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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현의 마음과 세상] ‘렛잇비’가 필요한 시절

중앙선데이 2014.06.08 01:25 378호 22면 지면보기
얼마 전 굴업도란 섬을 다녀왔다. 인천에서 덕적도로 가 다시 배를 타고 들어가는 작은 섬으로 열 가구 남짓 거주하고 있다. 이 섬은 수년 전 모 대기업에서 사들여 골프장 건설을 계획했다가 환경단체 등의 반대로 유명해졌다. 지금도 섬 곳곳에 ‘사유지’란 푯말이 보인다. 굴업도는 나지막한 언덕 양쪽으로 펼쳐지는 바다, 저 멀리 사슴이 멀리서 찾아온 불청객을 빤히 쳐다보는 모습, 고개를 넘을 때마다 완전히 달라지는 풍광이 멋진 곳이다. 더 좋은 점은 시간이 멈춰진 것 같은 조용함과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다. 그런데 그게 의도적으로 그런 것이 아니라 개발 계획이 난항에 부닥친 채 유지된 덕분이란 점이 아이러니컬했다.

우리 사회를 돌아보면 멋진 곳이란 소문만 나면 바로 사람들로 북적이고, 그에 걸맞은 시설들이 들어온다. 지자체는 고용 창출과 관광 개발을 이유로 편의시설을 확충하고 도로를 정비한다. 그러다 보니 여행하기는 편해졌으나 어디를 가든 거기가 거기 같아져 버렸다. 마치 성형수술로 인상이 비슷해진, 이른바 의란성(醫卵性) 쌍둥이가 늘어나는 것같이 말이다.

굴업도는 나름의 사정으로 노래방·횟집 하나 없이 수십 년 된 낡은 집에서 민박을 해야 하는 개발의 외톨이가 되었다. 사실 그것이 이 섬을 찾는 이유가 됐다. 마치 한반도의 분단이 비무장지대란 유래 없는 공간을 만들어냈고 수십 년 동안 출입이 통제되다 보니 자연생태계가 고스란히 보존된 지역이 돼 버린 것과 같다.

일러스트 강일구
굴업도를 보니 불현듯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게 무엇인지 감지됐다. 요즘 발달의 방향은 더 빨리, 더 편하게, 더 효율적인 쪽이다. 최대한 빨리 가야 하고, 조금만 더워지면 에어컨을 틀어 시원해져야 하고, 어디를 가든 평소 살던 것처럼 편안하기를 원한다. 덕분에 책 한 권도 당일 배송 받고, 스마트폰 앱으로 야식을 배달 받는 세상이 되었다. 그러나 빠름과 편안함에 서서히 중독된 우리는 어느새 조금만 늦거나 불편해지거나 힘들게 해야 하는 일을 참지 못하고 쉽게 짜증을 내게 변해 버렸다. 불편함은 위험할 수 있다는 두려움을 자극하는 면이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편안함을 추구하다 보면 이 불편감지센서가 지나치게 예민해져 쉽게 긴장하는 존재가 된다. 사회 시스템은 편안함과 빠름을 제공하는 대신 나머지 시간과 에너지를 일에 쏟게 하며 경쟁을 강화시킨다. 결국 갈수록 바빠지고, 불편함을 참는 것은 점점 더 어려워지며, 짜증을 얼굴에 담고 다니는 것이 현재 우리의 표준군상이 되었다.

불편함에 대한 면역력이 떨어져 어떻게든 빨리 쾌적함의 품 안에 들어가려고 강박적으로 살아온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도리어 불편함에 대한 내성(耐性)을 기르려는 노력이다. 모든 부분이 완벽하고 빠르며 편안해지는 것을 추구하기보다 어떨 때는 불편함을 감수하려고 의도적으로 노력하고 자기계발에 대한 강박에 브레이크를 걸 수 있는 능력이 더 필요하다. 아이가 어느 정도 자라고 나면 무엇을 더해줄까 고민하기보다 해주고 싶은 욕망을 참는 것이 좋은 부모의 역할이다. 우리의 마음도 그렇다. 이제 우리의 정신건강을 위해선 뭔가 새로운 것을 하려는 욕심보다 ‘적극적으로 아무 것도 안 하기’의 마음으로 참고, 그냥 그대로 내버려둬 보는 인내심도 필요하다. 비틀스의 명곡 ‘렛잇비(Let it be)’를 우리말로 번역하면 ‘내버려둬’이다. 지금 필요한 마음의 덕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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