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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드라마 속 '로피아'의 세계

중앙일보 2014.06.21 00:52 종합 20면 지면보기
‘개과천선’의 주인공 김석주 변호사(김명민 분)가 법정에서 증인을 신문하고 있다(위). ‘골든크로스’의 주인공 강도윤 변호사(김강우 분)와 악의 근원으로 나오는 서동하 금융정책국장(정보석 분, 아래).
“이 사진 한 장이면 해외계좌 문제는 바로 묻혀버릴 거요.”


혼외 자식, CP 사기, 은행 헐값 매각
실제 사건 데자뷰 … 현실보다 더 생생

 고급 일식집에 도착한 차영우 법률사무소(차영우펌) 대표 차영우 변호사와 파트너인 강은찬 변호사. 이들을 맞이한 성화그룹 박 회장은 사진 몇 장을 건넸다. 사진 속에는 법무부 장관 자리를 놓고 강 변호사와 경쟁 중이던 다른 변호사와 그의 혼외자의 다정한 모습이 담겨 있었다. 강간 혐의로 수사를 받고 있는 자기 아들 사건을 차영우펌이 맡아주는 조건으로 박 회장이 준비한 선물이었다. 차 대표가 사건을 수임하겠다고 하자 박 회장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그럼 이 사진을 청와대로 보내겠다”고 말한다.



 묘한 데자뷰가 느껴지는 이 장면은 실제가 아니다. MBC 수목드라마 ‘개과천선’에 나오는 한 장면이다. 조금 차이는 있지만 지난해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채동욱 전 검찰총장의 혼외자 사건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된다. 최고 로펌의 에이스 변호사가 기억상실증에 걸리면서 다른 삶을 살게 되는 모습을 그린 게 ‘개과천선’이다.



 이에 맞선 KBS 수목드라마 ‘골든크로스’는 론스타의 외환은행 헐값 인수 사건을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실제와 상상을 미묘하게 버무린 두 편의 수목드라마가 현실보다 더 생생하게 대형 로펌의 내밀한 세계를 다루면서 법조계 안팎에서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다. 세월호 참사 이후 사회 곳곳에 퍼져 있는 8대 관피아(관료 마피아)에 대한 국가개조 차원의 전쟁이 선포된 마당에 ‘로피아(Law+Mafia)’가 전면적으로 조명되고 있는 셈이다.



다른 듯 닮은 깨알 같은 현실 묘사



‘개과천선’에는 실제 사건을 연상케 하는 소재가 다양하게 얽혀서 등장한다. ‘유림그룹’ 사건은 올해 초 기소돼 현재 서울중앙지법에서 1심 재판을 받고 있는 현재현 동양그룹 회장 사건을 연상케 한다. 주인공인 차영우펌의 김석주 변호사는 유림그룹이 무리하게 회사를 인수하다 자금난에 빠지자 기업어음(CP)을 발행해 빚을 탕감받는 대책을 설계해준다. 이 CP를 계열 증권사를 통해 판매한 뒤 회사를 법정관리에 들어가도록 하는 거였다. 급한 불을 끄라고 세워준 대책이었다. 낮은 이자와 형편없는 신용도에도 불구하고 계열 증권사 덕분에 CP는 잘 팔렸다. 오너 일가는 결국 고객 3만 명에게 1조원이 넘는 CP를 판 뒤 법정관리를 신청한다. 오너 일가의 그룹 지배권 유지를 위해 CP 발행 후 법정관리에 들어간 동양그룹 사건의 골격과 판박이다.



어민들이 차영우펌을 직접 찾아가 피해보상금을 달라며 시위를 벌이는 모습을 다룬 ‘씨스타호 기름 유출 사건’은 2007년 충남 태안 앞바다에서 발생한 ‘허베이 스피리트호 기름 유출 사건’을 연상시킨다. 피해에 비해 턱없이 적은 보상금을 받게 된 어민과 법률적으로 결론이 난 문제라며 추가 보상금 지급에 난색을 표하는 기업 측 입장을 실감나게 그렸다. ‘태진건설 인수전’은 2010년 실제로 진행된 현대건설 매각을 둘러싼 현대차그룹과 현대그룹의 충돌과 유사하다. 현대그룹이 우선협상대상자로 먼저 선정됐지만 프랑스에 예치된 1조2000억원의 자금 출처에 대한 의문이 제기됐고 이를 해명하지 못해 결국 현대차로 넘어가게 되는 인수 과정이 드라마 속에서도 유사한 형태로 전개된다.



드라마 ‘골든크로스’는 모티브가 2003년 외환은행 헐값 매각 사건이다.



 드라마 속에서는 대한민국을 이끌어 나가는 경제관료와 최고 로펌의 변호사가 한민은행을 외국계 사모펀드 PAX에 헐값으로 매각하는 과정으로 각색됐다.



 서동하 경제기획부 금융정책국장과 그의 배후에 있는 사조직 골든크로스는 현실 세계의 ‘모피아(옛 재무부의 약자인 MOF+Mafia)’를 연상시킨다.



 론스타라는 해외 자본을 끌어들이기 위해 9%가 넘었던 국제결제은행(BIS) 자기자본비율을 6%대로 조작하는 등 당시 수사 과정에서 제기됐던 의혹들이 전면에 배치돼 현실감을 불어넣고 있다.



이른바 로피아로 불리는 대형 로펌 변호사들에 대한 묘사도 나온다. ‘개과천선’에는 대표인 차 변호사가 법원에 근무하는 전지원 판사를 로펌의 차기 에이스 변호사로 영입하기로 점찍고 접근하는 장면이 묘사된다. 차 대표는 전 판사에게 “변호사 출신 대법관이 없었던 것도 아니고 그 정도 자리는 보장돼야 다시 돌아갈 수 있지 않겠느냐”며 “15년 후 그 자리를 보장하겠다”고 말한다.



 전 판사를 스카우트하려는 이유에 대해서는 “현재 대법관 중 대법원장이 될 확률이 가장 높은 대법관 아래에서 재판연구관으로 지냈을 때 전 판사가 쓴 판결문이 토씨 하나 고치지 않고 그대로 나간 적이 많다”며 “대법관에게 인정받는 사람이 제시하는 법리는 하급심에서도 별말 없이 받아들여진다”고 설명한다.



허황된 설정, 과장된 면도



‘골든크로스’에 나오는 로펌 신명의 박희서 변호사는 보다 노골적이다. 서동하 국장이 스폰서 관계를 맺고 있는 연예인 지망생을 살해하자 박 변호사는 그녀의 아버지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는 전략을 설계하고 실행에 옮긴다. 경찰과 교도관 매수는 물론이고 범행이 드러나려 할 때면 종종 조폭들을 동원해 위기를 모면해나가는 탁월한 수단을 선보인다. 로펌 변호사가 조폭을 동원하거나 15년 후 대법관 자리를 약속하는 건 드라마라고는 해도 지나친 과장이라는 얘기다. 한 대형 로펌 변호사는 “실제 사건들을 드라마로 끌어들여 현실감을 높인 시도는 좋지만 누구나 다 ‘설마’라고 얘기할 만한 허황된 설정들을 당연한 사실처럼 그리는 것을 두고 불편해하는 시각도 있다”며 “1년 뒤 자기 자리도 어찌 될지 모르는 판국에 15년 뒤 대법관 자리를 약속해주는 게 말이 되느냐”고 꼬집었다.



‘개과천선’은 국내 대형 로펌 중 한 곳인 법무법인 화우가 제작을 돕고 있다. 담당 PD를 통해 감수 요청이 들어와 내부 검토 끝에 조언은 해줄 수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알려진다. 정진수 법무법인 화우 변호사는 “로펌에 적대적인 설정이 많이 나오기는 하지만 드라마라는 점을 감안했다”며 “소속 변호사가 대본에 나오는 법률용어나 법정 모습, 로펌 내 사무실 배치 및 업무 환경 등에 대해 조언을 하는 정도이지 내용은 전적으로 작가의 창작물”이라고 설명했다.



 국민참여재판 과정을 다룬 에피소드에서는 현직 판사가 직접 촬영 현장을 방문해 무리한 설정과 대사가 없는지 등을 걸러주기도 했다. 김대현 서울중앙지법 공보관은 “참여재판에서 배심원들이 어떤 식으로 의견을 내는지, 변호인과 검사는 어떻게 공방을 벌이는지 등에 대해 조언했다”며 “다만 극적 재미를 위해 실제와 다르지만 그대로 진행된 부분도 존재한다”고 설명했다. ‘골든크로스’는 공식 자문은 하고 있지는 않다. 이 드라마를 만드는 홍석구 PD는 “작가가 개별적으로 변호사들을 취재해 대본을 쓸 때 반영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박민제 기자



배석판사가 증인 신문, 로스쿨 졸업생이 변론 ‘옥에 티’



현실성이 높은 드라마에도 극적인 재미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옥에 티’가 있다. ‘개과천선’에서 법정 장면마다 법원 경위가 외치는 ‘기립’ ‘착석’이라는 한자어 대사가 대표적이다. 실제 재판에서는 재판부가 법정에 들어서면 “모두 일어서주십시오” “앉아주십시오”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현직 법관으로 나오는 전지원 판사도 비현실적 설정이라는 평이다. 배석 판사가 재판장을 제치고 주도적으로 증인 신문을 진행하고 입증이 부족한 검사를 혼내는 장면이 나오는데 현실에서 이런 배석판사는 없다. 또 변호사 연수를 받고 있는 로스쿨 졸업생이 법정에서 변론을 이끌어 나가는 모습도 현실에서는 불가능하다. ‘골든크로스’에서 주인공 강도윤 변호사가 병원에 입원한 서이레 검사를 대신해 자신의 동생과 아버지를 죽인 살인범에 대한 수사를 진행하는 장면도 드라마에서나 가능하다는 평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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