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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현진과 한국 야구 실력, 5년 전 WBC서 알아챘다”

중앙선데이 2014.06.08 01:33 378호 23면 지면보기
지난해 10월 7일(한국시간) LA 다저스타디움에서 열린 내셔널리그 디비전시리즈 3차전 LA 다저스와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경기에 페르난도 발렌수엘라가 시구자로 나섰다. 이날 경기의 선발투수는 류현진이었다. [사진 MLB.com 캡처 화면]
“이미 5년 전 국가 대항전에서 류현진을 직접 보며 철저히 연구한 입장에서 이제 같은 팀 식구가 되니 감개무량하다. 사람 팔자 알 수 없다더니, 아직도 젊디젊은 류현진이 다저스를 위해 26년 만의 월드시리즈 제패를 꼭 이뤄주길 바란다.”

류현진과 한국 야구 실력

1980년대 다저스 소속으로 메이저리그를 쥐락펴락하던 멕시코 출신의 좌완 투수 페르난도 발렌수엘라(53). 그가 다저스의 후배 투수로 활약 중인 류현진에게 거는 기대는 남다르다. 그는 지난 4일 다저스타디움 기자실에서 중앙SUNDAY와 단독 인터뷰를 하고 류현진과 한국 야구에 대해 얘기했다.

그는 “국제 무대에서 직접 경험한 한국팀은 정말 빠르다는 인상을 받았다”며 “그때 20대 초반에 불과하던 류현진도 제구력이 남다른 투수로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고 했다. 발렌수엘라는 2009년 3월 제2회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 멕시코팀의 투수코치를 맡았다. 그에 앞선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결승전에서 8.1이닝 동안 쿠바의 강타선을 2점으로 막은 선발 류현진의 호투에 힘입어 한국이 3-2로 승리, 금메달을 목에 건 사실을 멕시코 선수들에게 상기시키며 대비했다고 소개했다.

결과적으로 멕시코 타선은 류현진을 초반부터 제대로 공략했다. 당시 샌디에이고의 펫코 파크에서 벌어진 WBC 2라운드 첫 경기에서 우승후보로 꼽히던 멕시코는 류현진이 선발 등판한 한국을 상대로 2회 초까지 5안타를 몰아치며 2-0으로 리드, 류현진을 조기에 강판시켰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류현진이 빠진 한국 계투진으로부터 더 이상 추가점을 내지 못한 채 8-2로 역전패하며 3라운드 진출이 좌절됐다.

발렌수엘라는 “한국팀의 장단점을 열심히 메모했지만 메이저리거로 구성된 멕시코가 한국 국내리그 중심의 무명 선수들에게 완패하는 이변의 희생양이 되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고 털어놓았다. “특히 최고의 구위를 자랑하던 에이스 올리버 페레스가 한국팀에 홈런 2개를 내주며 난타당했다. 그때부터 류현진의 존재와 한국 야구의 수준을 알아봤다.”

그는 이어 3년 뒤 제4회 WBC에서의 재대결을 기대하면서 “멕시코가 또다시 류현진의 한국과 만나면 어려운 승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페르니’ ‘엘 토로’(스페인어로 황소)란 애칭으로 불리는 발렌수엘라는 다저스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좌완 전설’로 통한다. 멕시코 소노라주의 소도시 나보호아 출신으로 12남매 가운데 막내인 그는 17년간의 메이저리그 생활에서 173승153패, 방어율 3.54에 삼진 2074개의 혁혁한 기록을 남겼다. 또 81, 88년 두 번이나 월드시리즈 우승을 경험했다.

그는 류현진를 가리켜 “나와 비슷한 점이 적지 않다”고 말했다. “영어를 잘 못하지만 잘생긴 데다 건장한 체형은 물론, 다저스의 외국인 좌완 선발투수에다 강속구보다 컨트롤을 위주로 하는 두뇌 피칭을 구사한다는 게 류현진과 나의 공통점이다.”

인터뷰 말미에 그는 류현진과의 공통점을 하나 더 꼽았다. “류현진도 나도 만약 다른 구단에서 뛰었더라면 LA에서처럼 큰 인기를 얻지 못했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33년 전 발렌수엘라의 빅리그 데뷔엔 행운도 따랐다. 휴스턴 애스트로스와의 개막전 선발로 예정됐던 다저스의 에이스 제리 로스가 하루 전 불의의 부상을 입고 대체 선발이 없는 상황이 벌어졌던 것이다. 토미 라소다 감독은 고심 끝에 20세의 애송이에 불과하던 중간계투용 신인 발렌수엘라를 개막전 ‘땜질 선발’로 지명했다. 타자의 바깥쪽으로 거꾸로 휘어져 나가는 일명 ‘스크루볼’을 앞세운 그는 전국에 생방송된 오프닝 데이에서 2-0으로 완투·완봉승을 거두며 코칭 스태프의 눈도장을 확실히 찍었다.

이후 다섯 차례의 완봉승을 비롯, 시즌 중반까지 8연승을 내달리며 0.50의 환상적인 방어율을 기록했다. 그의 활약은 남부 캘리포니아 지역에서 어렵게 이민생활을 이어가던 멕시칸들을 야구장으로 끌어들였다. 축구와 권투에만 관심을 보이던 멕시코인들은 발렌수엘라의 34번이 새겨진 다저스 유니폼을 사 입고 야구에 열광하기 시작했다.

결국 빅리그 데뷔 첫해이던 81년 13승(7패)의 성적으로 사이영상과 신인왕을 동시에 거머쥐고 뉴욕 양키스와의 월드시리즈에서도 4승2패로 역전 우승하는 보기 드문 진기록을 수립했다. 이후 6년 연속 내셔널리그 올스타로 선정되는 꾸준한 활약을 이어갔다.

촌스러운 외모에 운동선수답지 않게 배가 나온 몸매를 지녔던 그는 영어를 한마디도 모르는 상황에서 “사이 영이 누군지 난 모른다”고 내뱉어 커다란 화제를 부르기도 했다. 전성기 시절 상대팀 타자들은 볼 끝의 움직임이 남달리 뛰어난 그가 선발로 등판하는 날이면 “오늘은 큰 기대를 하면 안 되겠군”이라며 반쯤 경기를 포기하는 경우도 잦았다.

81~90년까지 다저 블루 유니폼을 입고 ‘페르난도 매니어’라는 열풍의 신조어를 탄생시키며 86년 21승, 90년에는 노히트노런의 위업을 각각 달성했다. 그러나 그는 “더 많은 월드시리즈 우승을 이루지 못한 것이 아쉽다”고 말했다. 특히 플레이오프 때마다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벽에 번번이 막혔다고 되돌아보았다. “상대팀이 최고의 유격수 오지 스미스와 명장 화이티 허조그 감독을 보유한 데다 기동력도 남달리 뛰어났던 탓”이었다고 한다.

그는 한때 자신의 첫 직장이자 보금자리였던 다저스와 인연을 끊었던 적도 있었다. 구단에서 세대교체를 모색하던 참에, 그의 기량도 하향 곡선을 그리기 시작하자 91년 양아버지처럼 여기던 라소다 감독은 그에게 LA 에인절스로의 트레이드 통보를 했다. 예상치 못한 충격을 받은 그는 99년엔 다저스 측의 스프링 캠프 초청 제안을 거부했다. “은퇴한 이후에도 10년 이상 다저스타디움이 있는 차이나타운 옆의 샤베스 러빈 협곡을 찾지 않았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그가 떠난 이후 다저스는 수십 년 동안 정상에 오르지 못했다. 이를 가리켜 현지 멕시코인들은 ‘발렌수엘라의 저주’라고도 한다. 그러나 지인들의 충고를 듣고는 결국 친정팀과 화해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그는 현재 라틴계 팬들을 위해 다저스의 홈경기 때마다 TV·라디오 스페인어 해설을 담당하고 있다. 또 매년 한 차례씩 다저스타디움에서 벌어지는 전직 선수 중심의 ‘올드 타이머 경기’에도 꾸준히 참가해 팬서비스를 하고 있다.

인터뷰를 마친 그는 방송중계실로 향하며 “수많은 한국의 야구선수도 나처럼 꾸준히 아메리칸드림을 꾸면 좋겠다”는 말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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