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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SUNDAY-아산정책연구원 공동기획] 칼날 한 번 지나가면 끝 … 사방 한 치에 핀 동양예술의 꽃

중앙선데이 2014.06.15 01:17 379호 23면 지면보기
전각가인 진영근씨가 경기도 의왕시 청계심인방에서 작업을 하고 있다. 『채근담』 1만2611자를 1990년부터 9년간 360과에 새긴 명인이다. 조용철 기자
“산정(山丁) 선생! 『전황당인보(田黃堂印譜)』가 나왔어요.”

한국문화대탐사 <18> 전각

1960년대 말 어느 새벽. 한밤중에 걸려온 전화는 다급했다. 전각가(篆刻家) 안광석이었다. 『전황당인보』는 서화 애호가 이용문이 1928년 한·중·일 명가들의 인장을 모아 만든 책이다. 전황당은 황금보다 더 비싸다는 인장 재료 돌, 전황석이 있는 집이라는 뜻이다. 조선 헌종 때 왕실에서 펴낸 『보소당인존(寶蘇堂印存)』과 함께 우리나라 2대 인보다.

“무슨 말씀이세요.”
“인보에 찍힌 귀한 인장들이 통째로 나왔단 말씀이에요. 지금 인사동 골동상한테 가보면 있을 거요. 누가 손대기 전에 어서 가서 거두세요.”

때마침 폭설이 내려 무릎까지 빠졌다. 자동차가 드문 시절이었다. 당시 서울대 미대 교수였던 산정 서세옥 화백은 도리 없이 그 밤중에 정릉에서 인사동까지 걸어가서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과연 중국 명·청대의 대가들과 근대의 오창석, 일본 전각가 오이시(大石南山), 한국의 오세창 등 전각 명가의 인장들이 고스란히 급매물로 나와 있었다. 사업가 이용문이 소장했던 것인데 어느 여고 교장댁을 거쳐 골동상까지 흘러들어온 것이다. 모두 376과(顆)로 어마어마한 양이었다.

낮에 다시 갔더니 볼품없는 것들만 남아 있는 게 아닌가. 인사동에서 고서점을 하던 화교 여씨가 홍콩에 가지고 가서 비싸게 팔아주겠다며 골라 갔다는 것이다. 낭패였다. 귀중한 문화재가 그렇게 해외로 반출되고 말았다.

새김 기술은 기본, 문자학 지식 갖춰야
동양예술의 꽃. 방촌(方寸·사방 한 치로 약 3㎝)의 미학. 글씨나 그림을 완성한 뒤 화룡점정 하듯 작품에 낙관할 때 쓰는 전각을 두고 이르는 말이다. 주로 전서(篆書)로 새기므로 전각이라고 한다. 칼로 나무, 뿔 따위에 호나 이름, 명문장 구절을 양각하거나 음각한다.

“돌에 새길 글을 엄정히 고르고 글자를 배치한 다음, 칼날이 한 번 지나가면 그걸로 끝입니다. 한 획 한 획에 비백(飛白)이 남아 서슬 퍼렇게 살아 있는 거지요. 인생도 전각도 일기일회(一期一會), 찰나적이고 한 번뿐입니다. 한 번 칼날이 지나가며 종결 짓는 통쾌한 단도법(單刀法)은 중국의 피카소로 통하는 제백석(齊白石·1860~1957)이 주창했지요. 전각 칼을 잡고 손길에 맡기면 어느덧 삼매경에 노닐어 신비한 정취가 방촌 사이에서 흘러나와요. 그리하여 옛 비석에서 떨어져 나온 한 조각이나 고대의 죽간(竹簡) 한 자투리와 흡사한 새김이 이루어진다면, 참으로 훌륭한 전각가라 하겠습니다. 동양예술 정점에 전각이 있는 겁니다.”

서세옥 화백은 스스로 즐거워서 전각을 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전각은 도장 또는 인장과 뭐가 다를까. 개인이나 기관의 신표(信標) 구실을 하는 기능성에서는 같지만 예술성에서는 사뭇 다르다.

“생활공예의 속기(俗氣)를 벗어나 고상한 문인아취(文人雅趣)를 담아낼 때 비로소 전각예술이 됩니다. 전서는 고대 갑골문이나 금석문 같은 한자의 기원과 맞닿아 있어요. 지금 통용되는 한자 가운데 전서가 없는 경우도 많아요. 그렇다고 적당히 만들어 새기면 웃음거리가 되지요. 문자학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바탕으로 고자(古字)를 찾아서 제대로 새겨야지요. 도장장이의 새김기술 외에 반드시 문자학에 대한 조예가 있어야 전각가라고 할 수 있어요.”

박원규 한국전각학회장은 분명하게 선을 그었다.

도장장이건 전각가건 이제 글자를 새기는 일이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다. 날인 대신 서명하고 문서도 전자서면으로 대체하는 추세다. 붓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린 다음 낙관할 때 주로 사용하는 것이 전각이니만큼 서화(書畵)와 공동운명체인 셈이다.

무언가를 새겨서 신표나 사회의 공적인 기능을 수행한 역사는 깊다. 기원전 3500년 전 메소포타미아에서 원통형 인장이 쓰였다. 동아시아에서는 하·은·주 삼대에 문서로 남을 속이는 풍조가 일자, 단속하는 수단으로 인장을 썼다. 나라의 도장인 국새(國璽)나 어보, 관인이 그것이다. 그러다 문인아사(文人雅士)들의 문자예술로 자리 잡게 됐다.

19세기 때까지만 해도 평민들은 아예 도장 자체가 없었다. 현재 국민의 67%가 신고한 인감제도는 일제 강점기인 1914년 ‘인감증명규칙’ 시행으로 처음 도입됐다. 그때부터 전국에 이른바 도장포라는 것이 생겼다.

중국 근현대 전각가로 오창석과 제백석이 있다면, 한국에는 오세창과 김태석·이기우가 있다. 추사(秋史) 김정희의 학맥을 이은 오세창은 서화 감식에 뛰어났으며 한국 근현대 전각의 근간을 다졌다. 김태석은 중국에 건너가 활동했는데 중화민국 초대 총통이었던 위안스카이(袁世凱)의 인정을 받아 국새를 새겼다. 쇠로 농사짓고 먹으로 밭을 간다는 ‘철농묵경(鐵農墨耕)’에서 호를 취한 철농(鐵農) 이기우는 오세창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그가 1974년 김영기·이가원과 함께 창립한 한국전각협회는 오늘날 한국전각학회의 전신이다. 철농은 이승만·윤보선·박정희 등 역대 대통령들의 인장을 새겼다.

“박정희 대통령의 호가 중수(中樹)입니다. 철농 선생이 주문 받아 그걸 인장으로 새겨 올렸는데 박 대통령은 가치를 잘 몰라서인지 사용하지 않더군요. 철농 선생은 불굴의 투혼을 지닌 전각가입니다. 몸이 굳는 파킨슨병이 있었는데 제가 전각을 배우면서 참 많이 주물러 드렸어요. 1974년인가 신세계미술관에서 도예가 안동호 선생과 도각전(陶刻展)을 했어요. 도자기와 전각의 만남이지요. 그전에 안동호는 월전 장우성, 운보 김기창과 도화전(陶畵展)을 해서 인기를 끌었거든요. 최순우 선생이 안동호 선생에게 철농과 도각전을 해보라 권하니 ‘그림도 글씨도 아니고 전각 가지고 되겠느냐’며 회의적이었어요. 그런데 막상 도각전을 열고 보니 도화전보다 더 히트했어요. 일본인들이 다 사갔던 거지요. 그 전시회를 준비할 때 제가 옆에서 꼬박 한 달 동안 도와드렸죠. ‘내가 평생 배운 전각의 요체가 이 순간 너에게 들어간다’고 말씀하시더군요. 의발(衣鉢·가사와 바리때)을 받은 느낌이었습니다.”

1 한 점에 수억원을 호가하는 전황석 인재(印材). 2 계혈석 인재. 3 철농이 만취 상태에서 새겼다는 전각. 4 추사의 제자 오소산이 새겼다는 전각. 매화문 인뉴가 수작이다. 5 전황당인보.
매력 넘어선 마력 … 열락의 경지로 인도
서예·전각가 김양동 교수는 철농이 남긴 많은 일화를 전해주었다.

철농은 술을 무척 좋아했다. 취중에 철필(鐵筆·조각칼)도 없이 주머니칼로 월전 장우성 화백을 위해 ‘백수노석실(白水老石室)’이라는 전각을 새겼다. 한번은 만취 상태로 귀가했는데 문득 각을 하고 싶어서 어떻게 새겼는지도 모르게 한 과를 새기고 나가 떨어져 잤다. 아침에 일어나 종이에 찍어보니 고졸한 맛이 일품이었다.

天趣閑中得(천취한중득) 心華靜裏開(심화정리개).

천상의 세계는 한가한 가운데서 얻어지고 마음의 정화는 고요함 속에서 열린다.(사진 3)

유유자적하는 득도의 경지를 노래한 시 구절인데 내용과 딱 맞아떨어지는 운도(運刀)의 맛이 제대로 드러났다. 경지에 든 전각 예술가에게 하늘이 선물한 천필(天筆)이었던 것이다.

어느 칼럼니스트가 철농에게 윤필료(潤筆料)는 얼마나 받느냐고 물었다. “필신(筆神)은 호전(好錢)이라” 붓의 신께서는 돈을 좋아한다며 껄껄 웃었지만 생활이 넉넉하지는 못했다.

우리 시대 전각가의 초상은 어떨까. 공재(空齋) 진영근 전각가의 경기도 의왕 청계산 작업실 심인방(心印房)을 찾았다. 인간극장의 주인공 같은 그는 천상이 금석(金石) 예술가로 알려졌다. 그는 먹고살기 위해 도장을 새기다가 치열한 독학으로 대가의 반열에 올랐다. 동양 고전 『채근담』 1만2611자를 1990년부터 무려 9년간 360과에 새겼는데 1998년 마무리 단계 3주 사이에 백발이 되어버렸다고 한다.

“처음에는 탈모가 되더니 그 자리에서 흰머리가 나더군요. 수염까지도요. 기진맥진하여 벌어진 현상이라고 합니다. 신기한 건 일년 뒤에 다시 검은 머리로 되돌아왔다는 겁니다. 은문(恩門·공모전에 작품을 뽑아준 분)이신 서예가 석도륜 선생께서 ‘일본에도 그런 예가 있다. 자기 한계를 뛰어넘은 증표’라고 격려해주셨지요. 그때부터 스스로 채근거사, 41세 백수자(白鬚子)로 자호했습니다.”

그와 5인의 문하생은 일곱 번째 ‘산석도반전(山石道伴展)’을 열어오며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전각이라는 것은 가장 강한 쇠를 필로 해서 단단한 돌과 충돌해서 만들어내는 금석예술이죠. 글자를 돌에 새기면서 결국은 내 마음에 새기는 것임을 깨닫게 돼요. 그래서 저는 전각을 심각(心刻)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전각에는 매력을 넘어선 마력이 있어요. 열락의 경지죠. 전각가가 곤궁하다지만 예술가의 삶이 다 그런 거죠. 다시 태어나도 전각가로 살 겁니다.”

그는 전각을 캘리그래피나 산업디자인과 접목시키면 무한한 길이 있다고 했다. 전각의 현대적 변용과 활용으로 독특한 조형미를 구축해가고 있는 정병례·여태명 교수를 예로 들었다.

당대의 서예가이자 전각가 하석(何石) 박원규 회장에게 전각의 미래를 물었다.

“전각은 본래 극소수의 문인아사들만이 즐기던 고급예술입니다. 먼저 문장·서예를 알아야 하고 조형적인 미감이 있어야 해요. 서예나 전각을 비롯한 동양화는 본령에 충실해야 합니다. 종이와 먹, 붓을 가지고 당당하게 우리 문자, 우리 그림을 그려야죠. 한자도 동아시아가 공유해온 우리 문자입니다. 한글만 고집하다가 언어수행능력의 질적 저하를 불러왔어요. 특히 전각은 칼과 문자학을 가지고 올곧게 승부해야 합니다. 그림 한 점에 수백억원씩 팔리는 중국의 제백석을 부러워만 할 게 아닙니다. 중국인들이 동양문화와 예술에 대한 대접을 제대로 하고 있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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