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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촌 아이들 말 못 할 아픔 … 함께 뻥 찼다

중앙일보 2014.06.12 00:23 종합 28면 지면보기
2014 월드비전컵에 참가한 한국 대표 청소년들이 각국 대표들과 헤시피 경기장에서 브라질 월드컵 공인구 브라주카를 들고 포즈를 취했다. 주황색 티셔츠를 입은 한국 대표는 왼쪽부터 남한산·서준석군, 윤다미양, 김동한군. [사진 월드비전]


“어릴 땐 가끔 공원에서 아빠랑 축구도 했어요. 그거 말고 다른 기억은 없어요.”

브라질서 12개국‘희망 월드컵’
가정폭력·노동착취 등 상처 씻고
월드비전 주최 축구대회서 우정
"눈빛·손짓 다 통해 … 꿈 키울래요"



 축구선수가 꿈인 16세 한산이는 아버지 이야기가 나오자 말문을 잇지 못했다. 어린 시절 가정폭력으로 어머니와 도망 다녀야 했던 한산이에게 아버지에 대한 좋은 기억은 별로 없다. 하지만 어린 시절 아버지와 공원에서 축구를 하던 시간만큼은 한산이에게 소중한 추억이다. 한산이가 축구에 애착을 갖게 된 것도 그 때문이다. “아빠가 예전에 축구 잘한다고 칭찬을 많이 해줬거든요. 열심히 해서 칭찬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 평생 고생만 한 엄마에게 보답도 하고 싶고요.” 한산이에게 축구가 남다를 수밖에 없는 이유다.



 한산이에게 아버지가 애증의 대상이라면 15세 준석이에게 아버지는 보살펴야 할 존재다. 아버지와 단둘이 살고 있는 준석이는 아버지의 아침식사를 챙기는 일로 하루를 시작한다. 준석이가 태어나기 전부터 몸이 불편했던 아버지는 최근 투석까지 받고 있다. 어머니는 준석이가 5세 되던 해 아버지와 이혼하고 떠났다. 방과 후 학원이나 PC방으로 향하는 친구들과 달리 준석이는 곧장 집으로 간다. “나가서 놀려면 돈이 들잖아요. 그냥 집에서 TV 보고 누워 있는 게 시간도 빨리 가고 좋아요.” 너무 일찍 철이 든 준석이의 유일한 오락거리는 일주일에 한 번 인근 복지관에서 친구들과 하는 축구다. 축구를 할 때만큼은 준석이도 여느 또래처럼 활발한 15세 소년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월드컵을 한 달 남짓 앞둔 지난 5월 중순 브라질 헤시피에서 2014 월드비전컵이 펼쳐졌다. 월드비전컵은 국제 NGO단체 월드비전 주최로 전 세계 청소년들이 모여 자국 청소년들이 처한 어려운 현실을 공유하며 우정을 나누는 축구대회다. 월드컵을 기념해 올해 처음 열린 대회에는 몽골·캐나다·에티오피아 등 12개국 200여 명의 청소년이 참가했다. 한국에서는 치열한 선발과정을 거쳐 한산이와 준석이를 비롯, 김동한(16)군·윤다미(15)양 등 4명이 참가했다. 모두 한부모가정의 아이들이다.



 헤시피는 브라질 3대 도시로 명문 프로축구 구단이 3개나 있을 만큼 축구 열기가 뜨겁다. 한국에서 헤시피까지 가는 길은 멀고 험난했다. 30시간의 비행에 이어 2시간 가량 험한 산길을 달린 후에야 대회 장소인 캠프에 도착할 수 있었다. 힘든 여정에도 아이들의 표정은 밝았다. 동한이는 “다른 나라 아이들이랑 빨리 친해져 함께 축구도 하고 놀고 싶다”며 기대를 감추지 못했다.



 대회에 참가한 아이들은 가정폭력·마약·노동착취 등 저마다 상처와 아픔을 안고 있었다. 브라질 대표로 참가한 아낑(13) 역시 노동착취에 시달리는 소년이다. 아낑은 헤시피 북쪽의 파벨라(대도시 대규모 빈민가)에서 살고 있다. 다른 파벨라와 마찬가지로 아낑이 살고 있는 동네 역시 마약거래와 폭력·성매매 등이 일상과 다름없다.



아낑은 10세 되던 해부터 어머니 권유로 종이봉투를 만들었다. 방과 후 곧장 공장으로 가 오후 2시부터 밤 늦게까지 종이를 접고 풀칠을 했다. 학교를 가지 않는 주말엔 더 많은 봉투를 만들어야 했다. 그렇게 일주일 동안 일을 하고 받는 돈은 고작 40레알(1만8000원) 남짓이다. 어려운 가정 환경 속에서도 아낑이 학업의 끈을 놓지 않는 이유는 바로 꿈 때문이다. “여기서 학교를 그만두면 더 나은 삶을 살 수 없어요. 공부를 더 열심히 해서 변호사가 되고 싶어요.”



 각자의 어려움을 서로 공유하는 토론을 마친 후 아이들을 금세 친해지기 시작했다. 이미 마음이 통한 아이들에게 언어는 더는 장애물이 아니었다. 출국 전 다른 나라 아이들과의 의사소통 문제를 걱정하던 다미는 “눈빛과 손짓으로 서로 다 통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대회는 국적과 상관없이 우정·신뢰 등 8개팀으로 나눠 토너먼트로 진행됐다. 한국은 호주 아이들과 함께 ‘희망’팀에 배정됐다. 대회 첫날 희망팀은 독일과 브라질 아이들로 구성된 우승후보 평등팀에 9대1로 참패를 당했다. 한산이가 부상으로 제대로 뛰지 못한 게 패인이었다. 대회 최종 우승은 브라질 아이들로만 구성된 신뢰팀이 차지했다.



 승패는 갈렸지만 아이들간의 우정은 더 두터워졌다. 대회가 끝나고 아이들은 늦게까지 경기장에 남아 함께 사진을 찍고 티셔츠를 교환했다. 브라질 월드비전 주앙 디니즈 회장은 “이번 행사는 각국의 아이들이 축구를 통해 우정을 쌓는 자리”라며 “일회성 행사에 그치지 않고 앞으로도 아동 인권을 위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연구할 것”이라고 말했다. (월드비전 국내아동 정기후원 02-2078-7000)



헤시피=고석승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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