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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지폐의 추억

중앙일보 2014.06.14 00:38 종합 28면 지면보기
신아연
작가
어느 나라, 어느 문화권으로 이동해도 가장 빨리 익히는 것은 돈에 관한 것이지 싶다. 21년 전 호주로 이민 갔을 때도 그랬고, 지난해 한국으로 다시 돌아와서도 잽싸게, 순발력 있게 적응한 것은 단연 ‘돈’, 정확히는 ‘화폐의 가치’였다.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돈은 곧 생존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처음 호주에 정착해서 얼마 동안은 달러가 든 지갑을 열 때마다 나도 모르게 한국 돈으로 환산하게 되더니, 한국에 와서는 거꾸로 ‘호주 돈으로는 얼마구나’ 하고 물건을 살 때 원화 대비 달러로 값어치 계산을 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한국 물가를 체감하게 되자 속절없는 버릇도 이내 사라졌다.



 그러나 한 가지는 아직도 적응이 잘 안 된다.



 호주에서는 은행 창구나 현금자동지급기는 물론이고 상점 등에서 돈을 주고 받을 때 언제나 지폐의 얼굴과 무늬가 같은 방향으로 정리되어 있다. 한국 돈을 예로 들어 말하자면 1만원권의 경우 앞면의 ‘세종대왕’과 뒷면의 ‘혼천의’를 뒤섞지 않고 한 면으로 가지런히 정리해서 주고 받는다는 뜻이다. 5000원권의 ‘율곡’과 1000원 지폐의 ‘퇴계 선생’도 뒷면의 수박과 여치 따위, 산수화에 이마를 부딪혀 ‘기품과 체면’을 잃는 일이 없도록 배려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처음 호주에선 이게 잘 되지 않아 힘들었다. 가령 ‘돈다발’을 들고 은행에 갔다고 치자. 5만원권이든, 1만원권·1000원권이든 창구 직원이 돈을 세기 전에 화투짝 맞추듯 한 장 한 장 지폐의 그림부터 맞추기 시작한다면 차츰차츰 속에서 열이 올라올밖에. 무심코 지폐의 앞뒷장을 섞어 가지고 갔다간 하냥없이 기다리며 꼼짝없이 ‘벌을 서야’ 하는 것이다.



 그 나라에 살 때 ‘뭉칫돈’을 예금하려다 예의 ‘그림 맞추기’에 딱 걸려버린 적이 있다. 그런데 그 순간 내면에서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시선은 은행원의 손동작에서 비끼질 못하면서도 생각은 어느 새 ‘지폐의 추억’ 속으로 빠져드는 게 아닌가. 반찬 값 한 푼 두 푼 아낀 것, 사고 싶은 것 꾹 참은 일, 외식 거르고 ‘굳힌’ 돈에 대한 기억서껀 모아진 돈의 궤적에 나만의 사연과, 에피소드와, 스토리와, 서사가 되살아나며 새삼 살뜰한 마음이 들었다.



 돈이 나와 더불어, 나의 시공간과 더불어 개체적이고 주체적이며 인격적으로 다가왔다고 할까. 돈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한 장 한 장 다리미로 펴는 사람도 있다지만, 다림질을 하든, 무늬를 맞추든 돈 자체를 소중히 다루는 과정에서 돈에 대한 성찰을 얻은 건 다소 뜻밖의 경험이었다.



 그랬는데 다시 한국에 돌아와 앞뒷면이 뒤죽박죽인 지폐를 주고 받으니 손길도, 마음도 그저 무심해지고, 가지런한 데서 읽혀지던 정성도, 여유도 느껴지지 않는다. 무조건 많으면 좋은, 질보다 양, 욕망의 수단으로 돈의 가치가 여겨질 뿐 그 돈에 얽힌 나와 너, 우리와 그들의 땀과, 노력과, 수고를 서로 헤아리고 돌아볼 겨를이 없다.



 독일의 사회학자 게오르크 짐멜의 『돈에 대한 성찰』이란 책에는 돈이 자극하는 감정과 신에 대한 감정이 심리학적으로 매우 유사하다는 말이 나온다. 심리적 안정과 조화, 평온과 기쁨을 주는 대상으로 신과 돈의 표상을 함께 사유한 것이 흥미롭다.



 실존적 불안에 봉착한 영혼이 절박하게 신을 찾는 것처럼 현대인들은 돈을 많이 벌고 재물을 축적하는 것으로 생의 목표를 삼아 불안심리에서 벗어나려 한다. 그 때문에 검고 불투명한 돈, 떳떳하지 못한 과거력이나 지저분한 흔적 때문에 ‘세탁’을 해야 할 지경의 ‘구린’ 돈도 마다하지 않는다.



 ‘세월호’ 이후 ‘돈보다 안전, 돈보다 원칙, 돈보다 생명, 돈보다 사람’이라는 구호가 넘치고 있다. 구호가 구호에 그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지금 당장 지갑 안의 지폐를 앞뒤 맞춰 정리하는 것부터 해보자. 타인과 돈을 주고 받을 때, 은행에서 현금인출기에 돈을 넣을 때도 그 점을 한번 신경 써 보자. 좀 엉뚱한가?



 ‘돈은 최상의 종이자 최악의 주인’이라는 말도 있듯이 돈은 우리와 일평생 궤적을 함께한다. 돈 자체를 소중히 다루는 일은 그래서 의미 있다. 경험해 봐서 안다.



신아연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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