인 11일 “문 후보자가 식민지배와 남북 분단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발언했다”고 보도했다. “굽이굽이마다 시련과 도전을 받았지만 그것이 또 하나의 기회가 됐다”는 발언 등 전체 맥락은 무시한 ‘거두절미 저널리즘’의 진수였다. 곧장 “이 정도면 대국민 선전포고”(진중권 동양대 교수) 등 SNS가 들끓었고 논란은 정치권으로 전염됐다.



 야당은 ‘친일 프레임’을 씌웠다. 새정치민주연합 박영선 원내대표는 “일본 총리를 뽑는 것도 아닌데 이분에게 이렇게 에너지를 쓸 필요가 있느냐”고 했고 청문특위위원장에 내정된 같은 당 박지원 의원은 “낙마를 위해 총력 경주하겠다”고 했다. “신임 조윤선 정무수석의 첫 번째 과제는 총리 후보자 인사청문 요청서가 국회로 넘어오지 않게 하는 일”이라는 박 원내대표의 주장에서 나타나듯 야당은 문 후보자의 진의를 알아보겠다는 생각이 애초부터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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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당도 부화뇌동했다. 당 대표 경선 출마를 선언한 새누리당 김상민 의원은 12일 기자회견을 자청해 “문 후보자는 대한민국 국민이 받아들일 수 없는 역사관·민족관을 가졌다”며 사퇴를 주장했다. 일부 의원이 자진 사퇴를 주장하는 성명을 낸 데 이어 유력 당 대표 후보인 서청원 의원도 “환부를 도려내야 빨리 아물듯 빨리 조치를 취해야 한다”며 사퇴 주장 대열에 합류했다. 이즈음부터 당 지도부는 문 후보자의 거취와 관련해선 입을 닫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상태에서 청와대만 쳐다봤다.



 청와대는 주저했다. 박 대통령이 중앙아시아 순방 중이던 18일 청와대 민경욱 대변인은 “박 대통령은 총리 임명동의안과 인사청문요구서는 귀국해서 재가를 검토할 예정”이라고 했다. 그러나 21일 귀국해 사흘이 지나도록 아무런 움직임이 없다가 자진사퇴 이후 민 대변인은 “박 대통령은 인사청문회까지 가지 못해서 참 안타깝게 생각한다”고 밝혔다. 이해하기 어려운 발언이다. 청와대가 임명동의안을 국회에 보냈으면 당연히 청문회가 열렸을 것 아닌가. “대통령 말씀은 사실관계를 호도한 것”이라는 새정치연합 김한길 대표의 지적에 반박하기가 어렵다.



 문 후보자는 결국 “지금 시점에서 사퇴하는 것이 박 대통령을 도와 드리는 것이라고 판단했다”며 후보직을 내려놨다. 문 후보자의 회견 직후 새누리당 이완구 원내대표는 기자들과 만나 이렇게 말했다.



 “청문회가 영어로 히어링(hearing)이다. 후보자의 의견을 국회의원과 국민이 듣고 판단해야 한다. 법과 절차를 지키지 않은 채 듣지 않고 성급히 결론을 내려 한 점이 대단히 유감이고 착잡하다.”



 백번 천번 옳은 얘기다. 그러나 그동안 “인사청문회를 꼭 거치겠다”는 문 후보자의 목소리에 정치권은 묵묵부답이었다. 뒤늦게 여당에서 “여론몰이식 마녀사냥에 당했다”는 얘기가 나오지만 이는 책임방기에 대한 비겁한 변명처럼 들린다.



 민주주의의 핵심은 절차를 준수하는 데 있다. 총리 임명에 대한 국회 동의는 헌법에, 인사청문회는 법률에 명시된 의무이자 권리다. ‘악의적 보도→일부의 선동→야권 무차별 공세→여권 부화뇌동→후보자 자진사퇴’의 촌극이 벌어진 지난 15일간 우리 정치권에 합리와 이성은 없었다.



권호 정치부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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