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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SUNDAY-아산정책연구원 공동기획] 소신·강직 황희 정승도 요즘 같은 청문회 통과 못할 것

중앙선데이 2014.06.08 00:29 378호 15면 지면보기
서울 경복궁 근정전 앞에 배열된 정1품 품계석. 조선시대 영의정이 조회나 하례 등 궁궐 주요 행사 때 서 있었던 자리다. 근정전에는 좌우 12개씩 24개의 품계석이 놓여 있다. 조용철 기자
청백리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재상이 황희다. 그의 정치적 삶은 두문불출(杜門不出·한곳에 박혀 나오지 않음)에서 출발했다. 혼란기였던 여말선초(麗末鮮初·고려 말 조선 초) 새 왕조를 거부하며 경기도 광덕산 기슭 두문동에 숨었던 120여 선비·무인 중 한 명이었다. 나중에 조선에 출사(出仕)한 황희는 출중한 능력을 인정받아 태종·세종·문종에 이르기까지 승승장구했다. 세종 31년(1499년) 실록에는 “너그럽고 후한 데다 분경(紛更·뒤헝클어 고침)을 좋아하지 않고 여론을 잘 진정시켜 참된 재상(眞宰相)이라 불렸다”는 기록이 나온다.

한국문화 대탐사 <17> 재상(宰相)의 자격

황희는 소신과 원칙을 지키는 강직한 선비였다. 1418년 태종이 장남인 세자 양녕을 폐위시키고 3남 충녕(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기로 했을 때다. 당시 이조판서였던 황희는 폐장입유(廢長立幼·장자를 폐하고 아랫사람을 세움)를 반대하는 직언을 했다. 이 일로 황희는 귀양을 떠나게 된다. 성군은 충신을 알아보는 법. 이 사실을 잘 알았지만 세종은 재위 13년(1431년) 황희를 영의정에 발탁했다. 영의정을 지낸 18년 동안 조선의 기틀을 튼튼히 다졌던 황희는 가히 대한민국 총리의 롤모델로도 손색없어 보인다.

하지만 이런 황희에게도 약점은 있었다. 문종 2년 실록에는 뜻밖의 글이 나온다. “성품이 지나치게 관대해 단점이 있었으며, 청렴결백한 지조가 모자라서 자못 청렴하지 못하다는 비난이 있었다.” 황희의 두 얼굴이다.

취임 4년 전인 세종 9년, 황희의 사위 서달이 ‘나를 몰라본다’며 지방 아전을 때려 죽인다. 황희는 맹사성에게 아전 가족을 달래서 사건을 무마해 달라고 부탁하고 담당 관리에게도 청탁했다. 그 일이 들통나 파직 처분을 받는다. 하지만 10여 일 후 세종은 그를 다시 등용한다.

재상에 취임한 뒤에는 아들 문제가 연달아 터졌다. 우선 내섬시(內贍寺)의 여종을 첩으로 삼아 낳은 아들 중생(仲生)이 사고를 쳤다. 중생이 동궁의 금붙이를 훔친 일이 들통났다. 그러자 황희는 “내 아들이 아니다”고 해 버렸다. 황중생은 조중생으로 이름을 바꿨다(세종 22년, 10월 12일).

세종 11년(1429년) 기사에는 “호조의 담당자 정랑 황보신(黃保身) 등이 묵은쌀이 아닌 것을 묵은쌀이라고 성상께 아뢰고는 모두 스스로 거듭 받았습니다”고 했다. 착복 관리 황보신은 황희 본부인의 아들이었다. 믿기지 않는다. 아마 오늘날이라면 총리 청문회에 발도 들여놓지 못할 것이다.

광해군 북인정권, 남인 이원익 파격 발탁
황희의 사례에서 보듯 조선의 영의정도 당연히 완벽할 순 없었다. 그렇다면 조선 재상이 갖춰야 할 덕목은 무엇이었을까. 새 왕조의 이념적 기둥을 세우고 태조 이성계 때 영의정을 지낸 정도전은 『경제문감』에서 재상의 자질과 소업을 네 가지로 정리했다. 정기(正己)·격군(格君)·지인(知人)·처사(處事)가 그것이다.

정기는 자신의 몸을 바르게 하는 것이다. ‘용퇴(勇退·물러남)를 제대로 할 것’이라는 권고가 세부 사항에 포함돼 있다. 격군은 임금을 바르게 하는 것이다. 임금을 도(道)로 이끌고, 옳은 것은 하고 그른 것은 바꾸며 도리를 굽혀 비위를 맞추지 않아야 한다. 지인은 사람을 알아보는 것이다. 강명·정직한 인물 가려 뽑기, 어진 이를 나오게 하고 간사함을 물리치기, 천하의 인재에게 널리 묻기 등이 필요한 덕목이다. 처사는 일을 잘 처리하는 것이다. “한 가지라도 실수가 있게 되면 환란이 일어난다. 옛말에 일을 잘 처리하는 자는 반드시 기미가 있는 곳을 삼갔으니 쉬운 데서 어려움을 도모하고, 미세한 것에서 큰 것을 했다”고 썼다.

정도전이 꼽은 42개 세칙에는 오늘날 우리가 총리에게 바라는 그 모든 게 담겨 있는 듯하다. 대통령을 바르게 이끌고(보좌), 널리 인재를 구하고, 일도 잘하는 것이다.

당쟁이 격렬했던 선조·광해군·인조 3대에 걸쳐 여섯 차례 영의정을 지낸 이원익은 정도전이 제시한 바람직한 재상상의 사표라 할 만하다. 선조 수정실록 10년(1577년) 7월 1일자에는 “(휴가를) 아예 청탁하는 일이 없어 아전들이 성인이라 칭찬했으나 동료들은 비웃었다”는 기록이 있다. 화합형이었던 그는 남인이었음에도 광해군 북인정권의 첫 영의정이 됐다. 광해군은 “영상의 직임은 경이 아니면 안 된다”고 했다. 귀양에서 돌아온 뒤 궁핍한 형편에 대해 『오리선생문집』은 “초가 두어 칸에 비바람도 가리지 못하고 처자들은 하루 걸러 끼니를 먹을 정도로 빈한했다”고 전한다. 반정(反正)으로 왕이 된 인조도 전 정권의 정승이었던 그를 영의정으로 불렀다.

청빈 분야에서 필적할 만한 정승이 또 있다. 태종 때의 권중화. 86세에 기용돼 이듬해 사망했다. 재산으로 늙은 말 한 필과 한 되의 이(蝨)를 남겼다고 한다. 용맹함 때문에 영의정이 된 최연소 재상 이준(李浚)도 있다. 이시애의 난(1467)이 일어나자 세조는 함길도·강원도·평안도·황해도 4도 병마도총사로 임명, 토벌을 명한다. 난을 평정한 이듬해 영의정이 된다. 28세.

모든 재상이 다 훌륭해 뚜렷한 이름을 남기지는 않았다. 『조선지배층연구』(김영모, 1981)에 의하면 515년 동안 168명의 영의정이 있었다. 어떤 이는 왕의 수족으로, 어떤 이는 민심 수습을 위해, 어떤 이는 정치적 이유로 등장한다. 다양한 군상이다. 그들은 더러 어두운 면도 갖고 있었다.

세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은 황보인(皇甫仁)은 어린 단종의 즉위 2년차에 영의정이 된다. 그도 과거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사헌부 감찰 때 동료를 탄핵한 문서를 마음대로 열람해 파직됐고, 우의정 시절 군사훈련 중 추위와 굶주림으로 사람과 말이 죽어 파면됐다. 세종 31년에는 궁궐의 시녀와 음행(淫行)을 한 혐의로 위기에 몰린다. 왕을 모시는 여인을 취한 것이다. 하지만 세종은 “일개 시녀 때문에 재상을 함부로 파직시킬 수 없다”고 했다.

신숙주는 변절의 대명사로 회자된다. 세조 때 좌의정에, 성종 때 영의정에 올랐다(1471년). 『성종실록』은 “경사(經史)에 두루 밝았고 정치를 논함에 있어 항상 대범해 까다롭거나 자질구레하지 않았다”고 평했다. 민의 수렴, 언론 확대, 환관 폐단 척결 등 국가 기강을 바로잡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중국어·일본어·여진어 등 외국어에 능통해 외교에 능력을 발휘했다.

한명회는 어떤가. 수양대군 왕위 찬탈의 주역이었던 그는 세조 12년 영의정이 된다. 그는 『경국대전』을 완성하는 데 기여한다. 법치(法治)로 나아가는 계기를 만든 셈이다. 실록은 “마음속에 항상 국무(國務)를 잊지 않았고 품은 바가 있으면 반드시 아뢰어 건설한 것 또한 많았다”고 기록한다.

조선의 초대 재상 배극렴은 “배천배야(裵川裵野·하천과 들이 모두 배씨 것)”라는 말이 나올 만큼 대지주였다. 그의 임명은 왕조 초기 구세력을 안정시키려는 정치적 포석에 따른 것이기도 했다.

재상들 중에는 좋은 정승도 있고 나쁜 정승도 있다. 어떤 이는 쓸모가 있었고 어떤 이는 아니었지만 대체로 시대적 필요성에 의해 등장했다고 볼 수 있다. 등장한 후에는 나름대로 업적도 남겼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그 정도 인물이면 대체로 무난하다는 ‘합의’를 바탕으로 등장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영의정 평균 3년 재임 … 총리는 1.2년
초기 재상은 왕명에 따라 선발됐지만 간혹 대신의 의견을 물었다. 성종 대엔 대신과 논의를 거쳐 선발했다. 그러다 중종 대에는 시임 대신의 의견을 묻는 ‘천망(薦望) 방식’이 생겼다. 후보를 올려 낙점을 받는 제도다. ‘조선 중기(선조~현종) 3공·6경직의 인사운영’(최동원, 2005)에 따르면 선조~현종 시기 삼정승·육판서의 인사는 80% 가까이 천망에 의해 결정됐다. 당의(당쟁)가 심했던 시기라는 점을 감안하면 반대파의 의견도 들었다는 의미다. 일종의 정치적 타협이자 공론의 반영인 셈이다.

영의정에는 소수의 인물이 장기 재직하기도 했다. 최동원의 연구에 따르면 선조 때 박순은 2272일(6.2년), 유성룡은 1813일(약 5년) 재임했다. 인조 때 윤방은 1852일(5년), 이원익은 1216일(3.4년), 현종 때 정태화는 4135일(11.3년). 영의정의 평균 재임기간은 3년이 조금 넘는다. 영의정에 거듭 기용된 사례도 꽤 된다. 이원익·노수신·윤방 등이 그랬다.

이런 역사적 사례들이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해 주는 것은 무엇일까. 황희 정승을 통해 세종은 “단점만 보지 말고 능력과 함께 전체를 보라”고 말해 주는 것 아닐까. 3년이 넘는 평균 재임기간은 영의정까지 올라온 인물이라면 ‘아껴 쓰라’는 메시지도 담겨 있는 듯하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지금까지 총리는 42명. 그들의 평균 재임기간은 1.2년(사표를 낸 정홍원 총리 제외). 조선시대 3년의 반도 채 안 된다. 무엇보다 ‘왕과 신하들의 소통을 통한 재상 임명’이라는 과정을 음미할 필요가 있다.

어느 때보다 총리의 역할이 중요한 시점이다. 관료사회에 누적돼 온 적폐를 도려내는 한편 원활한 국정 운영을 위해 관료들의 사기를 진작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민주사회에서는 더 이상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재상이 있을 수 없다. 국민을 잘 섬기기 위해 행정 각 부처를 총괄하는 임무를 짊어진 공복일 뿐이다. 국민 역시 완벽한 도덕군자를 기대해서는 안 될 것이다. 장점이 크면 작은 흠결쯤은 덮어 줄 줄도 알아야 능력 있는 사람을 부릴 수 있다. 대통령도 이제 한계가 드러난 수첩을 고집하지 말고 ‘백퍼센트 대한민국’을 위해 널리 인재를 구해야 한다. 만기친람(萬機親覽)에서 벗어나 총리에게 상당 부분 내치의 재량권을 부여하는 것도 국정을 수월하게 운영하는 방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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