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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소섬유 얽어 만든 가구 … 해외서 먼저 알아봤다

중앙일보 2014.06.19 01:04 종합 23면 지면보기
탄소섬유를 손으로 엮어서 만든 라미(Lami) 벤치와 탄소섬유·알루미늄 합금·스테인리스 스틸로 만든 라무스 M1 테이블. 라미는 ‘나뭇가지들’이란 뜻의 라틴어다.


가구일까, 예술일까.

디자이너 노일훈의 실험
실처럼 보여도 강철보다 튼튼
프랑스 옥션서 2000만원 낙찰도



 지난 3월 한국의 젊은 디자이너 노일훈 (36)씨가 만든 의자가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예술품 경매 ‘타잔’(Tajan)옥션에 전시됐을 때 관람객들은 그 앞에서 주춤했다. 그럴만도 했다. 그가 만든 의자와 벤치는 언뜻 두꺼운 검은색 실로 촘촘하게 짠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외의 반전이 있다. 강철보다 몇 배 더 튼튼하다는 점이다. 의자 이름은 루노, 벤치는 라미. 탄소섬유(carbon fibre)를 실처럼 만들어 손으로 직접 짠 것이다. “신경세포들이 치밀하게 얽힌 인체의 신경 그물망에 매료돼 시작한 일이었어요. 이 구조의 장점을 살려 무언가를 꼭 만들어보고 싶었죠. 처음부터 가구를 생각한 것도 아니에요. 구조에 대한 궁금증을 푸는 실험의 결과물이 의자와 벤치, 테이블이 된 거죠.” 노씨의 설명이다.



 노씨가 만든 탄소섬유 가구들에 유럽 컬렉터들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노씨 작품이 해외 무대에 처음 나간 것은 지난해 4월 이탈리아 밀라노 국제가구박람회. 이후 국제 디자인페어 ‘디자인 데이즈 두바이’와 프랑스 옥션회사 타잔(Tajan)의 출품 요청이 들어왔다. 지난 3월 두바이 페어에서 의자와 테이블·스툴 등 작품 4점이 모두 팔린 데 이어 3월과 6월 타잔 옥션에 출품한 작품 3점이 2000만원(의자)이 넘는 높은 가격에 낙찰됐다.



 노씨는 영국 런던의 저명한 건축회사 소속 건축가였다. 디자이너로 변신한 그는 건축이나 디자인이나 다를 바가 없다고 했다. 서울 영등포시장 한가운데 스튜디오를 차리고 디자인 작업에 몰두하는 그의 얘기를 들어봤다.



풍선을 팽창시키는 실험과 천을 잡아당기는 방법을 결합해 테이블의 조형을 완성했다(사진 왼쪽), 라틴어로 ‘곡선’이라는 뜻의 루노(Luno) 의자(사진 가운데). 자연스러운 곡면을 찾아내기 위해 실을 늘어뜨리는 중력을 이용한 실험을 했다. 노씨가 만든 조명등 디 라이트(사진 오른쪽). 사용자가 빛을 조절할 수 있다. [사진 노일훈 스튜디오]


 - 의자를 탄소섬유로 만들었다.



 “얽키고설킨 신경 구조의 장점을 디자인에 활용하고 싶었는데, 알맞은 재료를 찾다가 만난 게 탄소섬유다. 구조에 대한 실험이 자연스럽게 새 소재로 이어졌다. 탄소섬유는 작업할 때는 유연한 실 같지만, 나중에 열처리를 하고 나면 엄청난 강도가 생긴다.”



 노씨가 쓴 탄소섬유는 흔히 ‘꿈의 소재’ 라 불린다. 강철보다 10배 강하지만 무게는 4분의 1정도로 알루미늄처럼 가벼워 반도체·우주항공 등 첨단분야에 쓰인다. 노씨는 “탄소섬유를 찾는 과정에 한국이 세계에서 손꼽히는 제조국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며 “영국에서 작업하면 오히려 힘들었을 텐데 운이 좋았다”고 말했다.



 - 탄소섬유 로 직접 엮었다고 했는데.



 “상판의 매듭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서로 육각형으로 서로 맞물리는 구조다. 이를 엮는 과정에서 망친 적도 많았다. 루노 의자를 만들기 위해 제작한 실물 크기 스티로폼 모델도 30개가 넘었다(웃음). 직접 만들어보기 전에는 어떻게 될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모든 과정이 실험의 연속이었다. 무엇인가를 만드는 것 못잖게 내게 중요한 것은 실험으로 궁금증을 풀고 배워나가는 것이다.”



 노씨는 탄소섬유 의자와 벤치 외에 강화플라스틱(FRP)·알루미늄 테이블과 조명기구도 만든다. 모두 천을 잡아당기거나 풍선을 이용하는 등 독특한 실험을 거쳐 만들었다. 용도는 각기 다르지만 공통점도 있다. 모두 자연을 닮았다는 점이다. 그는 “바람과 중력, 물과 흙의 질감과 무늬 등을 보면 자연만큼 풍요로운 아이디어 창고도 없다”며 “자연 현상에서 패턴을 찾아 작품에 담고 싶다. 제가 하는 일은 궁극적으로 자연에 보내는 찬사”라고 말했다.



 -건축과 디자인을 모두 공부했다.



 “설계사무소에서 많은 걸 배웠다. 직속 상사가 대영박물관·스탠스테드 공항·보스턴 미술관 등 큰 프로젝트 설계를 주도했던 건축가 마이클 존스다. 건축이 건물 설계에 제한된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건물을 설계하듯이 프로젝트를 이끌어간다. 조각 예술도, 가구도 건축이다.”



 세계적으로 이름난 큰 직장을 떠나 영등포 시장 안 낡은 건물에서 작업하는 게 고달프지는 않을까. 노씨는 “건축 회사에 다니면서도 점심 먹으며 만들고 싶은 것을 스케치했다. 오래 꿈꿔온 일, 정말 하고 싶던 일을 하고 있는 지금이 좋다. 다음 프로젝트는 지금 LED를 이용한 스크린 작업도 있고, 또 다른 패턴을 디자인에 응용할 것도 있다. 새로 시작할 실험만 생각해도 가슴이 설렌다”며 웃었다.



이은주 기자



◆노일훈(37)=영국 런던의 건축학교 AA스쿨·영국왕립예술학교(RCA·Royal College of Art) 산업디자인 석사. 영국 건축가 노먼 포스터가 이끄는 건축설계사무소 ‘포스터스 앤 파트너스’에서 일하며 보스턴 미술관(Boston Museum of Fine Arts), 임페리얼 공대(Emperial College of London) 등의 프로젝트에 참여. 영국 왕립건축사 자격을 얻고 2010년 노일훈 디자인 스튜디오 설립. 2011년 영국 아람갤러리(Aram Gallery)초대전. 현재 가나 스페이스 크로프트 갤러리 전속작가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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