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고산이 우르르~’ 고향마을서 "우리도 대륙이다" 외치고 싶어

중앙일보 2014.06.21 01:03 종합 16면 지면보기
윤후정 이화여대 명예총장은 국내 여성운동의 멘토다. 남과 여를 구분하지 않는, 자유와 평등이 공존하는 세상을 21세기의 비전으로 제시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팔순을 넘은 노학자는 흐트러짐이 없었다. 몸가짐은 반듯했고, 목소리는 골랐다. 때론 시원한 웃음도 터뜨렸다. 그에게 남은 소망을 하나 물었다.

[박정호의 사람 풍경] 윤후정 이화여대 명예총장



 “고향에 높은 산이 있어요. 통일이 되면 그곳에 올라 두 팔을 벌리고 세계를 향해 외치고 싶습니다. ‘우리도 대륙이다’라고요.”



 노학자의 고향은 함경남도 안변군 신고산이다. 신고산? 생소하다. 하지만 ‘신고산이 우르르르 함흥 차 떠나는 소리’로 시작하는 민요 ‘신고산 타령’은 귀에 익을 것이다. 일제 강점기 경원선 역(驛)이 들어서면서 기존의 고산 마을은 구(舊)고산이 됐고, 역 부근 마을이 신고산이 됐다.



 “바람이 많이 불어 풍고산이라고도 했어요. 월남 이후 한 번도 간 적이 없지만 마을 정경이 다 기억납니다. 벌차게(서북 방언으로 힘이 세다, 활발하다) 놀고, 벌차게 공부했어요. 강가에서 미역을 감고, 산에서 산딸기를 따 먹고…. 왜 ‘우르르르’ 했는지 아세요. 신고산에서 서울 가는 쪽에 삼방이라고 고산지대가 있는데, 어떤 기차든 이곳을 통과하려면 신고산에 멈춰서 (증기엔진을 돌릴) 급수를 받아야 했거든요.”



 노학자의 얼굴에 순간 그리움이 맺혔다. 주인공은 윤후정(82) 이화여대 명예총장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헌법학자이자 여성운동가로 이름을 알려왔다. 1990~96년 이화여대 총장을 지냈다. 그가 이제 통일운동의 초석(礎石)이 되기를 희망하고 있다. 사재 10억원을 이화여대 통일학연구원(원장 조동호)에 내놓고 ‘윤후정 통일포럼’을 매년 열기로 했다.



 그 첫 행사가 25일 오후 이화여대 ECC 이삼봉홀에서 진행된다. 이홍구 전 총리, 윤병세 외교부 장관, 김영희 중앙일보 대기자, 정세현 원광대 총장, 장달중 서울대 명예교수, 송민순 전 외교통상부 장관 등이 참여한다.



 - 통일포럼, 갑작스러운 느낌입니다.



 “오래전부터 품어왔던 일입니다. 분단된 나라가 늘 가슴 아프고 서러웠습니다. 일제시대에 태어난 슬픔도 있고요. 왜 우리 세대는 학교에서 한국말을 쓰지 못했잖아요. 일본말을 ‘고쿠고조요(國語常用)’해야 한다고 교육받았고요. 태극기 한 번 달지 못했었지요.”



 - 그러면 왜 지금 시작하시죠.



 “제가 한 번에 두 가지 일을 못해요. 여태까지는 공부하고, 학생들 가르치고, 여성운동에 전념해왔죠. 3년 전 이화학당 이사장에서 물러나고, 그간 마음 한구석에 남겨 두었던 일을 하게 된 거죠,”



 - 10억원이면 제법 큰돈입니다.



 “조교생활부터 따지면 55년부터 이화여대에 있었습니다. 그간 봉급으로, 강사료로 받은 걸 돌려주는 것일 뿐입니다. 기부라기보다 헌납이라고 보면 되겠네요. 통일운동을 지속적으로 할 수 있는 게 무엇일까 찾다가 포럼을 생각하게 됐습니다.”



 - 전 재산을 내놓으신 건가요.



 “제가 언제 죽을지도 모르고, 살아 있는 동안 먹고살 돈은 조금 남겨 둬야 하지 않을까요.”(웃음)



 - 특별한 계기라도 있습니까.



 “분단 70년이 가까워옵니다. 이런 상황이 오래 갈수록 우리 문화도 양분될 겁니다. 여성문제도 분단과 떼려야 뗄 수 없고요. 국력의 반이 사장되는 꼴이죠. 6·25보다 더 큰 비극이 올 수 있습니다. 통일문제를 좀 더 강력하고, 비중 있게 추진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 통일은 지난한 과정입니다.



 “물론이죠. 방법도 여러 가지일 테고요. 무엇보다 그간 단절됐던 접촉과 교류가 활발해져야 합니다. 정치논리만 앞세우면 문제가 더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여성들도 할 일이 많다고 봅니다. 예를 들어 올 3월 말 중국 선양(瀋陽)에서 남북 여성인이 만나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토론회를 열었습니다. 문화든, 교육이든, 체육이든 더 자주 만나고 대화해야 합니다.”



 윤 총장은 타고난 ‘똑순이’다. 일제시대 소학교(초등학교) 시절에도 ‘나라를 위해, 여성을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봉사하겠다고 마음먹었다고 한다. 해방 직후 농사짓는 부모님을 북녘 고향에 두고 만 열네 살에 홀로 남한으로 내려온 ‘용감한’ 아이였다. 6·25 부산 피란 시절에도 책을 놓지 않았고, 이후 미국 유학도 특유의 열정과 집념으로 마쳤다. 58년 이화여대 교편을 잡은 이후 줄곧 남녀차별 폐지 등 여성운동의 최전선에서 활동해왔다. 우리 어머니·할머니 세대가 그렇듯 그의 여든 평생은 대한민국 현대사의 압축파일로 다가온다.



 - 초등학교 때 여성을, 나아가 나라를 생각했다니 꽤나 조숙했던 모양입니다.



 “시대가 그랬어요. 부모님 모두 하루 종일 농사일을 하시다가 저녁에 귀가하시면 아버지만 쉬시고, 어머니는 ‘아이고 다리야’ 하면서도 집안일을 놓지 못하셨죠. ‘(여자가) 그렇게 살 거면 결혼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었죠. ‘일본 제국주의를 막지 못해 나라를 빼앗겼다’는 아버님 말씀에 힘없는 나라의 설움도 알게 됐고요. 그 자세한 사정은 나중에 크면서 깨달았지만요.”



 - 46년 말에 홀로 월남하셨죠.



 “북한에서 국가특별장학생으로 선발됐어요. 김일성대를 거쳐 모스크바 유학까지 보내준다고 했습니다. 일종의 지도자 양성 코스였죠. 그런데 제가 기독교 모태신앙이거든요. 공산주의는 하나님을 부정하잖아요. 지옥불에 떨어져 영원한 고통을 받게 될까 두려웠습니다. 48~49년께 부모님도 내려오셨고요.”



 - 국내 첫 여성 헌법학자로 꼽힙니다.



 “부산 피란 시절 대입을 앞두고 당시 이화여고 강사로 오셨던 강원룡(1917~2006) 목사께 ‘나라를 위해 일하고 싶다’고 했더니 ‘법학을 전공하라’고 권하셨습니다. 또 이화여대 법대 시절 사법고시에 합격해 정치인이 되고 싶은 꿈이 있었는데 당시 학무과정이셨던 김옥길(1921~90·제8대 이화여대 총장) 선생이 ‘넌 학교에 남아야 해’라고 하셔서 지금까지 오게 됐습니다. 아마 정치인이 됐다면 지금쯤 만신창이가 됐겠죠.”



 - 한국 여성학의 개척자로 평가됩니다.



 “인간의 평등권을 기초로 여성문제를 바라보았습니다. 50년대부터 어른들과 함께 가족법 개정운동에 동참했어요. 가부장적 미풍양속을 해친다고 ‘삼태기에 담아 태평양에 던져버리겠다’라는 험담마저 들은 적이 있죠. 80년 제8차 개헌 때 헌법 36조 1항, 즉 ‘혼인과 가정생활에서의 개인 존엄성 보장과 양성 평등’ 조항을 명문화하는 데 기여한 게 가장 큰 보람으로 기억됩니다. 이 조항을 근거로 2005년 호주제가 헌법재판소에서 ‘헌법불일치’ 판결을 받게 됩니다.”



 - 분위기 정리입니다. 어릴 적 이름 순덕(順德)을 왜 76년에 후정(厚淨)으로 바꾸셨나요.



 “참, 별것 다 묻네요, 쑥스럽게. 어려서 워낙 순해 순덕이, 순덕이 하고 불렀대요. 그런데 서울역에 가도, 시장에 가도 순덕이가 있잖아요. 아버지가 개명해주기로 약속했는데 결국 지키지 못하셨어요. 평소 옥편 찾는 게 취미라 돈후순박(敦厚淳朴)과 청정결백(淸淨潔白)에서 두 글자를 따왔죠. 그런데 잘못 지은 것 같아요. 처음에는 학자 분위기가 좋았는데 요즘 보니 문자 냄새가 지나치잖아요. 하하하.”



글=박정호 문화·스포츠·섹션 에디터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내 인생의 어른, 이태영 변호사



“500년 묵은 인간차별의 벽이 무너졌습니다. (그러나) 여성이 새로운 것을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만 ‘제자리’를 찾았을 따름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났기에 사람 노릇 하게 되었을 뿐입니다.”



 올해 탄생 100년을 맞은 여권운동가 이태영(1914~98) 선생이 1989년 제3차 가정법 개정 직후 한 말이다. 이 법률에 따라 여성도 호주가 될 수 있는 길이 처음 열렸다. 이혼 여성의 재산분할청구권도 인정받게 됐다. 한국 여성운동의 또 다른 분수령으로 평가된다.



 윤후정 이화여대 명예총장은 이태영 선생을 ‘내 인생의 인연 1호’로 꼽았다. 두 명 모두 법학을 전공하고, 여성운동을 함께해왔다는 공통분모가 있다. 이 선생은 대한민국 첫 여성변호사이자 인권운동가로 유명하다. 56년 여성법률상담소(현재 한국가정법률상담소)를 설립, 여성들을 위한 무료 법률상담 사업을 펼쳐왔다.



 윤 총장은 이 선생을 ‘그 어른’이라고 불렀다. “제가 대학을 나오고 대학원에 다니던 50년대 중반부터 그 어른을 따라다니며 가족법 개정운동에 참여했습니다. 그분은 어려서부터 ‘무엇을 하겠다’는 뜻이 분명하셨어요. 무엇보다 실천하는 지식인이셨습니다.”



 윤 총장은 80년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재판 당시를 기억했다.



 “많은 변호사들이 두렵다는 이유로 변론을 하려고 하지 않을 때 오직 그분만이 혼자 변론을 맡았습니다. 대단한 여성이셨죠.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서 물러서지 않는 용기를 보여주셨습니다. 힘없고 돈 없는 여성들을 위해 평생 무료변론을 하셨던 것도 그렇고요. 여성 변호사로서, 야당 정치인(고 정일형 박사)의 아내로서 얼마든지 편하게 살고, 출세도 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죠.”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