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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Report] 길이 488m 이 배, 한국 조선의 구원투수

중앙일보 2014.06.12 00:02 경제 2면 지면보기
삼성중공업이 로열더치셸의 주문을 받아 만든 천연가스 생산·저장·하역 설비(FLNG)인 ‘프리루드’. 최초의 FLNG인 이 배는 바닥 면적만 축구장 4개 크기로, 해상 물체 중에선 세계 최대 규모다. [사진 삼성중공업]


대우조선해양 송하동(49) 프로젝트 운영1부장은 브라질 월드컵을 손꼽아 기다린다. 축구팬이어서만이 아니다. 이 회사가 만든 부유식 액화천연가스 저장·재기화 설비(LNG-FSRU)가 11일 브라질 동남부 구아나바라에서 가동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이 선박은 바다 위에 뜬 채로 영하 136도로 냉각된 천연가스를 다시 기체로 만들어주는 설비다. 송 부장은 “여기서 나온 천연가스가 월드컵 때 전력 생산에 쓰인다”며 “월드컵을 계기로 우리의 앞선 기술력을 선보이게 된 셈”이라고 자랑했다.

FLNG 시장 2020년까지 70조 규모
중국·일본 따돌리고 세계 첫 제작
대우조선 LNG-FSRU는 브라질로
가스 캐며 월드컵 기간 전력 생산



 이 배의 본격 가동이 한국 조선업에서 남다른 이유는 또 있다. 긴 불황을 뚫고 가고 있는 한국 조선사를 앞으로 먹여 살릴 구세주는 화물이 아니라 액화천연가스(LNG)기 때문이다. 특히 바다 위 가스 공장인 FLNG에는 2020년까지 70조원의 자금이 몰릴 것으로 전망된다. 부유식 LNG 생산·저장·하역 설비를 뜻하는 FLNG는 LNG-FSRU의 형님 격으로, LNG를 캐내는 일까지 한꺼번에 처리한다.



부진한 조선업계 … 중국 수주량의 26%



 매월 초 조선업계의 신경이 곤두선다. 영국의 분석기관 클라크슨 리서치의 수주 현황 집계·발표가 있기 때문이다. 지난달 초 나온 한국 조선업의 올 4월 성적표는 충격이었다. 한국의 수주량은 29만CGT로 중국의 26%에 불과했다. CGT는 선박 무게에 작업 난이도 등을 반영해 산출하는 단위다. 중국을 양으로 이기는 건 이미 물 건너간 일. 그런데 일본에도 뒤졌다. 일본의 4월 수주량은 60만CGT다. 한국은 한참 처지는 3등이었다. 다행히 5월에는 2위로 복귀하긴 했다.



 악재는 또 있다. 삼성중공업은 올 1분기 3625억원의 영업적자를 냈다. 호주와 나이지리아에서 생긴 손실이 7600억원에 달했다. 모두 FLNG의 사촌쯤 되는 설비에서 손해가 났다. 저가 수주와 잦은 설계 변경으로 인한 비용 증가 때문이다. 주식시장은 냉정했다. 현대중공업·삼성중공업·대우조선해양 등 조선 3사의 시가총액은 올 들어 9조원 가까이 줄었다.





 우울하지만 한국 조선사는 울지 않는다. 믿는 구석은 두 가지다. 첫째는 한국 조선업이 상대적으로 앞서 있는 대형 선박을 중심으로 배 값이 오르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는 클라크슨 지표의 착시다. 전통적인 선박 중심 데이터여서 한국 조선사가 공을 들이는 해양플랜트의 가치가 충분히 반영되지 않는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기대를 받는 것은 역시 LNG를 중심으로 한 복합선박인 FLNG다. FLNG는 큰 건 수주액이 3조원을 넘고 중간 정도 크기만 돼도 1조5000억원에 이른다. 대형 컨테이너선 10대와 맞먹는다.



 시장은 이제 막 개화하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13개 FLNG 프로젝트가 추진 중이고 올해 입찰이 예고된 프로젝트만 4곳이다. 에너지 시장 분석기관인 더글러스웨스트우드는 2020년까지 FLNG 프로젝트 투자금액이 650억 달러(약 70조원)에 달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최광식 하이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삼성중공업 손실 등은 새로운 도전에 따른 성장통”이라고 해석했다.



 혹시 한국의 자기 위안은 아닐까. 세계적 에너지 기업 로열더치셸의 피터 보조 회장의 행보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듯하다. 지난해 10월 방한한 그는 삼성중공업 거제조선소에까지 가서 로열더치셸이 주문한 FLNG인 ‘프리루드’ 건조를 챙겼다. 그는 당시 “FLNG는 25년간 고민한 결과이자, 에너지 개발의 새 역사”라고 말했다. 이상우 하나대투증권 애널리스트는 “올해 대형 조선사 실적의 방향은 FLNG로 시작해 FLNG로 끝날 것”이라고 단언한다.



가스 수요 늘고 신기술로 건조 기간 줄여



 한국 조선의 미래를 어떻게 보든, 가야 할 길이 FLNG라는 것에 토를 다는 조선 전문가는 거의 없다. FLNG로 인해 완전히 새로운 판이 시작되고 있기 때문이다. 일단 이 배는 크고 복잡해 아무나 못 만든다. 삼성중공업이 만든 프리루드는 길이 488m, 폭 74m, 높이 110m다. 바닥 면적만 축구장 4개에 해당한다. FLNG는 조선업체의 고객도 바꿨다. 해운사가 아닌 로열더치셸·페트로나스 등 에너지업체가 주 고객이다. 조선업계 관계자는 “앞으로 한국 조선업에선 해운업만큼 에너지 산업의 시황이 중요해질 것”이라고 말한다.



 이처럼 새 시장에선 선점한 사람이 유리하기 마련이다. 지금까지 FLNG를 만든 곳은 한국뿐이다. 중국 조선업의 수준은 아직은 질보다 양에 치우쳐 있다. 게다가 ‘기술의 일본’도 이 배를 못 만든다. 표준화의 역설이 낳은 결과다. 일본 조선산업은 1970년대 말까지 부동의 1위였다. 일본은 이 무렵 설계를 표준화했다. 표준화되니 대량 생산이 가능했다. 대신 설계 인력은 필요 없어졌다. 당연히 구조조정 1순위가 됐다. 게다가 오일 쇼크로 인한 조선업 불황이 오면서 일본 대학에선 조선공학과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표준화의 시대는 오래가지 못했다. 90년대 들어 고부가가치 바람이 불었다. LNG선·드릴십(시추선) 등이다. 모두 기존과는 다른 배였다. 새로운 설계가 필요했다. 시추 장소에 따른 특화·맞춤 설계도 필요했다. 일본은 그저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2012년 기준 한국 조선업의 세계 해양플랜트 시장 점유율은 34%다. 중국 15%, 일본은 고작 1%다. 그사이 한국 조선업은 기술에서도 앞서갔다. 삼성중공업의 ‘하프십 합체’ 기술로 FLNG의 건조 기간을 두 달 줄였다. 바다 위에 떠 있는 ‘플로팅 도크’를 활용해 100층짜리 빌딩을 옆으로 뉘어서 반씩 만든 후 붙였다고 생각하면 쉽다.



 예상치 못한 호재도 생겼다. 올 2월 시작된 우크라이나 사태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관련 문제가 생길 때마다 유럽에 대한 천연가스 공급 중단을 무기로 사용했다. 러시아 천연가스 파이프의 80%는 우크라이나를 거쳐 유럽으로 간다. 유럽 정상들은 지난 3월 미국에 천연가스 수출 확대를 요청했다. 미국은 미래를 위해 천연가스 수출을 제한적으로만 허용하고 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천연가스 수출 촉진법 처리가 미국 의회에서 속도를 내고 있는 분위기다. 가스 산업이 커질수록 FLNG의 수요도 커지게 된다. 이충재 IBK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우크라이나 나비 효과로 천연가스 산업이 더 활기를 띨 가능성이 커졌다”고 분석했다.



선박 윗부분 ‘공장’ 설계 기술 구축이 숙제



 올 4월 방한한 장 피에르 벨 프랑스 상원의장은 서울에서 박근혜 대통령 등을 만나고 바로 거제도로 갔다. 거제도에는 프랑스인 450여 명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 대부분은 프랑스 엔지니어링업체 테크닙의 직원과 가족이다. 테크닙은 삼성중공업과 짝을 이뤄 FLNG를 만들고 있다. 온통 장밋빛인 시장은 없다. FLNG도 마찬가지다. 테크닙 직원이 거제도에 상주해야 하는 현실이 그렇다. 전통적인 배에 해당하는 FLNG의 하부를 한국 조선사가 설계하고 만든다면, 공장에 해당하는 부분은 테크닙의 설계가 기본이 된다. 베낄 참고서가 없는 FLNG에선 특히 설계 능력이 중요하다. 그래서 발주 전에 1년이 넘게 기초 설계 협의가 이뤄지기도 한다. 아직 한국 조선은 배의 상부, 가스 공장에 해당하는 부분까지 손에 넣지는 못하고 있다. 각종 부품에 대한 국산화율도 20% 수준이다.



 일본도 다시 힘을 내고 있다. 대형 해양플랜트를 직접 발주·운영하는 일본의 모덱과 인펙스 같은 업체가 경험을 축적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2020년까지 2조5000억 엔 규모의 해양개발 시장을 창출하겠다며 해양플랜트 산업에 대한 육성에 나섰다. 조선업체 관계자는 “FLNG는 근본적으로 복합설비여서 조선소 한 곳이 전부를 만들 수는 없다”며 “앞으로 한국 조선이 더 키워야 할 능력은 제조기술이 아니라 복잡하고 다양한 참여 기업을 지휘·통솔하는 리더십”이라고 말했다.



김영훈·이상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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