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명화로 읽는 자본주의 이야기

중앙선데이 2014.06.21 02:59 380호 26면 지면보기
저자: 문소영 출판사: 이다미디어 가격: 1만6500원
구스타브 쿠르베의 ‘돌 깨는 사람들’은 19세기 산업 문명의 부조리한 현실을 고발한 리얼리즘 미술의 대표작이다. 그렇다면 이런 현실을 초래한 물질 문명과 자본주의는 그 즈음 발발한 근대 시민혁명과 산업혁명에서 비롯된 걸까. 아니다. 현대사회의 전유물로 알았던 독점과 담합, 악질적인 대부업은 예수가 살던 고대에도 있었다. 유럽 교회당에 걸린 중세의 그림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림 속 경제학』

『그림 속 경제학』은 주인공을 경제로 놓고 다시 쓴 서양 미술사의 스핀오프 버전이다. 경제학과 미술사를 두루 전공한 저자가 경제가 어떻게 예술과 역사를 움직이는가를 통섭적으로 분석한 글로, 2010년 2월부터 1년간 중앙SUNDAY S매거진에 연재한 내용을 보강해 책으로 엮었다.

미술사에서 작품에 등장하는 도상을 통해 당시의 정치·경제·사회상을 유추하며 작가의 세계관을 해석하는 각론은 흔하다. 이 책은 거꾸로 세계 경제사의 흐름을 치밀하게 따라가며 각 시대를 비추고 견인했던 미술의 경향들을 제시한다. 골치 아픈 경제학 원론을 흥미로운 그림을 도구 삼아 이해를 도모하는 가운데 새삼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진정 예술은 시대를 반영하고 역사를 예감하는 마법의 거울이란 사실이다.

예수의 분노의 채찍질을 그린 초기 르네상스 종교화는 이자놀음을 하는 대부업자에 대한 고대 기독교 사회의 준엄한 경고와 조롱의 시선을 증언한다. 그러나 돈을 세는 대부업자 곁에서 성경을 펼치고 있는 아내를 그린 16세기 회화는 금융업이 더 이상 기독교 교리와 상충되지 않고 공존할 수 있다는 복합적 시각을 제시하며 근현대 경제학의 탄생을 알린다.

대항해시대 식민지를 놓고 충돌했던 유럽 각국의 전쟁 비용이 고스란히 농민의 세금 부담으로 이어지자 18세기 프랑스에서는 시민혁명 이전에 계몽주의가 떠올랐다. 계몽주의 학자들이 농민을 위한 세제 개혁을 시도했지만 귀족들의 반발은 결국 프랑스 혁명을 부른다.

계몽주의자이자 최초의 미술비평가 디드로가 당시 서민의 일상을 진실되게 묘사한 그림을 그린 샤르댕을 칭송하고 귀족들에게 유희적 환상을 제공한 부셰의 그림을 비판했던 것은 역사의 흐름을 읽은 날카로운 시선이었다. 로코코풍 회화 속 목가를 즐기던 마리 앙트와네트는 곧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질 운명이었으니까.

19세기 산업혁명 이후 미술과 자본주의는 미묘하고도 끈끈하게 얽혀 간다. 산업혁명의 수혜를 입고 미술사에서 혁명을 이룩한 인상파 화가들은 아카데미 화가들의 진부한 그림을 선호하는 부르주아지를 비웃었지만 그들 역시 또 다른 부르주아지 계급에 의해 성장했다. 앵그르와 같은 신고전주의 초상화의 유행은 스스로 엘리트 취향의 고대 그리스 조각처럼 보이기 원했던 부르주아지 계층의 복합적 면모를 보여준다. 진보적 혁명주체였던 부르주아지가 노동자를 억누르는 반혁명적 기득권층이 되어감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20세기 초 자본주의가 위기를 맞자 자본과 미술의 관계는 더욱 복잡해졌다. 월스트리트가 최대 호황을 누리던 1928년 벽화 ‘월스트리트 연회’에서 록펠러·포드 등 경제계 거물들을 조롱하며 곧 도래할 대공황을 예견했던 공산주의자 디에고 리베라가 막상 불황이 닥치자 자신이 풍자한 자본가의 주문을 받고 마르크스가 비판했던 노동 분업의 현장을 찬양하는 모순을 몸소 실천한 것이다.

그럼 21세기는 어떨까. 유사이래 늘 인간은 자본을 쫓고, 미술은 자본을 비웃어 왔다. 그런데 자본주의가 절정에 달한 지금, 미술은 곧 자본이 되어 버렸다. 훗날 이 시대의 경제를 대변할 미술이 과연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진다.

선데이 배너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