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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000000001g도 걸린다 약물 대신 DNA 심는 선수들

중앙일보 2014.06.17 02:25 종합 16면 지면보기


브라질 월드컵 열기가 지구촌을 달구고 있다. “축구 때문에 새벽잠을 설쳤다”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월드컵 때문에 평소보다 더 바빠진 사람들도 많다. 선수들의 도핑(doping, 금지약물 복용)검사를 맡은 과학자들도 그중 하나다. 특히 올해 대회는 개최국인 브라질이 아닌 지구 반대편 스위스에서 도핑 분석이 진행되고 있다. 무슨 이유일까. 날로 교묘해지는 도핑 기술과 이를 막는 첨단과학 기술의 숨가쁜 ‘숨바꼭질’을 소개한다.

[궁금한 화요일] '100년 숨바꼭질' 도핑
특정 단백질 만드는 유전자 이식
기존 검사 방법으론 적발 힘들어





도핑은 “선수가 경기력을 높이기 위해 금지약물을 복용하거나 금지된 방법을 사용하는 일”을 말한다(한국도핑방지위원회). 18세기 남아프리카 원주민들이 사냥에 나서기 전 흥분제 성분의 음료(Dope)를 마셨던 게 기원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근대 스포츠 선수들이 근육을 키우고 지구력·집중력 등을 높이려 약물을 사용하면서 문제가 불거졌다.



 1896년 프랑스 보르도-파리 사이클 대회에서 우승한 영국 사이클 선수 아서 린턴은 두 달 뒤 약물중독으로 숨졌다. 1904년 미국 세인트루이스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인 토머스 힉스는 흥분제를 먹고 출전했다 경기 직후 졸도했다. 60년대 동유럽에선 도핑 선수들이 잇따라 단명해 “감독·코치 맡을 사람이 없다”는 말이 돌기도 했다.



 사고가 줄을 잇자 67년 국제올림픽위원회(IOC) 내에 의무분과위원회가 생겼고 68년 동·하계(그르노블·멕시코) 올림픽 때 처음 도핑검사가 실시됐다. 99년에는 독립성을 강화하기 위해 세계반도핑기구(WADA)가 별도로 설립됐다.



 WADA는 도핑을 “선수의 건강을 해칠뿐더러 스포츠의 페어플레이 정신에 어긋나는 반사회적이고 불법적인 행위”로 규정하고 있다. 이 때문에 경기 규칙을 어긴 것보다 더 강하게 제재한다. 도핑 사실이 확인되면 해당 대회 성적이 몰수 처리되는 것은 물론 일정 기간 다른 대회 출전도 금지된다. 현재 자격정지 기간은 2년이지만 내년부터 4년으로 더욱 강화된다.



 도핑 판정은 WADA의 인증을 받은 연구기관만 담당할 수 있다. ‘엉터리 검사’로 선의의 피해자가 생기는 걸 막기 위해서다. 인증시험은 1년에 3차례, 매회 6개의 시료를 주고 어떤 성분이 얼마나 들었는지 맞히는 ‘블라인드 테스트(Blind Test)’로 진행된다. WADA가 정한 도핑 금지약물·방법은 현재 총 230여 종이다. 하지만 약물이 몸 속에서 화학반응을 일으켜 만들어지는 대사물(metabolite) 종류는 그보다 훨씬 더 많다. 금지물질이 들었는데 검사기관이 음성 판정을 하면 10점, 거꾸로 음성인데 양성 판정을 하면 25점을 깎는다. 이런 식으로 1회에 24점, 3회 합계 30점 이상 감점을 당하면 검사자격이 정지된다.



 현재 WADA 인증 도핑 검사기관은 전 세계 29개국 32곳(미국·독일·스페인만 각 2곳)뿐이다. 한국의 경우 84년 설립된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의 도핑컨트롤센터(DCC)가 유일한 기관이다. KIST-DCC는 서울 아시안게임(86년)과 올림픽(88년)을 성공적으로 치러냈고, 특히 올림픽 때 육상스타 벤 존슨의 도핑 사실을 적발해 세계적 주목을 받았다. 올 9월 개막하는 인천 아시안게임, 2018년 평창 겨울올림픽 도핑테스트도 KIST-DCC가 맡을 예정이다.



 현재 월드컵이 열리고 있는 브라질선 리우데자네이루의 도핑컨트롤연구소(LADETEC)가 과거 WADA 인증을 받았다. 하지만 지난해 9월 자격이 취소됐다. 2012년 인증시험에 떨어져 6개월간 자격이 정지됐는데, 지난해 시험에서 또 낙제점을 받았기 때문이다. WADA와 FIFA는 대신 스위스 로잔에 있는 도핑연구소를 이번 대회 검사기관으로 지정했다.



 월드컵 때 도핑검사 횟수는 총 1000회 가까이 된다. 32개 출전팀 각 23명의 선수 전원(후보 포함)의 혈액과 소변을 검사하고, 총 64번의 경기가 끝날 때마다 양팀에서 각 1명씩을 무작위로 골라 2차 검사를 한다. 검사 결과는 보통 다음 경기가 열리기 전 나오지만 이번에는 비행기로 시료를 스위스까지 실어 날라야 해 시간이 더 걸리고 있다.



 현재 세계 평균 도핑 적발률은 약 2% 수준이다. “검사 기술이 발달하면서 도핑 시도가 이전보다 많이 줄었다”는 게 전문가들 얘기다. 실제로 요즘 최신 장비들은 혈액 1ml 속에 든 1피코그램(pg=1조 분의 1g)의 약물까지도 잡아낸다.



 하지만 적발이 힘든 신종 도핑기법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과거에는 도핑 약물 대부분이 마약이나 흥분제·남성호르몬 등 단백동화제 같은 저분자 합성화합물이었다. 반면 요즘은 성장호르몬, 인슐린·조혈인자 등 단백질·펩티드 물질 등이 대세다. 이런 물질들은 몸 안에서 자연적으로 만들어지는 화합물과 구조가 비슷해 구별이 힘들다.



 약물 대신 수혈(輸血)로 혈중 적혈구 수를 높이는 방식도 골칫거리다. 다른 사람 피를 맞으면(동종수혈) 적혈구 항체실험을 통해 확인할 수 있지만 자기 피를 보관했다 맞으면(자가수혈) 적발이 힘들기 때문이다. 산소를 운반하는 적혈구 수가 늘면 심폐지구력이 좋아져 경기 능력이 향상된다.



 최근에는 선수별로 맞춤 제작되는 ‘디자이너 드러그(Designer Drug)’도 등장했다. 이런 약물은 시판 약물과 달리 화학구조가 알려져 있지 않다. 이 때문에 검사 결과 의심스러운 수치가 나와도 어떤 약물을 복용했는지 지목하기가 힘들다. 2004년 미 메이저리그의 거포 배리 본즈가 연루됐던 ‘발코(BALCO, 연구소 이름) 스캔들’이 대표적인 예다.



 단백질을 맞는 대신 아예 그런 단백질을 만드는 유전자를 이식하는 ‘진(gene, 유전자) 도핑’도 있다. 환자 치료용으로 개발된 유전자 치료제, 줄기세포 치료제를 도핑 용도로 악용하는 경우다. 이런 기술은 선수의 체질 자체를 바꾸는 방식이라 기존의 방법으로는 적발이 불가능하다. 권오승 KIST-DCC 센터장은 “외부주입 유전자를 탐지하는 방법을 개발하면 도핑뿐 아니라 다른 연구 분야에서도 폭넓게 활용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WADA는 이 같은 최신 도핑기술에 맞서 올해부터 ‘선수생체여권(Athlete Biological Passport, ABP)’ 제도를 전면 도입했다. 해외에 다녀올 때마다 입·출국 사실을 기록하는 여권처럼 평소 선수들의 생체지표를 추적 관찰하는 제도다. 혈액에서 적혈구·백혈구 숫자와 헤모글로빈 농도 등을, 소변에선 테스토스테론 등 6가지 스테로이드 대사체의 농도·비율을 기록한다.



 이런 지표의 평소 수치를 알고 있으면 도핑으로 이례적인 변화가 생겼을 때 쉽게 찾아낼 수 있다. 자가수혈이나 ‘유전자 도핑’처럼 약물 복용의 흔적을 안 남기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김한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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