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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서의 종횡고금<16> '명재상'이 그리운 시대

중앙일보 2014.06.21 00:31 종합 23면 지면보기
정재서
이화여대 중문과 교수
총리 인준 문제로 온 나라가 소연(騷然)하다. 역사를 훑어보면 임금이 좋은 정치를 이룩할 때는 반드시 뛰어난 재상이 보필했음을 알 수 있다. 정치에도 콤비 플레이가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가령 당 태종(唐太宗) 시절을 예로 들어보자. 태종은 치열한 골육상쟁 끝에 황제의 자리를 차지한 야심가였다. 위징(魏徵)은 그의 라이벌 편에 서서 한때는 태종을 제거하는 데 앞장섰던 사람이었지만 투항한 후 현신(賢臣)이 된다. 그가 하도 직언을 자주하여 태종은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으나 덕분에 중국 역사상 태평성대로 기록되는 ‘정관(貞觀)의 치(治)’를 이룩했다. 위징 사후 고구려 정벌을 시도했다가 실패한 후에는 생전의 충간(忠諫)을 못내 그리워했다고 한다.



 위징과 비슷한 인물로 춘추 5패(覇) 중 한 사람인 제환공(齊桓公)의 재상 관중(管仲)이 있다. 아니, 관중이 더 전설적인 명성을 지녔다. 관중 역시 처음에는 왕위 쟁탈전에서 제환공의 반대편 왕자를 지지했다. 심지어 그는 제환공을 겨냥하고 활을 쏘아 혁대를 맞추기도 했다. 그런 관중을 포용해 재상으로 삼았기에 제환공은 패업을 성취할 수 있었다. 관중은 뛰어난 전략가임과 동시에 경제통이어서 제나라를 부강국으로 만들었다. 사치스러운데다 개인적 결함도 많았지만 공자는 “관중이 없었다면 우리는 모두 야만인이 됐을 것이다(微管仲, 吾其被髮左<887D>矣)”(『論語』‘憲問’)라고 칭송했다.



 우리나라에는 관중·위징 같은 현신이 없었는가. 있었다. 조선 500년을 통해 최고의 재상으로 손꼽히는 황희(黃喜) 정승이 바로 그다. 황희 역시 처음에 세종이 형인 양녕대군을 제치고 임금이 되는 것을 반대했다는 점에서 앞의 두 사람과 묘하게 닮았다. 만화 『조선왕조실록』은 균형을 잃지 않은 논평이 일품인데, 박시백 작가에 의하면 황희의 의견은 항상 원칙과 현실 사이의 적절한 지점에 있어서 세종이 신뢰했다고 한다. 그는 24년간 영의정 자리에 있었다.



 재상은 정확한 판단과 실무 능력도 중요하지만 비범한 정신적 자질도 요구됐다. 소론의 명재상인 남구만(南九萬)이 그런 사람이었다. 친구가 평안감사로 갔다가 두옥(斗玉)이라는 기생을 총애했는데 서울로 승진해 가면서 그녀를 버렸다. 배신감에 임진강 물에 빠져 죽은 두옥의 귀신이 친구 아들을 괴롭혔더니 남구만이 한눈에 알아보고 퇴치했다는 야담이 있을 정도였다. ‘두옥이 귀신’에서 ‘두억시니’라는 말이 생겼다.



 도력을 지니기로는 남인의 영수였던 허목(許穆)도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초야의 선비로서 과거를 거치지 않고 재상에 선임되었던 허목은 예학의 대가였지만 아버지로부터 단학파(丹學派) 도인의 수련 전통도 이어받은 인물이었다. 그가 삼척부사 재직시 해일 피해가 심한 것을 보고 비문을 지어 신비한 전서체(篆書體) 글씨의 비석을 세웠더니 바다가 잠잠해졌다는 일화가 전한다. 일명 ‘퇴조비(退潮碑)’라는 그 비석은 지금도 남아있다.



 일국의 재상이 되려면 무언가 완벽해야 한다는 여망에서 비롯된 설화들이 아닌가 싶다. 문득 ‘집이 가난하니 좋은 아내가 그리워지고, 나라가 어려우니 어진 재상을 생각하게 된다(家貧思良妻, 國難思賢相)’는 구절이 떠오른다. 과연 당대의 어진 재상은 어디에 있는가.



정재서 이화여대 중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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