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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화 정신 훼손됐지만 아베 정권의 계승 의사는 활용해야

중앙선데이 2014.06.21 23:40 380호 3면 지면보기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이 모여 사는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의 ‘나눔의 집’. 건물 앞에 돌아가신 분들의 흉상이 나란히 세워져 있다. 조용철 기자
가뜩이나 삐걱거리던 한·일 관계가 또 한번 크게 휘청거리게 됐다. 일본 정부가 고노(河野) 담화의 근간을 뿌리째 뒤흔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가토 가쓰노부(加藤勝信) 일본 관방부장관은 지난 20일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일·한 간 협의 경위’라는 보고서를 공개했다. 이 보고서는 고노 담화가 한·일 정부 간의 집중적이고 구체적인 문안 조정을 통해 만들어진 정치적 타협의 산물임을 강조했다. 여기엔 일본이 21년 전 스스로 발표한 고노 담화의 진정성을 깎아내리겠다는 저의가 깔려 있다.

[전문가 좌담] 일본 ‘고노 담화’ 왜곡 뒤 한·일관계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을 인정한 고노 담화는 일본의 식민지배를 사죄한 무라야마(村山) 담화와 함께 한·일 관계의 기본 토대로 인식돼 왔다. 고노 담화의 정신이 원천부터 훼손되면서 가깝고도 먼 한·일 관계는 다시 ‘시계 제로’로 접어들게 됐다. 진창수 세종연구소 일본연구센터장과 정재정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전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를 21일 만나 고노 담화와 한·일 관계의 앞날을 전망해봤다.

-한국에 억지로 떠밀려 담화를 발표하게 됐다는 인상을 주려는 속셈으로 보인다.
▶진창수 일본연구센터장=일본 야당이 국회에서 담화의 정당성에 대해 따져 묻고, 아베 신조 총리가 이에 동조하면서 재검증이 이뤄졌다. 한국으로부터 위안부 관련 담화에 대한 강한 요구가 있었고, 역사적 사실에 반하는 형태로 담화가 만들어졌다는 일본 우익의 주장이 반영된 것이다. 담화에 담긴 내용과 아시아여성기금 설치 등 후속 조치가 일본의 선의에 의해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정부가 국내 반발 때문에 이를 뒤엎었다는 책임 떠넘기기 의도가 있다고 본다.
▶정재정 서울시립대 교수=재검증을 강력히 요구했던 일본 내 우익 세력의 압력에 굴복한 결과로 보인다. 아베 총리는 위안부 동원에 강제성이 없었다는 소신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강제성을 부정했다가는 국제사회의 반발이 커질 테니 고노 담화의 껍데기는 놔두고 내용을 형해화해 물타기하려는 속셈으로 보인다.

정재정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
-담화 전체를 부인하기 위한 수순인가.
▶진=검증 결과가 의도했던 것보다 훨씬 순화된 표현으로 보고됐고, 강제동원 사실을 인정하는 형태로 나왔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담화를 부인하기 위한 수순으로 보기는 어렵다. 의도는 나빴는지 몰라도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일본이 담화를 계승하겠다고 한 부분을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다.
▶정=고노 담화는 이미 한·일뿐 아니라 중국·동남아 등 국제사회에도 널리 인식된 공공재 비슷한 성격을 띠고 있다. 일본의 전쟁 책임, 식민지 지배 책임을 인정하는 문서가 돼버렸다. 그걸 허물게 되면 관련국과의 관계 그 자체를 부정하는 위험성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담화를 폐기하지는 못할 것이다. 다만 흠집내기 같은 것은 하면서 가지 않을까 싶다. 일본 내에서도 위안부 강제동원이 허구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그들을 달래기 위한 국내용으로 활용할 것으로 보인다.

-전문가들의 연구와 평가를 통해 우회적으로 ‘역사 뒤집기’로 이어질 수 있나.
▶진=아베는 뒤집을 의도를 분명히 가지고 있다고 본다. 하지만 일본 내에서도 논란이 많아 그의 의도대로 되지는 않을 것이다. 위안부 논의에는 자료 발굴 문제가 시급하다. 중국 등에서 최근 자료가 많이 나와 역사가 사실을 밝혀줄 가능성은 커지고 있다.
▶정=오히려 그런 점은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역사연구자가 아베 정부의 입맛에 있는 사람만 있는 게 아니다. 위안부 관련해서는 강제성을 확인한 연구자가 더 많다. 사죄와 보상을 요구하는 쪽이 훨씬 활성화돼 있다. 연구자들에게 맡겨 사실을 밝히고 연구·평가해보자는 것에 대해서는 찬성한다. 물론 연구자에는 한국 쪽도 포함돼야 할 것이다. 국경을 넘는 연대가 얼마든지 가능하다.

진창수 세종연구소 일본연구센터장
-재검증이 일본 전후체제 탈피 시도의 일환으로 보이는데.
▶진=아베 총리가 원하는 것은 1951년 샌프란시스코 체제에서 만들어진 전후 일본 질서에서 탈각하겠다는 것이다. 집단적 자위권 해석 변경을 하겠다는 것이 대표적이다. 역사 문제에서도 일본이 전쟁에서 패전했을 뿐이지 전쟁 이전의 행동이 잘못된 것은 아니라고 강조하고 싶은 거다. 고노 담화를 인정할 수 없다는 인식은 그 선상에 서 있다고 봐야 한다. 집단적 자위권 해석 변경은 미국의 안보 부담을 덜어준다는 측면이 있기 때문에 미국이 지지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역사 문제에서 미국은 그렇지 않다. 미국은 아베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한 것에 대해 실망했다고 비판했다.
▶정=아베 총리는 ‘아름답고 강한 일본 건설’을 캐치프레이즈로 내걸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본의 기를 살려줘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애국심에 충만한 국민을 양성하려 했다. 아베 1기 내각이 출범했을 때 제일 먼저 한 것이 전후 50년간 지켜왔던 교육기본법을 개정한 것이다. 그 핵심이 애국심 교육이었다. 자라나는 세대에 일본에 대한 자랑이나 긍지를 심어주는 국민을 만들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하려면 침략전쟁을 부정해야 했다. 일본은 잘못한 게 없으며 과거에도 유례없는 강국이었다는 것을 강조해야 했다. 그래서 자학사관에서 탈피한다는 것을 내세워야 했다. 역사를 자꾸 언급하게 되고, 그러다 보니까 위안부 강제동원 사례도 없고, 침략전쟁도 한 적이 없다고 발언했다. 하지만 역풍이 심하니까 일단 후퇴했다. 이런 일들이 앞으로도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되풀이될 가능성은 있다.

-한·일 외교의 신뢰관계가 무너졌다.
▶진=결과적으로 진흙탕 싸움을 만든 것이다. 일본이 외교적 교섭 과정 전부를 공개했기 때문에 신뢰에 큰 훼손이 간 것이 사실이다. 앞으로 한·일 외교 관계에 걸림돌로 작용할 수 있다. 이제는 ‘코드 오브 컨덕트(행동 양식)’에 따라 어느 정도는 규칙을 정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서로 해야 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은 어느 정도는 정해놓고 지켜야 한다. 이런 일이 재발돼서는 안 된다는 전제하에서 한·일 교섭은 계속 진행돼야 한다.
▶정=이번의 경우 검증 결과의 내용도 문제지만 형식 자체에서도 외교관계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한·일처럼 역사가 오래된 관계에서는 내밀한 비밀 내용이 많다. 앞으로 양국의 외교가 과연 얼마만큼 솔직하게 이루어질 수 있을지 불안하다. 그렇다고 현실적으로 한·일 관계를 방치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동아시아 정세라든지 이런 것들을 보면 두 나라가 서로 협력하는 것이 우리 국익에도 맞다.

-우리 정부의 구체적이면서도 실질적인 맞대응이 필요할 것 같다.
▶진=외교전쟁은 안 되지만 사실이 아닌 것은 명확히 지적할 필요가 있다.
▶정=이번 기회에 한국 정부도 진실을 규명해 적절한 시기에 밝혀야 한다. 그동안의 연구 성과를 모아 종합 정리하고 입장을 명확히 해야 한다.

-한국 해군의 독도 인근 동해상 사격 훈련에도 시비를 걸고 나왔다.
▶진=민감해진 일본이 문제를 제기하는 것으로 볼 수 있지만 우리도 예민하게 반응하면 일본이 의도하는 대로 갈 가능성이 크다. 원칙적인 대응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서로의 국익을 위해 행동을 자제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한다. 소모적인 갈등을 일으킬 필요는 없다.
▶정=군사 문제는 그다지 심각한 건 아니라고 본다.

-날로 악화되고 있는 한·일 관계를 타개할 수 있는 방안은.
▶진=일단 서로의 이야기를 소통하는 게 필요하다. 허심탄회한 보편적 논리로 소통해야 한다. 지금은 자국의 국익이나 국내정치에 사로잡혀 보편적인 소통을 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면 적대적 감정만 일어난다. 민간과 정부가 함께 소통하는 전략대화가 필요하다. 한·일 관계는 국내정치화돼 있기 때문에 상대방 국민에 대해서도 설득하고 이해를 넓히는 준비작업이 필요하다.
▶정=극약처방이 필요할 때가 왔다고 본다. 한·일 관계는 지금 최악이다. 여론조사에 따르면 80% 이상이 서로를 불신하거나 혐오한다. 그러면서도 80% 이상이 관계가 개선되기를 바라고, 서로 교류와 협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마디로 정상화되기를 바란다는 뜻이다. 이를 양국 정상들이 깨달아야 한다. 정상끼리 만나 허심탄회하게 끝장토론을 하는 등의 노력이 필요하다. 리더십이 필요한 때다. 만나서 풀면 여론은 지지할 것이다. 독일과 프랑스·폴란드가 전후 역사 갈등을 극복한 데는 국민보다는 지도자들의 결단이 더 크게 작용했다. 이들은 전략적으로 화해할 수밖에 없었다. 지도자의 결단과 행동이 필요하다. 그래야 실무자들이 움직인다. 역사 문제를 극복하면서 세계를 향해 두 나라가 메시지를 전파해야 한다. 한·일 이니셔티브를 우리가 먼저 시작해야 한다.

-중국도 검증에 반발하고 있다. 특히 시진핑 국가주석의 방한을 계기로 한·중 역사동맹이 더욱 강화될 수도 있다.
▶진=역사 문제에서 중국과의 공조는 신중해야 한다. 한·중이 연합해 일본 고립화 전략에 나서는 것은 미국과의 관계에도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 한쪽에 기울면 안 된다. 우리 목소리가 줄어들 수 있다. 균형 이미지가 필요하다.
▶정=가치관과 이념이 다른 한·중의 역사 공조가 반드시 이해관계에 일치하는 것도 아니다. 전선을 만들 필요는 없다.



정리=박종화 인턴 기자



고노 담화 1993년 8월 4일 고노 요헤이(河野洋平) 일본 관방장관이 일본군의 위안부 강제 동원을 최초로 인정하고 사과한 담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위안소는 일본군 당국의 요청으로 설치됐고 군이 위안소 설치 관리와 위안부 이송에 관여했다고 시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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