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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로부터 문물 교역 성행한 풍요로운 '순교 성지'

중앙일보 2014.06.19 00:03 15면 지면보기
1 동쪽에서 바라본 공세리 성당 본당 외부 전경. 1922년 완공된 벽돌 건물이다. 2 조창에 보관된 세곡을 보호하기 위해 주변에 돌로 쌓은 창성 일부와 해운판관비.


충남 아산시에는 왕실 온천으로 유명했던 온양온천과 현충사를 비롯해 민초들의 바람이 담긴 미륵과 옛 나루터 등 복합적이고 다양한 문화요소가 많다.

[천경석의 아산 이야기] ② 공세리
"21개 고을 세곡 모아
서해안 따라 한강 거슬러
마포 서강으로 운반"



현재는 친환경 농업과 첨단산업이 함께하는 도·농 복합도시로 자리잡고 있다. 향토사학자인 천경석 온양고 교사의 ‘아산 이야기’를 통해 아산의 과거와 현재를 살펴본다. 이번 회는 ‘공세리’다.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는 아산만 안쪽 한가운데에 위치해 서해와 맞닿아 있던 마을이다. 조선시대 세곡(나라에 세금으로 바치던 곡식)을 모아 보관하던 공세곶창 터가 있고, 전국적으로 유명한 공세리 성당이 있어 많은 사람이 찾아오고 있다.



이 일대는 충청도 내포의 관문이자 일찍부터 해상교통의 요충지였다. 사람들의 이동은 물론 문물 교역에도 매우 중요한 지점이었다. 특히 세곡을 모아 서울로 운반하는 조운(선박으로 수도로 운반하는 제도)과 관련해서는 더욱 그렇다.



공세곶창 이야기



조선 초기부터 운영된 공세곶창은 현재 아산 지역에 해당하는 아산현·온수현·신창현 등 3개 고을을 포함해 총 17개 고을의 세곡이 모이는 곳이었다. 성종 8년(1477년)에는 인근 범근천(현 당진시 우강면 강문리)에 있던 조창(해상 수송을 위해 설치한 창고)을 폐지하고 그 역할을 공세곶창으로 통합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따르면 범근천 조창으로 세곡을 내던 고을은 서천·남포·태안·서산·해미·당진·예산·청양·부여 등 모두 21개 고을이었다. 이에 따라 공세곶창에는 기존 17개 고을과 범근천 조창 21개 고을, 옥천·평택 등 총 40개 고을의 세곡이 모여들었다. 금산군을 제외한 현재 충남 지역 전체와 평택·청주·문의·옥천 등 경기·충북 지역 일부가 포함된다. 중종 18년(1523년)에는 창고 80칸을 짓고 공진창(貢津倉)이라 했다.



 고을에서 거둔 세곡은 매년 음력 11월 초부터 이듬해 정월까지 공세리로 옮겨졌다. 주로 수레나 지게 등을 이용했다. 그러나 도로 사정이 좋지 않아 한겨울에 각지에서 산 넘고 물 건너 공세리까지 세곡을 운반해 오는 일은 매우 힘들었다. 고을의 세곡이 모두 모아지면 봄(음력 3월)에 배를 띄웠다.



세곡 운송은 매우 중요하면서도 위험이 뒤따르는 일이었다. 이 때문에 조졸(조군)들은 조운선이 출발하기 전 반드시 순풍과 뱃길의 무사안전을 기원하는 제를 올렸다. 현재 공세리 성당 남쪽에 있는 산에서 제사를 지냈는데 이 산을 신풍산(信風山)이라 했다. 제사 지내는 곳은 ‘신풍사(信風祠)’로 기록돼 있으나 그 위치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조선 후기 인조 9년(1631년) 조창 주변에 돌로 창성(倉城)을 쌓았다. 효종 2년(1651)에 충청도에도 대동법이 시행되면서 세곡의 양이 많아져 공진창에서 조운하는 양이 늘어나기도 했다.



 공세리 일대에는 인구도 많이 거주했고 주막도 생겼다. 18세기 중반에 편찬된 『여지도서』의 아산현지에는 당시 공세리 5 개 마을에 257호 895명이 거주했다고 기록돼 있다. 그때 아산현 관아 소재지 읍내에 303호 974명이 거주했던 것과 비교하면 공세리 일대가 얼마나 번성했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는 민간 상인이 성장하고 경강상인 등이 배를 이용해 운송업에 나서기도 했다. 게다가 화폐가 본격 유통되고 조세금납이 이루어지면서 곡식 수납의 비중이 감소하며 공진창의 기능도 점차 축소됐다. 이후 세곡 수납을 내는 지역과 창고 칸수가 계속 줄면서 19세기 중반에는 조창 기능을 완전히 상실하고 방치됐다. 현재 공세곶창성 일부가 남아 있고, 그 앞에 해운판관비 등이 세워져 있으며 충남도 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공세리 성당 이야기



공세리 성당 입구에 있는 ‘꿈꾸는 팽나무 도서관’. 학부모들의 자원봉사로 운영된다.
중국과의 주요 교통로이자 내포 지방의 관문인 공세리에는 일찍부터 천주교가 전파됐다. 1895년 공세리에 최초로 성당이 세워졌다. 공세리 성당(충남도 기념물 제144호)은 우리나라 천주교 역사에서 중요한 순교와 믿음의 성지일 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성당으로 매우 유명하다. ‘불새’ ‘태극기 휘날리며’ 같은 영화와 ‘모래시계’ ‘아이리스2’ 등 드라마의 촬영지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내포 지역에는 1785년께부터 천주교가 전파됐고, 공세리 일대도 1800년대 초 신자들이 생겼다. 인주면 걸매리 일대를 간척한 밀양 박씨 집안이 1817년 이전에 천주교를 처음 받아들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점차 확산되며 인주면 공세리·걸매리·밀두리 등 아산 지역 각지에 많은 천주교 신자와 공동체가 생겼다.



 아산 지역에는 1880년대부터 천주교가 급속히 확산돼 공세리와 송악면 강장리 등 10여 곳에 공소(公所)가 설립됐다. 내포 지역에는 1890년 양촌 본당(현 예산군 고덕면 상궁리)과 신창 간양골 본당(현 예산군 예산읍 간양리)이 설립됐다. 파스키외 신부가 주임을 맡은 간양골 본당이 아산시 일대를 관할했는데 1894년 동학농민운동과 파스키외 신부의 병환으로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이듬해 5월 드비즈(한국명 성일론) 신부가 간양골 본당 주임신부로 임명됐다. 그러나 그는 간양리로 가지 않고 공세리 민가를 구입해 자리잡았다. 이것이 공세리 본당의 시작이다. 공세리 본당은 간양골 본당을 이어받았기 때문에 공식적으로는 1890년에 시작됐다고 한다. 공세리를 기준으로 하면 드비즈가 초대 주임신부지만 간양골 본당의 파스키외를 초대 신부로 보면 그는 2대가 된다. 드비즈 신부는 1931년까지 총 36년 동안 재임하면서 공세리 성당의 발전에 큰 족적을 남겼다.



 특히 지금까지 남아 있는 본당과 사제관 건물을 직접 설계하고 감독하며 완공했다. 벽돌을 이용해 지은 고딕 첨탑 양식 본당 건물은 당시에도 많은 사람이 구경하러 왔었다고 한다. 이 두 건물은 1998년 충남도 문화재(기념물)로 지정됐다.



 공세리 성당은 본당 설립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1995년 성역화 사업을 추진해 2000년 10월 마무리했다. 이후 ‘공세리 성지·성당’이 공식 명칭이 됐다. 2008년 사제관을 ‘성지 박물관’으로 개관했다. 최근 성당이 있는 서강마을에 꿈꾸는 팽나무 도서관과 북카페 등 마을공동체 만들기 사업도 진행 중이다.



공세리 성당은 초기에 아산은 물론 천안·공주·진천·안성 지역까지 관할했다. 당시 미사에 쓸 포도주를 공급하기 위해 아산·천안·안성 지역이 포도 주산지가 됐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또 공세리 본당에서 공주 본당(1897), 안성 본당(1901년), 온양온천동 본당(1948), 둔포 본당(1976년)이 분가했으니 아산과 그 주변 지역을 아우르는 ‘신앙의 못자리’이기도 했다.







천경석 교사



1960년 충남 아산에서 태어났다. 강원대 역사교육과를 졸업한 뒤 34년간 고교 역사 교사로 재임하면서 20여년간 아산 지역에서 근무한 향토사학자다. 현재 온앙고 교사로 재직 중이다. 순천향대 부설 아산학연구소 운영위원, 국사편찬위원회 지방사료조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아산 인물록』『아산의 입향조』『종곡리 이야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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