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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우로 치우치면 제대로 볼 수 없는 조정래의 참모습

중앙선데이 2014.06.21 02:41 380호 17면 지면보기
1 이용덕 서울대 미대 교수가 만든 조형물 ‘소설 태백산맥과 작가 조정래’. 특유의 역상기법을 활용해 실제로는 안으로 오목하게 파여 있다.
2 조정래 작가
전남 보성군이 한국 문학기행 1번지로 떠올랐다. 그 중심에 소설가 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전 10권)이 있다. 1989년 완간 이후 지금까지 800만 부 이상 판매된 스테디셀러다.

벌교 ‘태백산맥 문학공원’ 기념조형물 12일 제막식

보성군은 소설과 관련된 스토리텔링 작업을 꾸준히 펼쳐 왔다. 염상진과 하대치 일행이 이동한 경로를 따라 ‘조정래길’을 지정했고(2005년), 1부 첫 장면에 등장하는 소화네 집 앞에는 ‘태백산맥 문학관’을, 2부 첫 장면의 배경인 율어면 해방구에는 ‘태백산맥 문학비’를 각각 건립했다(2008년). 또 소설 속 남도여관의 실제 모델인 ‘보성여관’을 문화유산국민신탁과 함께 복원했다(2012년). 이어 소설의 중심지인 벌교읍을 가로지르는 중심로 1km를 ‘태백산맥길’로 지정하고 길의 시작부에 ‘태백산맥 문학공원’을 조성했다.

그리고 지난 12일 오후 문학공원 내에 대형 기념 조형물 ‘소설 태백산맥과 작가 조정래’를 세움으로써 ‘태백산맥 문학기행 코스’에 방점을 찍었다.

3 박유아 작가가 인주로 그린 조정래 작가의 초상화
“문학은 인간에게 기여해야 한다”
『태백산맥』문학기행 기념 조형물 제막식장으로 가는 12일 오전. 서울에서 여수까지는 비행기가, 여수에서 보성까지는 대형버스가 2대 움직였다. 간단한 점심 식사 이후 일행은 모두 태백산맥 문학관으로 향했다.

건물 입구에는 조 작가의 문학관(觀)이 단정한 글씨체로 선명하게 보였다. “문학은 인간의 인간다운 삶을 위하여 인간에게 기여해야 한다-조정래.”

건물 옆에는 폭이 81m, 높이가 8m에 이르는 일랑 이종상 화백의 초대형 벽화 ‘원형상(源形像)-백두대간의 염원’(2008)이 좌중을 압도했다. “지구상 마지막 남은 분단의 아픔을 종식하고 통일을 간구하는 문학, 건축, 미술이 조화를 이뤘다”고 적혀 있었다.

제1전시실로 들어갔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뜨인 것은 가느다란 붉은 선으로 그려진 조 작가의 초상화였다. 작가는 박유아. 바로 고 박태준 전 포스코 명예회장의 둘째 딸이다. 얼마 전 6·4 지방선거에서 논란이 불거진 고승덕 전 서울시 교육감 후보의 전 부인으로서 대중들 사이에 회자됐지만, 사실은 뉴욕을 무대로 활동하는 아티스트다. 특이하게 인주를 이용해 그림을 그린다.

조 작가는 평소 박태준 회장에 대해 깊은 신뢰와 존경을 표해 왔다. 그는 한 출판사의 의뢰를 받고 근현대 인물 5인의 위인전을 출간하면서 안중근·한용운·김구·신채호에 이어 박태준 명예회장을 이들과 같은 반열에 올렸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소설 『한강』을 집필할 때 포항제철에 관해 조사하면서 큰 감동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밝힌 바 있다. 널찍한 전시장에는 작가가 어떻게 자료를 조사하고 정리했는지, 어떤 차림으로 현장을 답사했는지, 1만6500장에 달하는 육필 원고를 쌓으면 얼마만큼의 높이가 되는지, 소설 『태백산맥』의 이적성 논란은 어땠는지 등을 상세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2층으로 올라가면 작가의 집필 장소를 재현해 놓은 공간을 비롯해 작품을 손으로 따라 써보는 코너가 눈에 띄었다.

문학관 앞에는 현 부자가 기생들과 풍류를 즐기던 2층 누각이 서 있는 한옥과 현 부자의 전속 무당인 월녀와 딸 소화가 살았던 집이 있었다. 조 작가는 “빈익빈 부익부의 문제는 인간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로 어느 시대이건 있어 왔다”며 “이 소설은 바로 그 문제를 건드리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앞으로도 시대를 초월해 계속 읽힐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4 문화유산국민신탁이 위탁운영하는 ‘보성여관’ 5 보성여관 정원 6 보성여관 2층의 다다미방. 일제 강점기 때 지어진 것 중 가장 큰 축에 속한다.
7 소설『태백산맥』육필 원고
보성여관이 바꾼 태백산맥 문학거리
문학관에서 벌교버스터미널을 지나 부용교를 건너 구 벌교 금융조합 쪽으로 가다 보면 보성여관이 나온다. 소설 속 남도여관이다. 외형은 일본식이지만 내부는 한국식인 독특한 공간구조를 갖고 있다. 2층 다다미방은 전통 일본식으로 4칸으로 나뉘어 있는데, 일제 강점기에 지어진 다다미방 중에서도 가장 큰 축에 속한다.

문화유산국민신탁이 2년 여의 공사를 마치고 2010년부터 위탁 운영하고 있는데 깨끗하게 리모델링을 해놓은 덕분에 대관 및 숙박이 가능하다. 숙박은 귀빈실이 15만원, 특실이 10만원, 일반실이 8만원이다. 마당에는 65년 이상 된 단풍나무를 비롯해 석류와 목련, 자작나무가 정취를 돋웠다.

문화유산국민신탁은 2008년부터는 지역의 문화유산을 발굴하고 활용하는 ‘생생문화재’ 프로그램을 시행하고 있다. 보성여관에서는 태백산맥문학관 위승환 명예관장의 ‘태백산맥 문학특강’을 비롯해 남도 판소리의 한 갈래인 ‘보성소리’를 직접 들어보는 음악회, 보성의 특산품인 녹차를 다양하게 즐길 수 있는 ‘다도체험교실’ 등을 운용한다.

김종규 문화유산국민신탁 이사장은 “보성여관을 리모델링한 이후로 이 거리에 있는 상가 업소들이 자기들도 보성여관 느낌이 나도록 간판 등을 고치고 있는 것이 최근의 추세”라며 “태백산맥 문학거리가 대구 근대문화골목 거리 못잖은 컬처 투어의 핵심 코스로 자리하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8 조형물 제막식 모습 9 왼쪽부터 이용덕 교수, 김원 건축가, 김종규 문화유산국민신탁 이사장, 조정래 작가, 임권택 감독, 정종해 보성 군수
“고향이 저를 버리지 않아 천만다행”
오후 2시30분부터 이날의 하이라이트인 제막식이 시작됐다. 조정래 작가와 조 작가의 부인인 김초혜 시인, 조형물을 만든 이용덕 서울대 미대 교수, 행사를 주최한 정종해 보성군수와 안길섭 보성군의회 의장, 영화 ‘태백산맥’을 제작한 임권택 감독, 보성여관 복원사업을 추진한 김종규 문화유산국민신탁 이사장, 태백산맥문학관을 건축한 김원 건축가, 고영수 대한출판문화협회장과 송영석 (주)해냄출판사 대표, 표미선 한국화랑협회장, 이은주 사진작가 등 각계 인사들이 하얀색 베일에 싸인 가로 23m, 세로 3m짜리 대형 조형물 앞에 차례로 앉았다.

정종해 군수가 먼저 축사를 했다. 그는 “개관 6주년에 접어든 태백산맥 문학관은 누적관람객이 40만 명을 넘겼고, 태백산맥 문학비는 역사체험 현장으로, 또 보성여관은 옛 자취를 만끽할 수 있는 관광객들의 숙박지로 자리 잡았다”며 “이번에 세운 조형물은 태백산맥 문학공원의 새로운 랜드마크가 될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조 작가가 감사의 말씀을 전했다. “『태백산맥』으로 고발을 당했을 때는 이런 조형물이 들어설 줄 상상도 못했다. 민주화가 오고 지자체가 발전하면서 문학비와 문학관, 문학공원을 만들어 고향이 저를 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천만다행이라 생각한다. 보성군민의 이름으로 문학공원과 기념 조형물을 만들어준 정종해 군수께 감사드린다. 제작비도 못 되는 적은 돈을 가지고 제자들과 함께 고생해 준 이용덕 교수께도 깊이 감사드린다.”

이어 이 교수가 작품을 설명했다. “제 작품은 일반적인 조각과 다르다. 보통 조각은 입체적으로 양감을 표현하지만 저는 안으로 오목하게 들어가는 식이다. 어릴 적에 신발 주머니를 뒤집다가 속도 겉과 똑같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렇다면 음과 양, 플러스와 마이너스란 과연 무엇일까. 조형세계 안에서는 이것을 어떻게 미술적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고민해 왔다. 초기에는 음과 양을 섞어냈지만 독일 유학 이후 안으로 오목하게 만드는 방식만 고수해 왔다. 저는 이것을 역상(逆像) 조각이라 이름 붙였다. 세계 유일의 기법이다. 얼핏 보면 튀어나와 보이지만 가까이 가서 보면 안으로 움푹 들어가 있다. 있으면서도 없고 없으면서도 있는, 즉 유와 무가 공존하는 공간이다. 소설 『태백산맥』속의 시간과 예술가의 고뇌를 조 작가의 얼굴에 새기는 듯 표현하고자 했다.”

내빈들이 베일을 벗기자 조정래 작가의 거대한 얼굴 조각이 모습을 드러냈다. 과연 멀리서 보면 튀어나와 보이는데, 가까이 가면 안으로 들어가 있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또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몸을 옮겨 가며 보는 느낌 또한 제각각 달랐다. 조형물을 온전히 제대로 보려면 그래서 한가운데에 똑바로 서야 했다. 그것은 바로 중용(中庸)의 길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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