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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상(盤上)의 향기] 우칭위안의 상상초월 신포석, 일본 바둑 300년 뒤흔들다

중앙선데이 2014.06.15 01:39 379호 26면 지면보기
1962년 제1기 명인전 리그 최종국에서 우칭위안(왼쪽)과 사카다(오른쪽)가 종국(終局) 직후 기원 관계자들에게 둘러싸인 모습. [사진 일본기원]
인간이라면 듣고 싶은 단어가 있다. ‘신통(神通)’. 듣고 싶기만 할까. 갖고 싶은 능력이다. 2500년 바둑 역사에 단 한 사람, 신통에 부합하는 사람이 있다. 우칭위안(吳淸源·1914~)이다.

⑦ 현대 바둑의 창시자

그러나 그는 명인은 되지 못했다. 1962년 8월 5~6일 초대 명인을 뽑는 제1기 명인전 본선 리그 마지막 대국. 장소는 도쿄의 후쿠다야(福田家). 하시모토 쇼지(橋本昌二·1935~2009)와 후지사와 슈코(藤澤秀行·1925~2009)의 대국과 우칭위안과 사카다 에이오(坂田榮男·1920~2010)의 대국. 후지사와가 이기면 10승2패로 1위가 확정되지만 지면 동률이 된다. 우칭위안과 사카다는 둘 다 8승3패였다.

각자 10시간의 이틀 걸이 대국에서 후지사와는 둘째 날 오후 일찌감치 패했다. 사카다가 우세하다는 소식을 들은 후지사와는 긴자(銀座) 밤거리로 나갔다. 숙적 사카다와의 재대국을 예상하면서 홀로 술을 마셨다. 마지막 대국의 국세(局勢)는 묘하게 흘러갔다. 깊은 밤 집을 메워보니 흑을 잡은 사카다가 반면 5집을 남겨 빅이 됐다(덤 5집). 77국을 마칠 때까지 한 판도 없었던 빅이 78국째 최후의 대국에서 나타난 것이다. 빅은 백승(白勝)이라는 규정이 있어 우칭위안이 이겼다(사진).

그러나 빅승은 ‘빅승이 아닌 승리’에는 못 미친다는 규정도 있어 같은 9승3패지만 후지사와가 리그 1위로 명인이 됐다. 후지사와는 술에 진탕 빠진 새벽녘에 소식을 들었고, 우칭위안의 스승 세고에 겐사쿠(瀨越憲作·1889~1972)는 탄식했다. “우칭위안은 끝내 명인이 되지 못하나 봐!”

한 번 본 정석 잊지 않고 새롭게 해석
명인이 되지 못한 우칭위안. 그의 일생은 어떠했나. 단순히 나열만 해도 사고방식의 혁명과 논리와 철학의 결합, 자유로운 정신 등을 알 수 있다. 먼저 그의 소년 시절. 1914년 중국 푸젠(福建)성에서 태어난 우칭위안은 여섯 살 때 아버지 우이(吳毅·?~1926)에게 바둑을 배웠다. 우이는 일본 유학시절 바둑을 알았다. 왼쪽 엄지손가락이 굽을 정도로 책을 들었던 소년은 재능이 발군이었다. 한 번 본 정석을 잊지 않는 것은 물론 새로운 해석마저 해낼 정도였다. 베이징(北京)에는 적수가 없었다.

소식은 일본에까지 번졌다. 1927년 이노우에 고헤이(井上孝平·1877~1941) 5단이 우칭위안을 시험했다. 우칭위안(先)의 1승1패. 천재 하시모토 우타로(橋本宇太朗·1907~94) 4단이 중국에 건너가 다시 한 번 시험했다. 결과는 우칭위안(先)의 1승1패. 하시모토는 스승 세고에 7단에게 기보를 보냈다. “소년은 일본 바둑을 섭렵했을 뿐만 아니라 창안까지 하고 있습니다.” 기보를 본 세고에는 일본기원 부총재였던 오쿠라 기시치로(大倉喜七朗·1882~1963) 남작을 찾아갔다. “소년을 데려와야겠습니다.” “소년이 와서 일본 기사를 누르면?” “예도(藝道)에 국경은 없습니다.”

1928년 10월 27일 우칭위안은 가족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갔다. “내가 바둑계에 잘한 게 하나 있다면 그것은 우 선생을 일본으로 데려온 일이다.” 하시모토가 평소 자부한 말이다.

기보1
당대 최고 승부사들 강등 잇따라
1933년 10월 16일 우칭위안은 환갑을 맞은 슈사이(秀哉·1874~1940) 명인과 기념 대국을 했다. 명인의 얼굴에 노기가 떠올랐다. 대국장 바깥도 소란스러워졌다. 우칭위안이 파천황(破天荒)의 실험을 했기 때문이다(기보1). 흑1을 3三, 흑3을 화점(花點), 흑5를 천원(天元)에 두었다. 3三은 일본 바둑의 터부(taboo)였다. 천원도 불경(不敬)에 가까웠다. 3개월을 넘겨 1934년 1월 29일에 이르러 명인의 2집 승리로 끝난 바둑은 일본 사회의 관심을 크게 불러일으켰다. 우칭위안은 “대국 전 문득 떠올라 시도했다”고 당시를 무심히 회고했다. 하시모토가 말했다. “그토록 온순한 사람이 앉기만 하면 반상에서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적극적이다.”

그에 앞서 1929년 여름 기타니 미노루(木谷實·1909~75) 5단은 바둑을 두다 말고 대국장 바깥으로 연신 나왔다. 기원 관계자를 붙잡고 “대책 좀 세워 달라”고 애원했다. 역사상 처음으로 우칭위안이 흑으로 흉내 바둑을 두었다. 규정 위반은 아니지만 기타니는 괴로웠다. 우칭위안의 생각은 이랬다. “백을 따라 두다가 적당한 때 흉내를 그치면 흑이 유리하다.”

이 단순하고도 절대적인 사고(思考). 바둑 역사의 허를 찌른 착상. 실수로 승부는 졌지만 흉내 바둑은 덤의 성립을 촉진시켰다. 먼저 두는 흑이 덤을 부담하지 않으면 백은 절대적으로 불리하다. 흉내 바둑은 논리적인 증거였다.

1933년 우칭위안은 기타니·야스나가 하지메(安永一·1901~94)와 함께 『新布石法』을 발간하고 ‘신포석’을 발표했다. 일본 바둑 300년에 대한 반기(反旗)였다. 바둑은 돌 하나하나가 서로 유기적인 관계를 갖는 것. 결국엔 집이 많아야 이기지만 집은 없되 영향을 미치는 수법도 가치가 있다. 그 점을 중시하자. 잠재성·균형·속도 등을 명시적으로 착상했다. 속도(速度) 개념은 얼마나 뛰어난가. 바둑판은 19줄 제한된 세계. 이 세계가 당신의 발걸음이 닿는 만큼 당신의 집이 된다고 가정하자. 상대는 걷는다. 어찌 해야 하는가. 뛰어다녀야 한다. 뛰어다닌다는 게 뭔가. ‘돌의 간격이 넓은 행마를 한다’ ‘두 수를 소비하는 소목 대신에 한 수로 귀를 점거하는 화점을 두면 한 수를 번다’. 포석과 행마에 절대적인 기준을 제시한 것이다.

관념의 창조는 실험을 견뎌내고 실력으로 증명돼야만 한다. 1940~50년대 20년은 증명의 시대였다. 치수고치기 10번기로 기타니와 사카다 등 당대 최고의 승부사들을 모두 한 단(段) 또는 두 단 아래로 강등시켰다. 관념의 창조는 문화의 창조. 문화를 만들어낸 사람은 문화에 묶이지 않는다. 승부는 문화의 방식. 승부를 넘나든다. 그의 포석 강의는 마치 시(詩)를 읽는 것만 같다. 바둑 언어의 본질은 은유. 시어(詩語)의 본질도 은유. 반상엔 부분과 전체의 차별이 없으니 곧 예술의 기틀이다.

종교에서 찾았던 진리, 바둑에서 얻다
그는 종교에 깊이 들어갔다. 1935년엔 홍만교(紅卍敎)에 입교했다. 1946년 하시모토와 10번기를 두기 전엔 새우교(璽于敎)에도 2년여를 빠졌다. 그가 길거리에서 두 손을 합장하고 줄지어 걷는 것이 목격되곤 했다. 뒷날 그는 “종교와 바둑을 따로 떼어서는 나의 인생은 없다”고 했다. 도일(渡日) 직후에도 책상에는 도가(道家)의 고전 『여조전서(呂祖全書)』가 놓여 있었다.

그가 세상에 얼마나 신비롭게 비쳤는가에 대해서는 일화가 많다. 새우교에 몸담은 상태에서 바둑계를 떠난 지 2년 만에 하시모토와 10번기 1국을 두게 된 때다. 세간에 이야기가 떠돌았다. “우칭위안이 아무도 예상 못 한 신비한 포석을 들고 나온데.” 물론 평범한 수법을 썼고 승부는 졌다. 바둑도 그렇다. 신비스러운 인물은 있어도 신비는 없는 것이다. 바둑과 종교의 관련성에 대해서는 짐작되는 바가 있다. 1930년대 초 그는 반상의 균형을 잡아주는 자리가 곧 착점 자리라고 했다. 1950년대에 이르러 ‘균형’은 ‘조화(調和)’가 되었다. 중화(中和)라고도 표현되는 개념. 그는 자신의 인생이 중(中)의 정신을 따른, 화(和)의 정신을 지켜온 삶이라 했다.

균형은 순서 또는 좌우와 같이 대립항이 있는 경우 중간에 위치하는 자리를 강조한다.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의 연장선에 놓인 이해다. 그러나 중화나 조화는 전체성을 강조한다. 극단을 버린 지혜처럼 세상을 분리해 이해하려는 태도를 벗어난다.

1930년대 신포석 시대 이후 20년이 지난 다음에야 그는 조화에 안착했다. 그것은 바둑에서 온 걸까, 아니면 종교에서 온 걸까. 그는 도가의 기운을 받으며 자랐다. 젊을 땐 바둑과 종교가 섞였으며 나이 들어선 중화로 뜻이 모였다. 중화, 즉 전체성은 종교 현상의 핵심. 그러기에 종교 없이는 관념의 창조가 어려웠고, 바둑 없이는 종교가 깊어지지 않았다. 종교를 ‘은유의 세계’로 파악하면 그는 큰 종교인이었다.

바둑에서 기술, 즉 테크닉은 중요하다. 정석이나 맥, 급소, 묘수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부분적인 것. 전체적인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전쟁에 비유해 답을 찾아온 중국. 논리로 탐구한 일본.

우칭위안은 비유와 논리를 넘어섰다. “바둑은 조화다.” “거울의 표면을 닦지 말고 내면을 닦아라.” 내면의 관조 없이 바둑의 깊이를 얻는 것은 어렵다. 논리적으로는 이렇다. 내면의 관조가 깊어지면 주객(主客)이 사라진다. 남는 것은 전체성(totality). 조화로 표현되는 자리가 드러난다. 그의 기상은 표표(飄飄)했다. 구한말의 국수(國手) 노사초(盧史楚·본명은 碩泳·1875~1945)는 일본을 다녀온 후 아들에게 말했다. “너, 기린(麒麟)을 본 적 있느냐.”

대국 때 기사들은 우칭위안의 표일(飄逸)한 인상에 먼저 압도되곤 했다. 품격에 감탄한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1899~1972·노벨 문학상 수상자)가 글쓰기를 권했다. 그래서 나온 것이 20대에 쓴 수필집 『막수(莫愁)』. 봄날 강 언덕에 올라 바람 쐴 때의 쇄락감(灑落感).

후지사와가 우승한 제1기 명인전 시작 전에 일본기원은 망설였다. 우칭위안에게 명인을 먼저 헌정한 다음 도전자를 선발하자는 여론 때문이었다. 그는 격이 다른 기사였다. 현대 바둑을 세운 그에게 세속의 명인은 어울리지 않았다. 내일(16일)은 그의 백세 생신이다.



문용직 서강대 영문학과 졸업. 한국기원 전문기사 5단. 1983년 전문기사 입단. 88년 제3기 프로 신왕전에서 우승, 제5기 박카스배에서 준우승했다. 94년 서울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는 『바둑의 발견』 『주역의 발견』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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