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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주얼경제사] 18~19세기 1600만 노예 … 세계화의 부끄러운 단면

온라인 중앙일보 2014.06.09 00:02
1 고드프리 메이넬, 『알바네스 호의 노예선실』, 1846년.



세계화는 어떻게 진화했나 ⑦ 대양을 가로지른 노예무역의 참상

좁은 공간에, 짧은 머리에 옷도 별로 걸치지 않은 흑인들이 가득하다. 나무로 된 바닥과 기둥, 그리고 천장(갑판)에서 내려오는 빛줄기로 볼 때 선박의 갑판 아래 풍경으로 보인다. 나무통과 다른 화물들 사이사이로 흑인들이 자리 잡고 있다. 아마도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가득 싣고 아메리카 대륙으로 향하는 전형적인 운반선의 모습이라고 추측해 볼 수 있다. 실제로 이렇게 설명을 붙여놓은 역사책도 여럿이다. 이것은 올바른 추측일까? 이 배는 과연 어디로 향하고 있는 걸까?



그림 1을 보자. 의자나 침대와 같은 물품이 보이지 않고 높이가 낮은 공간에 흑인들이 촘촘하게 차 있는 것을 보면 노예를 운반하는 배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이들은 대부분 누워 있거나 앉아서 옆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뒤쪽으로는 두 손을 쳐들고 있는 이의 모습도 보인다. 아무도 손발과 목이 족쇄로 묶여 있지 않은 채 모두가 대체로 자유롭게 행동하고 있다. 참혹한 환경으로 악명 높은 전형적인 노예무역선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다. 이 그림은 어떤 상황을 묘사하고 있을까?



노예무역선을 묘사한 다른 그림을 보자. 그림 2는 영국의 유명화가 윌리엄 터너(J. M. W. Turner)가 1840년에 그린 『노예선』이다. 이 그림에는 ‘다가오는 폭풍 앞에서 죽은 자와 죽어가는 자를 배에서 던지는 노예상인들’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멀리 배가 파도에 흔들리는 모습이 보이고, 그 앞쪽으로 바다에 빠져 물고기의 먹이가 되고 있는 검은 피부의 팔다리와 이들을 묶었던 족쇄가 보인다.



2 윌리엄 터너, 『노예선』, 1840년.
이 그림은 1783년에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한 사건을 묘사한 것이다. 1781년 흑인노예 400명을 싣고 아프리카를 떠나 멀고 먼 중간항로(Middle Passage)를 따라 서인도로 가던 종(Zong) 호에서 항해 도중에 질병이 돌았다. 질병과 영양 부족으로 60명 이상이 이미 죽었고 많은 수가 병에 걸린 상황에서 선장과 선원들은 지극히 잔인한 결정을 내렸다.



사망자와 질병에 걸린 132명을 모두 바다로 던져버린 것이다. 육지에 상륙한 후 사망하거나 항해 중에 질병으로 사망한 노예에 대해서는 보험금이 지급되지 않지만, 항해 중에 다른 ‘화물’(즉 노예)을 구하기 위해 바다에 던져진 노예에 대해선 보험금이 지급되기 때문이었다. 선박 소유주와 보험회사 간의 법적 분쟁 과정에서 이 사건의 진실이 세상에 알려졌고, 사람들은 경제적 이익을 생명보다 앞세운 인간의 잔혹함에 분노하면서 노예무역 금지에 동정적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림의 제작연도가 1840년인 점이 눈에 띈다. 여기서 노예제 금지의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영국은 대항해시대 이래 아프리카로부터 노예를 가장 많이 아메리카 대륙으로 송출한 국가 중 하나였다. 그러나 18세기 후반 노예들의 비참한 상황이 여론을 자극하면서 노예무역 폐지운동이 일어났고, 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와 같은 열정적인 운동가들의 노력에 의해 마침내 1807년에 노예무역 폐지법이 제정되었다. 그러나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노예제가 계속 유지되었기 때문에 노예무역을 실질적으로 금지시키기는 어려웠다. 이에 노예제 자체를 폐지하자는 운동이 전개되었고, 마침내 1838년에 영국은 서인도제도의 노예를 풀어주는 노예해방령을 제정했다.



그렇다면 터너는 왜 1840년에 노예선 그림을 발표했을까? 1838년 이후에도 노예무역이 세계적으로 근절된 것이 아니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영국 해군은 노예를 싣고 운항 중인 다른 국가의 선박을 단속하고 노예를 풀어주는 임무를 수행했다. 그런데 노예선이 항구에 정박해 있을 때에는 단속할 권한이 없었기 때문에 노예선이 출항하기를 기다렸다가 단속에 나섰다. 한편 노예상인은 단속을 피하고 노예 손실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노예들을 바다로 밀어넣는 일이 드물지 않게 발생했다. 결국 영국 해군의 무리한 선택과 노예상인의 탐욕이 여전히 노예를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는 현실을 터너는 고발하고자 했던 것이다.



3 아이작 크뤽섕크, 『노예무역의 금지』, 1792년.
1791년 영국의 노예무역선 리커버리(Recovery) 호의 선장 존 킴버(John Kimber)는 서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들을 가득 싣고 카리브해로 항해를 떠났다. 그 역시 악명 높은 중간항로를 따랐는데, 비좁고 비위생적인 노예 ‘선적’으로 인한 질병과 사망을 막기 위해 노예들에게 옷을 벗은 채로 강제로 춤을 추게 했다. 두 명의 어린 여자노예가 부끄러워 춤추기를 거부하자 킴버 선장은 무자비한 채찍질로 이들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 아이작 크뤽섕크(Issac Cruikshank)의 그림 3은 사악한 웃음을 지으면서 채찍을 들고 서 있는 모습으로 킴버 선장을 묘사한다. 그는 살인죄로 기소되어 재판을 받았지만 결국 무죄로 석방되었다. 불과 10년 전에 발생한 종 호 사건에서는 노예들을 수장시킨 이들이 살인죄로 기소되지 않았지만, 이제는 적어도 노예를 죽인 행위가 살인죄의 대상이 된다는 점만은 명확해졌다. 그만큼 노예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이미 변화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노예가 되어 고향 아프리카를 떠나야만 했던 흑인은 몇 명이나 되었을까? 대항해시대부터 19세기 말까지 아프리카에서 대서양을 건너 아메리카에 도착한 노예는 적어도 1600만 명을 넘었다. 험난한 항해 도중 사망에 이른 노예가 전체 승선노예의 10~20%에 달한 것으로 추정된다. 아프리카를 떠난 인구가 아메리카 도착 인구보다 그만큼 많았다는 뜻이다. 또한 그 이전에 포로가 되거나 유괴되는 과정, 그리고 수감되어 있는 동안에 목숨을 잃은 이도 많다. 이들의 가족이 겪은 고통도 측정하기 어려울 만큼 컸다. 실로 엄청난 인구가 경제적 이익을 위해 지옥 같은 경험을 해야만 했던 것이다.



아메리카에 도착한 노예는 백인들의 플랜테이션에서 사탕수수·담배·면화 등을 재배하거나 금광과 은광에서 채굴을 하는 노동력으로 이용되었다. 이렇게 생산된 물자는 유럽으로 운송되어 소비자에게 판매되거나 정부의 국고를 살찌우는 수단이 되었다. 노예무역의 이익은 직접적으로는 노예상인에게 돌아갔지만, 유럽 국가들의 소비자와 정부도 큰 이득을 얻었던 것이다. 한 추계에 따르면 산업혁명 시기에 영국 전체 국민소득의 약 5%가 노예무역과 서인도 제도의 플랜테이션으로부터 얻은 이익이었다.



그림 1로 돌아가 보자. 그림의 제목은 『알바네스(Albanez) 호의 노예선실』이고, 화가는 영국의 해군 장교인 고드프리 메이넬(Godfrey Meynell)이다. 알바네스 호는 아메리카로 노예를 운반하는 브라질 무역선이었다. 그림이 제작된 1846년은 아메리카 곳곳에서 여전히 노예제가 뿌리 깊게 유지되고 있었던 시기였다. 화가가 소속된 영국 해군선 알바트로스(Albatross) 호가 노예선 알바네스 호를 나포한 뒤 승선하고 있던 300여 명의 노예를 아프리카의 시에라리온으로 돌려보내는 모습을 그림은 묘사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왜 배에 탄 이들이 대체로 편안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는지 알 만하다.



노예무역은 유럽-아프리카-아메리카를 잇는 삼각무역에서 필수불가결한 부분이었다. 역사상 가장 잔인했던 상품인 노예의 교역이 대항해시대와 중상주의시대, 그리고 산업화시대 초기를 잇는 긴 기간에 경제적 세계화를 이끈 중요한 축이었다는 사실은 우리가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인류의 부끄러운 과거다. 그림 1이 제작된 19세기 중반까지도 노예제는 지구상의 여러 지역에서 완강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20세기까지도 노예제의 장막을 걷어내지 못한 지역이 곳곳에 있었다. 그러나 이런 돌부리에도 불구하고 역사의 수레바퀴는 노예제의 완전한 폐지를 향해 끊임없이 굴러가고 있었다. 비록 속도가 충분히 빠르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송병건 서울대 경제학과에서 학·석사 학위를 마친 뒤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경제사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경제사학회 이사를 맡고 있으며 『세계경제사 들어서기』(2013), 『경제사:세계화와 세계경제의 역사』(2012), 『영국 근대화의 재구성』(2008) 등 경제사 관련 다수 저서가 있다.



송병건 성균관대 경제학과 교수 bks21@skku.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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