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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남 장쭤린, 자신에게 폭탄 던진 ‘소신 테러범’ 훈방

중앙선데이 2014.06.15 01:55 379호 29면 지면보기
1924년 여름 베이다이허(北戴河)에서 요양 중인 장쉐량(오른쪽 넷째)과 전 대총통 리위안훙(오른쪽 첫째). 오른쪽 셋째는 국무총리 주치촨(朱啓鈐). 주씨 집안은 장쉐량 집안과 인연이 깊었다. 주치촨의 여섯째 딸이 장쉐량의 제수였고, 장쉐량과도 보통 사이가 아니었던 다섯째 딸은 장쉐량의 부관과 결혼했다. [사진 김명호]
장쭤린(張作霖·장작림)과 장쉐량(張學良·장학량) 부자(父子)는 한마디로 정의 내리기 어려운 사람들이다. 워낙 인기가 좋다 보니 여자 관계가 복잡했을 뿐, 엉뚱한 사람을 기용해 망신당한 적이 없고, 국민들의 자존심을 손상시키지도 않았다. 후세에 비장미와 즐거운 웃음거리를 선사했을지언정 “뭐 저런 것들이 다 있었는지 모르겠다”며 조롱 당할 짓은 하지 않았다. 신의를 제일로 쳤다. 한번 한 약속은 손해를 보는 한이 있어도 꼭 지켰다. 애국자인 것도 분명했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378>

1917년 가을, 잘생긴 청년이 성무대장군(盛武大將軍) 장쭤린이 타고 가던 마차에 폭탄을 투척했다. 범인이 체포되자 장쭤린이 직접 심문에 나섰다. 연신 목을 어루만지며 범행동기를 물었다. “내가 궁금해 하는 건 하나밖에 없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나를 죽이려 했느냐?” 당당한 답변이 돌아왔다. “나는 혁명당원이다. 공화주의자다. 황제 제도에 반대한다. 장군은 장쉰(張勛·장훈)과 결탁해 복벽(復辟, 물러났던 임금이 다시 왕위에 오름)을 도모했다. 그래서 죽이려고 했다.”

장쭤린은 안도했다. 고개를 한 번 끄덕이더니 다시 물었다. “이유가 그거라면 안심이다. 한 가지만 더 묻겠다. 누구의 사주를 받지 않았느냐? 그런 사람이 있으면 실토해라. 너는 살려주마.” 청년은 발끈했다. “나를 자세히 봐라. 내 키가 7척(尺)이다. 내게 이래라 저래라 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돈 몇 푼 쥐여주며 장군을 죽여 달라고 부탁하는 사람이 있었다면, 이 주먹으로 그놈의 머리통부터 날려 버렸을 거다. 나는 황제 제도를 저주하고 중화민국을 사랑한다. 너희들의 복벽에 대한 환상만 깰 수 있다면 내 목숨은 아깝지 않다.”

보기에 민망했던지, 배석해 있던 측근들이 처형을 재촉했다. 장쭤린은 “내가 아니면 답변할 사람이 없다”며 주변을 진정시켰다. 범인을 향해 입을 열었다. “오해처럼 무서운 것도 없다더니. 내가 복벽을 꾸미는 줄 알았구나. 나는 네가 누구에게 고용된 자객인 줄 알았다. 너는 애국자다. 오해하지 마라. 장쉰은 나의 오랜 친구고 친척일 뿐이다. 나는 그 사람과 복벽 운동을 한 적이 없고, 함께할 생각도 없다. 항간에 떠도는 헛소문 때문에 너도 죽고 나도 죽을 뻔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이것밖에 없다. 이 순간부터 너는 자유의 몸이다. 석방할 테니 돌아가라. 청이 하나 있다. 나가서 조사를 철저히 해 봐라. 내가 복벽을 추진한 게 사실로 드러나면 다시 내게 폭탄을 던져도 좋다. 뭔지는 잘 모르지만, 나도 공화주의자다. 지금 세상에 황제 제도를 부활시키려는 놈은 네 손에 산산조각이 나야 한다.”

1934년 여름 난징(南京)의 진링(金陵)여자대학을 방문한 쑹메이링(오른쪽 둘째)과 장제스. 왼쪽 첫째가 일본군의 난징 대학살을 전 세계에 폭로한 선교사 존 매기(John Magee). 왼쪽 둘째는 총장 우이팡(吳貽芳).
복잡했던 시대에 벌어졌던 일이라 설명이 필요하다. 1916년 6월, 위안스카이(袁世凱·원세개)가 세상을 떠났다. 국무원 총리 돤치루이(段祺瑞·단기서)가 실권을 장악했다. 형식을 싫어하던 돤치루이는 리위안훙(黎元洪·여원홍)을 대총통에 추대했다. 총통부와 국무원은 충돌이 그치지 않았다. 제1차 세계대전 참전 여부를 놓고 극에 달했다. 미국이 연합국 측에 가담하자 돤치루이는 대독(對獨) 선전포고를 주장했다. 국회가 반대하자 리위안훙은 국회 편을 들었다.

남방 최대의 군벌 장쉰은 공화제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황제가 없으면 중국은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다”는, 철저한 복벽주의자였다. 돤치루이와 리위안훙은 장쉰을 같은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혈안이 돼 있었다. 장쉰의 생각은 이들과 달랐다. 이견을 조정한다는 구실로 군대를 몰고 입성해 두 사람을 내쫓고, 복벽을 단행할 심산이었다. 어느 시대건 국민들은 어리석지 않다. 장쉰의 속셈을 꿰뚫고 있었다. 싫다는 딸을 억지로 장쉰의 아들과 결혼시킨 장쭤린이 오해를 받는 건 당연했다.

장쉐량은 아버지보다 더했다. 여자 문제를 포함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일을 한두 번 벌이지 않았다. 생명의 은인 위원터우(于文斗·우문두)에게 사돈을 맺자고 한 장쭤린은 장쉐량이 싫다고 하자 난감했다. “너랑 살 여자가 아니라 내 며느리를 구하는 일”이라고 했지만, 말 같지도 않은 소리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이내 타협안을 제시했다. “위원터우는 이미 세상을 떠났다. 살아 있다면 뭐라고 둘러대기라도 하겠지만 무덤에 대고 사정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한번 가서 만나보기라도 해라.”

1913년 장쉐량은 정자툰(鄭家屯)에 가서 새해를 맞이했다. 훗날 위펑즈(于鳳至·우봉지)는 미국의 병실에서, 병문안 온 쑹메이링(宋美齡·송미령)에게 당시를 회상했다. “정자툰에 온 한칭(漢卿, 장쉐량의 字)은 무슨 마을이 눈 위에 온통 말똥투성이냐며 불평을 해댔다. 그런 한칭이 나는 싫었다. 며칠 지나자 내 말을 잘 들었다. 나를 의지하고 시키는 대로 했다. 하루는 영원히 내 말만 듣겠다며 내 손을 잡아끌었다. 변심하지 않겠다고 하자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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