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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어 요리엔 묵직한 ‘렁자르드 와인’

중앙선데이 2014.06.21 02:50 380호 23면 지면보기
A씨는 나보다 나이가 네 살 위지만 10년 넘게 와인을 같이 마셔오면서 친구처럼 지내고 있다. 둘 다 싱글이기 때문에 밤늦게까지 마셔도 별 무리가 없는 ‘자유인’들이다. 그와 만나면 보통 2~3병 정도를 마시게 된다. 음식은 많이 먹지 않지만 와인은 두 병까지는 쉽게 가고 세 병째에서는 그날의 컨디션이 좌우하는 경우가 많다. 보통은 화이트로 시작해 부드러운 보르도를 거처 부르고뉴나 론 지역 와인을 마시는데, 세월이 지나면서 화이트 대신 스파클링을 한두 잔 마시고 바로 레드로 건너뛰는 경우가 태반이다. 우리는 이렇게 한 달에 한 번 정도 10년 이상을 함께 마셨다. 그동안 마신 와인의 코르크를 한자리에 모으면 한 박스는 되지 않을까. 몸에서 레드 와인 향기가 풍길 정도로 마셨으니 말이다.

김혁의 와인 야담 <16> 음식 궁합

그런데 얼마 전부터 필자는 당 수치가 많이 올라 와인을 자제하게 되었다. 이 사실을 안 친구는 “몸보신에는 내가 일가견이 있다”며 만날 때마다 영양에 신경 쓴 음식을 택하는 것이었다. 오랫동안 혼자 생활하다 보니(물론 그동안 여자는 많이 만났다) 보양식에 대해서는 해박한 지식을 갖게 되었다며.

최근에 함께 간 곳이 분당의 유명한 장어집이었다. 이 집의 가장 큰 장점은 항생제를 쓰지 않고 직접 기른 장어를 사용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참숯에서 소금만 뿌려 구워주는데, 잘게 썬 생강과 이 집만의 소스, 숙성된 백김치, 숙성된 깻잎과 함께 먹는다. 장어를 통으로 숯불에 올렸다가 적당히 구워지면 한 입 크기로 잘라주는데 겉은 파삭하고 속은 부드럽다. 맛은 담백하고 고소하며 느끼함이 전혀 없다. 보통 장어에는 복분자 술이 최고로 어울린다지만 필자는 복분자의 단맛이 싫어 대신 와인을 즐긴다.

그날 친구가 갖고 온 와인은 두 병이었는데, 둘 다 한식의 복잡한 맛과 잘 어울리는 론 지방 와인으로 폴 자불레의 지공다스와 수퍼 론 와인으로 불리는 도멘 드 라 렁자르드의 리제르바 2009년산이었다. 두 번째 와인의 입감이 더 좋아 먼저 마셨다. 묵직함과 지루하지 않은 신선함이 조화를 이루면서 목에서 기분 좋게 넘어갔다. 이 와인은 그레나슈(Grenache)를 80%, 시라(Syrah)를 20% 섞어 만든 것으로 코트 드 론 지역의 렁자르드(Renjarde) 언덕에서 생산되는 포도로 만든다. 필자는 장어 요리와 이렇게 잘 맞는 와인을 찾기 어렵다는 생각을 했다. 와인에서 스치는 담배 향과 적당히 농축된 균형된 맛이 장어의 담백함과 고소함을 해치지 않으며 서로를 다른 차원에서 보완해 주고 있었다. 말 그대로 입에 쩍쩍 달라붙었다. 그날 우리는 세 마리의 장어와 두 병의 와인을 가볍게 마시고 2차로 와인과 맥주를 더하고 헤어졌다. 더할 수 없이 즐거운 밤이었다.

누구나 와인과 음식이 하모니를 이루는 아주 기분 좋은 순간을 경험할 수 있다. 그 기억은 항상 특별한 순간으로 남아있게 된다. 그날 그렇게 또 하나의 추억이 생겼는데 효과는 엉뚱한 곳에서 발생했다. 일주일 후 필자는 병원에서 정기 혈액검사를 받았는데 의사가 말했다. “그동안 몸관리를 잘하셨나 봅니다. 모든 수치가 아주 좋아요. 혈압, 당 등등.” 필자는 차마 와인과 음식의 궁합 덕분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대신 그날 저녁 와인을 기분 좋게 마실 계획을 세웠다. 내 와인 인생에 내린 행운에 감사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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