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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클립] Special Knowledge <539> 중국 정치의 전당, 인민대회당

중앙일보 2014.06.09 00:37 경제 10면 지면보기
신경진 기자
베이징 천안문 광장 서쪽의 인민대회당은 중국 ‘정치 1번지’로 불린다. 굵직한 정치행사가 열려서다. 매해 3월마다 13억 인구를 대표하는 전국인민대표 3000여 명과 전국정치협상회의 대표 2200여 명이 모여 ‘양회(兩會)’를 개최한다. 중국공산당은 5년마다 2200여 명의 대표가 모여 전국대표자대회를 열고 새로운 지도부를 선출한다. ‘정치의 전당’ 인민대회당에 얽힌 이야기다.


1만 명 수용 지상 최대 회의장 … 설계 1년 만에 초고속 완공

신경진 기자



10개월 만에 세계 최대 회의장 건설



인민대회당은 1959년 9월 3일 준공됐다. 신중국 건국 10주년을 기념하는 헌정물이다. 국제정치의 산물이기도 하다. 건축가 장보(張)의 회고다.



 “1958년 대약진 운동이 시작됐다. 중·소 관계가 악화됐다. 흐루쇼프는 ‘대약진 운동’을 조롱했다. 돌파구가 필요했다. 대형 프로젝트를 성공시켜 중국의 실력을 증명해야 했다.”



2012년 11월 8일 중국공산당 제18기 전국대표자대회가 열린 인민대회당의 대회의장 전경. [중앙포토]


 중국은 베이징 10대 건축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인민대회당은 그중 최대 난제였다. 건국 10주년에 맞추려면 시간이 급했다. 58년 9월 전국 30대 건축가를 소집했다. 베이징시 인민위원회와 중국건축협회가 나섰다. 량쓰청(梁思成), 장카이지(張開濟), 자오둥르(趙冬日), 우량융(吳良鏞) 등 건축가들이 망라됐다. 주위와 조화를 고려한 6대 방침과 100여 개 설계안이 나왔다. 칭화대, 베이징시 건축설계원, 베이징시 규획국에서 마련한 세 가지 인민대회당 설계안이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에게 제출됐다. 저우 총리는 이를 종합해 중앙정치국에 보고했다. 최종안은 마오쩌둥(毛澤東)이 결정했다. 공사는 속도전이었다. 하루 평균 1만4000명, 최대 3만5000명이 투입됐다. 연면적 15만㎡의 지상 최대 회의장이 탄생했다.



 대회의장은 1만 명 수용이 가능한 폭 76m, 길이 60m, 높이 33m 규모다. 만인대례당(萬人大禮堂)이 공식 명칭이다. 부채꼴 모양의 객석은 1층 3693석, 2층 3515석, 3층 2518석을 갖췄다. 주석대(主席臺)로 불리는 단상은 폭 32m, 높이 18m다. 300~500개의 좌석을 배치할 수 있다. 인민대회당은 곧 중난하이(中南海) 회인당(懷仁堂)을 대체했다. 60년 3월 30일 전인대 2기 2차회의가 이곳에서 열렸다. 정협은 62년 3월 23일 3기 3차 회의부터 거행됐다.



 문화대혁명 10년 동안 홍위병의 ‘주자파(走資派·자본주의 길로 나아가는 집권파)’에 대한 ‘비판투쟁회의’도 인민대회당에서 열렸다. 67년 천이(陳毅) 부총리가 끌려와 수난을 당했다. 저우언라이가 손을 써 가까스로 구출됐다.



 문혁의 청산도 인민대회당에서 이뤄졌다. 홍위병의 핍박 으로 숨진 류사오치(劉少奇) 국가주석의 복권 추도회가 80년 대회의장에서 거행됐다.



 문혁으로 10년간 중단됐던 전인대는 75년 4기 전인대 1차회의부터 재개됐다. 이때 주석단 뒤에 마오쩌둥 초상이 내걸렸다. 인민대회당 준공 후 처음으로 걸린 인물 초상화다. 79년 7월 전인대 5기 2차회의에서 화궈펑(華國鋒) 주석은 자신의 초상화를 마오쩌둥과 함께 걸었다. 대형 초상화 세습에 원로 펑충(彭衝)이 반발했다. “전인대는 국가기구다. 국가의 상징을 거는 게 맞다”고 건의했다. 당이 펑충의 안에 동의했다. 이후 국가 휘장이 지도자 초상을 대신했다. 전인대에 직경 6m 크기의 국가 휘장과 좌우로 10개의 초대형 홍기가 내걸리는 이유다.



300여 개 방에 얽인 스토리



중국을 국빈방문한 요르단 압둘라 국왕의 환영행사에 앞서 의장대가 행진하고 있다. [중앙포토]
연면적 17만1800㎡의 인민대회당에는 300여 개의 방이 있다. 31개 성·시·자치구와 홍콩·마카오·대만의 전용 청(廳)을 포함해서다. 모두 살아 있는 역사의 현장이었다.



① 금색대청(金色大廳) : 인민대회당 제1청으로 불린다. 정식 명칭은 ‘3층 중앙대청’이다. 화려한 대들보의 조각과 그림은 황실 분위기를 재현했다. 2009년 11월 17일 중국을 방문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을 위한 국빈 만찬이 이곳에서 거행됐다. 해마다 이곳에서 열리는 총리 기자회견은 93년 정례화됐다. 정치 행사가 없을 때에도 금색대청은 대중에 개방된다.



② 118호실 : 마오쩌둥이 가장 좋아한 방이다. 대회의장 단상과 가장 가까운 방이어서다. 71년 9월 13일 린뱌오(林彪)의 쿠데타와 탈출을 보고받은 마오쩌둥이 이곳으로 피신했다. 문혁 4인방의 전성기였던 73년 중국공산당 10차 당대회에 마오가 참석할 수 있었던 것도 118호실 덕이다. 4인방 통제를 위해 저우가 산소 공급 시설을 갖춘 통로 및 각종 의료장비를 이곳에 설치해서다.



③ 동대청(東大廳) : 1층에 있다. 90년대부터 중국의 집단지도자로 불리는 정치국 상무위원이 첫선을 보이는 장소다. 원로들의 추도회 장소로도 줄곧 사용된다. 저우언라이·후야오방(胡耀邦)·예젠잉(葉劍英)이 모두 이곳에서 추도회를 가졌다.



④ 대만청(臺灣廳) : 저우언라이가 만들었다. 72년 2월 방중한 닉슨 미국 대통령과의 ‘미·중 커뮤니케’ 담판이 계기였다. 문건 작성의 최대 난제는 대만문제였다. 저우는 인민대회당에 대만청이 필요함을 절감했다. 현재 1층에 위치한 대만청은 본래 저장청(浙江廳)이었다. 린뱌오가 통상 사무를 보던 장소다. 72년 9월 2층에 대만청을 마련했다. 저우가 보기에 왜소했다. 1층의 저장청과 교체를 지시했다. 1층의 저장청이 대회의장과 가까운 요지여서다. 미국에 거주하던 대만학자 리난슝(李南雄)을 만난 저우는 “장제스(蔣介石)는 저장 사람이다. 그는 지금 대만을 통치하고 있다. 저장청을 대만청으로 바꾼 이유다”라고 말했다. 76년 1월 저우언라이 총리가 사망했다. 부인 덩잉차오(鄧穎超)는 대만청에서 저우의 유골이 하루 동안 머물도록 했다. 최근 사망한 뤄칭창(羅靑長) 당시 국무원 부비서장은 “덩잉차오는 총리가 죽을 때까지 대만 문제에 매달렸음을 잘 알고 있었다. 총리가 이곳에서 잠시 쉬었다 가기를 원했다”고 회상했다.



⑤ 홍콩청(香港廳) : 홍콩의 주권 반환을 50일 남겨둔 97년 5월 12일 선을 보였다. 홍콩 재벌 훠잉둥(<970D>英東)의 헌금으로 조성했다. 홍콩청은 본래 인민대회당 서회의실이었다. 면적 1728㎡로 인민대회당 지방청 가운데 가장 넓다. 홍콩인들이 주로 임대해 사용한다. 2005년 도널드 창 홍콩특별구 행정수반 취임식이 거행됐다.



⑥ 푸젠청(福建廳) : 정상회담장으로 애용된다. 외국 정상의 공식 환영행사가 주로 1층 북대청에서 거행되기 때문이다. 71년 9월 저우언라이는 푸젠청에서 불면의 밤을 보내며 린뱌오 모반사건의 처리를 총지휘했다. 82년 9월 24일 덩샤오핑은 이곳에서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와 홍콩의 미래를 놓고 담판을 벌였다.



인민대회당 예술품 중 인물화가 없는 이유



기자회견을 위해 금색대청에 입장하고 있는 원자바오 전 중국 총리. [중앙포토]
인민대회당은 중국 예술작품의 보고다. 서화 작품만 1000점에 이른다. 동대청 벽에 걸린 초대형 산수화 ‘유연금추도(幽燕金秋圖)’는 중국의 국가이미지로 불린다. 2012년 11월 15일 시진핑(習近平)을 위시한 7인의 중국 5세대 지도부가 세계 언론과 첫 대면한 사진의 배경이 됐던 그림이다. 폭 16m, 높이 3m 크기로 허우더창(侯德昌·80)이 1994년 마오쩌둥의 사(詞) ‘파도가 모래를 씻다, 베이다이허(浪淘沙 北戴河)’ 중 한 구절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각 지방청은 각 지방정부가 디자인과 장식을 책임진다. 각 지방은 매해 양회를 앞두고 실내장식을 바꿔 이미지 쇄신을 도모한다. 문혁 당시 옛 사상·문화·풍속·습관을 일컫는 4구(四舊) 철폐 운동에 따라 장식품이 대거 소실됐다. 이후 79년과 84년 두 차례에 걸쳐 대대적으로 복구했다.



 인민대회당의 작품은 크다. 초대형 피아노(길이 4.4m, 폭 1.72m)를 비롯해 무게 7000㎏의 비취옥석 조각 등 특대형 작품 일색이다. 샹들리에도 무게가 2.5t에 이른다.



 인민대회당의 그림들은 산수화나 사군자, 화조도가 대부분이다. 인물화가 거의 없다. 특히 정치 지도자나 현대 인물은 더더욱 찾아볼 수 없다. 이는 준공 초에 뿌리내린 관례다. 당시 후난청(湖南廳)을 책임진 샤지선(夏紀愼·84)은 ‘후난에 온 마오 주석의 농민운동 고찰’이란 제목의 마오쩌둥 유화를 걸었다. 첫 순시를 돌던 마오쩌둥이 “인물화를 걸지 말라”고 지시했기 때문이다.



 인민대회당에는 서예 작품도 많다. 금색대청의 ‘중화송(中華頌)’이 가장 유명하다. 동대청의 ‘도사오산(到韶山)’, 마카오청의 ‘구구귀자도(九九歸字圖)’도 유명하다.



2008년 70여 개국 정상 환영만찬 거행한 연회청



국연(國宴)으로 불리는 국빈만찬이 열리는 연회청은 인민대회당 북측 2층에 위치한다. 7000㎡ 면적으로 5000명을 수용하는 연회와 1만 명이 참가하는 칵테일 파티가 가능하다. 국연의 장관은 종업원들이 음식을 서빙할 때다. 군악대의 연주소리가 일순 장중하게 커진다. 분위기를 띄우고 식기 부딪치는 소리를 감추기 위해서다.



 국빈만찬의 좌석 배치는 심오한 학문과 같다. 의전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2008년 8월 8일 낮 연회청에서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에 참석한 70여 개국 정부 수반을 위해 후진타오 주석이 초대형 연회를 마련했다. 역사상 전무후무한 장관이었다. 모든 외빈이 납득하게 좌석을 배치해야 했다. 30명이 앉을 수 있는 대형 테이블 9개가 배치됐다. 식탁 번호는 없었다. 서열로 오해할 수 있어서다. 생화로 이름을 대신했다. 모란·재스민·난초·월계·진달래·연꽃·동백·계수나무꽃·부용이 식탁 중앙을 장식했다. 후 주석이 중앙에, 나머지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이 식탁별로 호스트 석에 앉았다. 헤드테이블에는 미국·러시아·일본 정상 부부와 자크 로게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 부부 등이 앉았다. 이명박 대통령은 서열 2위 우방궈(吳邦國) 전인대 위원장 테이블에 앉았다.



차관급 소개서 있어야 12만~15만 위안에 임대 가능



인민대회당은 59년 준공 후 주당 1~2일 대중에 개방됐다. 문혁 기간에는 개방이 중단됐다. 79년 1월 27일 춘절 기념행사가 폐쇄 15년 만에 열렸다. 이 자리에서 덩잉차오가 인민대회당의 대외 개방을 선포했다. 최근에는 ‘아바타’ ‘트랜스포머’의 시사회도 인민대회당에서 열렸다.



 인민대회당 임대 사용을 심사하는 권한은 인민대회당 관리국이 갖고 있다. 지방청의 임대료는 하루 12만~15만 위안(약 2002만~2503만원) 정도다. 이는 장소 임대료로, 식사 및 각종 장비 사용료는 별도다. 돈만 낸다고 모두 임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신청 절차는 간단하지 않다. 기업 관련 자료, 초청자 명단 등이 필요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추천서다. 부부장(차관급) 이상의 소개서가 필수다. 관리국 직원이 “일반 기업의 신청서는 70~80%가 거절된다”고 할 정도로 문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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