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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믿음] 엉겅퀴꽃차 한 잔의 여유

중앙선데이 2014.06.15 01:47 379호 27면 지면보기
은행잎이 노랗던 늦가을, 내 나이 39세, 시골 읍내 개척교당에 사무실 한 칸을 빌려 법당과 차 마실 공간, 간단한 다용도실을 만들었다. 겨울이 찾아오자 흰 눈이 창틈에 소리 없이 쌓였고, 찬 바람이 쉼 없이 창문 틈새로 들어와 기침감기가 걸리곤 했다. 하지만 ‘교화’란 원래 이처럼 고단하고 초라하며 단초한 것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대추차를 아무리 달여 먹어도 감기와 한기를 물리칠 수 없어 시장에서 비닐을 사다 바람을 막으니 조용한 낮에 바람이 머물다 빠지며 버스럭거리는 소리만 들렸다. 모처럼 이웃 절의 스님도 차 한 잔 마시러 왔다가 “어이쿠, 추워서 골병 들겠네” 하며 차를 마시는 둥 마는 둥 잠시 머물다 가버렸다.

그렇게 겨울이 가고 다시 봄이 왔다. 아파트 생활관 구석에도 푸른색 돌나물이 옹기종기 싹이 났다. 아내는 그걸 뜯어 씻은 뒤 참기름·간장·고추 등 양념을 넣어 맛있는 돌나물 무침을 만들었다. 그러곤 암으로 고생하는 이웃의 젊은 아낙에게 남편과 세 아이를 위해서라도 건강을 잘 챙기라며 죽과 함께 갖다 줬다. 그렇게 이웃과 거리를 좁히며 충청도에서 10여 년을 살았다.

며칠 전 점심 무렵 모퉁이 길을 돌다 보니 언뜻 돌나물꽃이 연초록별처럼 피어 있었다. 해마다 응달진 곳에 생긋하게 돋아나는 그것을 보면 그때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가곤 한다.

지난 주말 아내는 엉겅퀴꽃을 뜯으러 산에 가자고 했다. 사실 난 엉겅퀴와 패랭이를 구별하지 못할 정도로 야생화에는 문외한이었다. 잎에는 손을 대기가 무서울 정도로 가시가 많고, 매혹의 핑크빛 색깔만 같지 모양은 어디 하나 닮은 곳이 없는 그 꽃들을 볼 때면 이름조차 구분하지 못하는 나의 무심함이 미안할 뿐이다. 이름도, 비석도 없는 낯선 묘지 근처에서 아내는 빛 고운 엉겅퀴 두 다발을 모았다. 집에 와서 엉겅퀴의 꽃말을 찾아 보니 ‘근엄’ ‘고독한 사람’이다.

요즘 나는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 이야기를 싫어하는 이상한 결벽증 같은 병에 걸려 있다. 쉬는 날이면 역사소설을 탐독하거나 아니면 그림을 그릴 뿐이다. 꾸미지 않은 역사란 아무리 읽어도 질리지 않는 게 끊임없이 샘솟는 샘물과도 같다. 때로 철저히 외로워도 표시가 나지 않는 사람으로 살며 마음의 빈 구멍을 애써 채우려 하지 않음이 오히려 마음을 숨쉬게 한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세상의 이치는 쉽고 간결해 들어오면 반드시 나가야 하고, 먹으면 그만큼 배설해야 건강하며, 나타나면 또한 소리 없이 들어갈 줄 알아야 세상 사람들에게 욕을 먹지 않는다. 양심에 걸림이 있는 사람은 스스로 자신에게 넘어질 것만 같은 불안이 늘 떠나지 않는다. 일찍이 소통 속에서 평(平)을 찾는다는 말이 내 삶의 위안이 되곤 한다.

얼마 전 미국으로 떠난 선배 교무가 ‘우생마사(牛生馬死)’의 이야기를 메일로 보내왔다. 여름 홍수에 개울이 넘칠 때 소와 말의 주인이 그들을 시험해 볼 요량으로 급물살 속에 그들을 떠내려보냈다. 말은 헤엄을 잘 친다는 평소 생각과 자존심으로 순간적으로 물살을 거슬러 오르려 했다. 처음에는 그럴듯하게 헤엄치는 듯 보였지만 결국 힘이 빠져 물속에 잠겨 죽게 됐다. 반면에 소는 멍청한 듯 허우적거리며 물살을 따라 떠내려 가다가도 조금씩 조금씩 언덕 가까이로 발을 디뎌 결국엔 빠져나온다는 얘기다.

우리네 인생도 이와 같지 않나 싶다. 풀 냄새 가득한 초여름, 엉겅퀴꽃차 한 잔 마셔보는 건 어떨까. 비릿하다 해도 마음은 맑고 산뜻해질 게다.



정은광 원광대학교 미술관 학예사. 미학을 전공했으며 수행과 선그림(禪畵)에 관심이 많다. 저서로 『마음을 소유하지 마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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