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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서의 종횡고금 <15> 합리화 외치다 너무 뻣뻣해졌나 … 주술적 믿음에 기대고 싶은 시대

중앙일보 2014.06.14 01:08 종합 23면 지면보기
정재서
이화여대 중문과 교수
자동차를 오래 몰다 팔 때가 되면 느끼는 감정이지만, 중고차 매매상에게 끌려 폐차장으로 향하는 자신의 차를 보면 무언가 연민의 정 같은 것이 일어난다. 오랜 기간 눈이 오나 비가 오나 가족들의 발이 되어 묵묵히 봉사했던 그 차가 비록 쇳덩어리지만 이제 마지막 길을 간다. 그런데 아무 느낌도 없다면 그 사람은 비인간적이라 할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지금 쇳덩어리, 생명 없는 기계에 대해서조차 인간적, 비인간적이라는 표현을 하고 있다. 과거에 우리는 자연과 대화를 했다고 하는데 이제 바야흐로 기계와도 교감을 하는 시점에 온 것인가.



 미로 같은 도서관에 가서 책을 찾을 때나 난장판인 연구실에서 자료를 찾을 때도 신기한 현상이 있는데 내가 원하는 그 책이나 자료가 제 발로 걸어 나오듯이 눈앞에 턱 나타나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필자만 그런 줄 알았더니 의사 친구 한 명도 그런 경험을 자주 한다고 털어놓았다. 그래서 그는 아예 도서관에 책의 천사가 있어서 공부를 도와주는 것이라 생각한단다. 이쯤 되면 아예 동화를 써라, 타박할 분도 계시겠지만 사실 이러한 주술적 감수성은 고대인이라면 일상적으로 지닌 능력이었다.



 중국의 한대에서 위진남북조에 이르는 시기에는 인간과 하늘이 교감한다는 이른바 ‘천인감응설’이 크게 유행했다. 가령 『수신기(搜神記)』같은 책을 보면, “한나라 경제 3년에 한단 땅에서 개와 돼지가 교미하는 일이 있었다. 이때 조왕이 정도에 어긋난 짓을 하더니 마침내 여섯 나라와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漢景帝三年 邯鄲有狗與?交 是時趙王悖亂 遂與六國反)”처럼 이상한 현상은 모두 하늘의 징조로 해석했다.



 동양이든 서양이든 중세까지는 이 같은 주술적 사유가 우세했지만 근대에 이르러 합리주의적 사고가 대두하면서 탈주술의 시대, 과학의 시대로 진입하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하루아침에 주술적 사유가 소멸되어 합리적 생각으로 대체되는 것은 아니다. 인류학자 탐바이아(J Tambiah)는 우리의 인식구조는 주술적인 것과 합리적인 것이 다중적으로 공존하는 형태라고 주장한다.



 오늘 우리는 지나친 합리화로 인해 메마른 인성에 활력을 넣어주기 위해 오히려 주술적 감수성을 필요로 하는 재주술화의 시대에 살고 있다. 이삼십 년 전만 해도 허황하기 그지없을, “내가 소망하면 온 우주가 그것을 이루도록 도와준다”는 주문이나 다름없는 메시지를 전하는 코엘료의 『연금술사』같은 책이 공전의 베스트셀러가 될 만큼 이 시대는 주술적 감수성을 갈구한다.



 조선시대에 어떤 정승이 자고 일어나 보니 오뉴월인데 갑자기 서리가 내렸더란다. 그 광경을 본 순간 정승의 망건 줄이 툭, 끊어져 버렸다고 한다. 때아닌 서리가 자신의 실정(失政) 탓으로 여겨져 온몸의 피가 얼어붙었고 그로 인해 머리가 댕기며 망건 줄이 끊어지고 만 것이다. 천인감응설이 믿을 만한지는 논외로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에게 도덕적 상상력을 환기시키는 것만으로 족하다. 미증유의 참극을 당해 망지소조(罔知所措·어찌할 바를 모름)하고 있는 이 난국에 정녕 망건 줄이 끊어질 만큼 책임을 통감하는 이 누구인가. 아닌 게 아니라 한여름에 때아닌 우박이 분분히 쏟아져 심란함을 더하는 이 계절임에랴.



정재서 이화여대 중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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