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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전 화재를 방화로 몬 미국 사법부 "딸 안 죽였다" 25년 외침 이제야

중앙일보 2014.06.21 00:53 종합 20면 지면보기
1989년 체포 당시 이한탁씨와 화재로 사망한 딸 지연씨(오른쪽). 이씨는 딸 살해 혐의로 25년째 수감 중이다. 당시 수사 문제점이 드러나면서 무죄 석방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난 딸을 죽이지 않았다.”

억울한 옥살이 재미동포 이한탁씨



25년 동안의 한 맺힌 절규였다. 1989년 7월 29일 펜실베이니아주 먼로카운티 스트라우드 타운십에 있는 헤브론 수양관에서 발생한 화재로 딸을 잃었던 재미동포 이한탁(80)씨. 하지만 그는 오히려 그 불을 지른 방화 살해범으로 몰려 91년 가석방 없는 종신형을 선고받고 지금도 펜실베이니아 주립교도소에 수감돼 있다. 이씨는 수사와 재판 초기부터 수없이 결백을 외쳤지만 주 법원은 매번 그의 항소를 기각했다.



‘법’과의 외로운 싸움



이씨의 옥살이는 ‘법’과의 싸움이었다. 영어도 제대로 못했던 그가 의지할 수 있는 건 오직 변호사였지만 이씨의 사건을 처음 맡았던 미국인 변호사는 누전 등 사고에 의한 화재이라는 변론 대신 “이씨가 불을 지른 것이 아니라 우울증을 앓고 있던 그의 딸이 자살하기 위해 화재를 일으킨 것”이라고 주장했다. 사고가 아니라 누군가 불을 지른 사건으로 몰고 간 것이다.



더구나 누전 등 사고에 의한 가능성이 크다는 화재 전문가들의 현장 조사 보고서도 있었지만 이 변호사는 “검찰의 증거를 번복하기엔 너무 막연하다”는 애매모호한 논리로 재판 과정에서 증거와 증인으로 채택하지 않았다. 결국 “우울증을 앓던 딸과의 관계가 좋지 않았던 이씨가 살해를 위해 건물에 휘발유를 뿌려 불을 질렀고, 그의 셔츠와 바지에 묻어 있는 발화성 물질이 그 증거”라고 주장한 검찰의 논리를 배심원단이 받아들여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씨는 이렇게 사건 초기부터 재판까지 정당한 법의 보호를 받지 못했다. 이씨 석방을 위해 동포들을 중심으로 결성됐던 구명위원회마저 “처음부터 단추가 잘못 채워진 채 진행됐다”며 “미국 법률제도를 너무 몰랐던 것이 재판에서 패한 가장 큰 원인”이라고 자책했다.



손경탁 구명위원장은 “방화가 아닌 누전이라는 전문가 보고서가 나오자 당시 변호사가 수임료 1만 달러를 더 요구했다”며 “그동안 이씨의 딸이 자살하려고 불을 질렀다는 쪽으로 몰고 갔던 입장을 바꾸기가 껄끄러웠던 것 같다”고 말했다.



산산이 부서진 아메리칸드림



철도고등학교와 연세대 전기공학과를 졸업한 이씨는 용산공업고 교사를 지내다 78년 뉴욕으로 이민 갔다. 미국에 먼저 온 뒤 아내와 두 딸을 초청한 그는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 맨해튼에서 옷가게를 운영하며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살았다. 조금만 더 열심히 살면 ‘아메리칸드림’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큰딸 지연(당시 20세)씨가 우울증을 앓고 있었고 딸의 건강상태를 호전시키기 위해 수양관에 갔는데, 그 길이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고 말았다.



이씨는 2006년 본지의 교도소 면회 인터뷰에서 “정의는 이긴다. 난 죄가 없다”며 “내가 왜 우리 지연이를 죽이겠나. 난 분명히 풀려난다”고 말했었다. 이씨는 교도소에서 복역하며 간수들의 보이지 않는 차별과 재소자들의 농간을 이겨내야 했다. 하지만 그에겐 그토록 사랑하는 딸 지연이를 죽였다는 누명이 무엇보다 괴로운 형벌이었다.



그의 가정도 이씨만큼이나 힘든 길을 걸어야 했다. 이씨의 아내 이정선씨는 현재 암 투병 중이다. 뉴저지주 포트리에서 홀로 살며 병마와 싸우고 있는 이씨의 아내는 현재 언론의 인터뷰 요청을 모두 거부하고 있다. 그녀는 2006년 본지와의 짧은 전화통화에서 “판사와 검사·변호사 모두 편견을 갖고 남편 사건을 처리했다”며 “남편의 무죄를 확신한다”고 밝힌 바 있다. 현재 뉴욕 롱아일랜드에 살고 있는 이씨의 여동생 이한경씨는 “오빠의 일로 집안 식구 모두 한을 안고 살아왔다”며 애통해했다.



되살아난 ‘희망’



2012년 서광이 비치기 시작했다. 새롭게 사건을 맡은 피터 골드버거 변호사가 연방 항소법원에 제기한 항소가 받아들여진 것이다. 골드버거 변호사는 화재 감식 전문가 존 렌티니 박사의 보고서를 증거로 제출했다. 렌티니 박사는 “이씨의 유죄 판결에 결정적 역할을 했던 옷에 묻은 발화물질이 모두 다르다”며 “검찰 측 보고서 내용을 신뢰할 수 없다”고 주장해 왔다. 항소법원은 이를 증거로 채택한 뒤 하급법원에 ‘증거 심리’를 명령했다. 첫 재판에서 적용된 증거의 유효 여부를 재확인하라는 의미다.



지난달 29일 펜실베이니아주 중부지법에서 열린 ‘증거 심리’에서 검찰은 자신들의 증거가 과학적이지 못했다고 시인했다. 증거 심리를 주재했던 연방 지방법원 예심 판사는 13일 이씨 석방을 요청하는 권고문을 본심 판사에게 전달했다. 이로써 이씨는 이변이 없는 한 올해 안으로 석방될 것으로 보인다. 변호인단은 만약 검찰이 항소할 경우 이씨를 보석으로 일단 석방시킨다는 계획이다.



93년부터 이씨의 무죄를 주장해 온 렌티니 박사는 본지 인터뷰에서 “이씨 사건처럼 졸속으로 진행된 재판은 처음”이라며 “당시 사건을 맡았던 수사관들은 사건의 본질도 이해하지 못한 상황에서 초동 수사를 진행했다. 정의가 무시된 재판 중 가장 악의적인 사례”라고 지적했다.



뉴욕중앙일보=신동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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