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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경의 마이웨이] 오기로 버틴 30년, 이젠 해외서 주목하는 ‘철의 여인’

중앙선데이 2014.06.08 01:42 378호 24면 지면보기
경기도 안성시에 위치한 작업실 앞마당에서 변숙경 작가가 작품을 설명하고 있다. 아래 작은 사진은 꽃을 형상화한 철 조각품 ‘새벽 일기’. [사진작가 김도형]
대한민국에서 예술가로 산다는 건 고행의 길을 걷는 것과 같다. 세계 10위권의 경제 강국으로 올라섰다지만 예술 영역의 성장은 더디기만 하다. 작품을 구매하는 컬렉터 층이 늘고 있으나 벽에 거는 회화 작품에 쏠려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에 비해 크고 무겁고 고가에 속하는 조각 작품은 여전히 수요층이 드물다. 온전히 작품만으로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기란 쉽지 않다. 그런데 기꺼이 이 가시밭길을 걷는 이가 있다. 조각가 변숙경(51) 작가다.

<1> 조각가 변숙경

그녀는 누가 봐도 작고 아담한 체격에 소녀처럼 맑은 얼굴을 지녔다. 겉모습만 보면 수t에 달하는 대형 조형물을 다룬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그녀는 여성 조각가로는 드물게 흙을 빚거나 돌을 깎는 대신, 크고 두꺼운 쇠를 직접 자르고 구부리고 용접을 해서 작품을 만든다. 철을 다루는 솜씨가 근육질 남자 못지않다. 몇 마디 나눠보니 성격도 ‘철의 여인’처럼 단호한 면이 있다.

“조각으로 돈 많이 벌었느냐고요? 아마 빚이 더 많을걸요. 몇 해 전에는 차비가 없어서 집 밖에 못 나간 적도 있었어요. 그래도 단 한 번도 조각을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은 안 해봤어요. 조각 작업을 할 때 가장 행복하고 제일 잘할 수 있는 일이니까요. 다시 태어나도 조각가로 살고 싶어요.”

그녀는 자신의 길을 일찌감치 찾았다. 학창시절 취미로 시작한 그림이 조소과 진학으로 이어졌고 이후 자연스럽게 조각가의 길을 걸었다. 10년 뒤쯤 평생의 조각 소재가 된 철을 만나고, 그로부터 몇 년 후 무한한 창조적 영감을 주는 뮤즈(muse·예술적 영감의 원천) 거미줄과 조우하면서 그녀의 길은 더욱 분명해졌다. 문제는 그 다음. 마이웨이를 찾는 것까지는 비교적 간단했는데, 지켜내기란 결코 만만치 않았다.

“네 친구들은 다 교수가 됐는데 너도 편히 살면 안 되는 거니?”

나이 마흔을 바라보는 그녀에게 어머니는 하소연하듯 말하곤 했다. 또래 친구들처럼 학생들을 가르치거나 취미 정도로 하면 좋으련만, 굳이 조각가라는 고된 길을 걷는 딸을 어머니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작가로 살다 보면 한 번은 마주하게 되는 갈림길이 있다. 전업 작가로 살 것인가, 돈 버는 일을 병행할 것인가. 어느 쪽도 선뜻 택하기 어렵다. 전업 작가로 살자니 스스로 가난을 허하기 쉽지 않고, 그렇다고 경제 활동을 병행하자니 작품에 쏟는 시간과 에너지가 부족해진다. 진퇴양난의 연속이다. 변 작가에게도 그것은 풀지 못한 숙제였다. 겉으론 “엄마, 난 창업했잖아”라고 밝은 표정을 지었지만, 마음속에선 끊임없이 갈등의 소용돌이가 일었다.

“힘들었죠. 밖에선 작가로 인정해주는데 가족들은 ‘그거 돈벌이도 안 되는데’라며 한마디 툭 던져요. 가슴이 너무 아팠죠.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더라고요. 저는 하나를 손에 쥐면 다른 건 절대 생각을 못해요. 아무리 재빨라도 작가와 직업 활동을 동시에 할 수가 없어요. 그걸 너무 잘 알아서 오히려 결정이 쉬웠어요. 전업 작가의 길을 가기로 한 거죠.”

이런 선택의 밑바닥에는 언니가 있었다. 어릴 때부터 남달리 다정했던 세 살 터울 언니는 부모님 몰래 재료비를 챙겨주며 그녀의 작가 인생에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그러나 1995년 6월 29일 삼풍백화점이 무너졌고, 그녀는 언니를 잃었다. 그렇게 좋아하던 작업을 더는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몇 달 후, 그녀는 우연히 언니의 흔적을 발견했다. 사고 당일 언니가 통장에 넣어준 돈 50만원. 그 순간 언니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숙경아, 작가로서의 인생을 절대 포기하지 마. 네가 원하는 삶을 살아.”

이후 그녀의 작가 인생은 더욱 단단해졌다.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많은 돈을 버는 것보다, 천천히 가더라도 프로 작가로 살아남는 것이 나답게 생존하는 길임을 깨달은 것이다. 밤낮으로 작업에 매달렸다. 매년 수십 점 이상의 작품을 쏟아냈다. 작품 하나에 들어가는 시간과 노력, 재료비 등을 고려하면 대단한 다작이다.

그렇게 한 발 한 발 프로 작가로의 길을 내디뎌 가던 어느 날, 그녀의 자존심에 심하게 금이 그어지는 사건이 벌어졌다. 작업실 인근에 골프장 시설이 들어서면서 10년간 터를 다져온 부지를 강제 수용당했다. 그 과정에서 작품 수십 점이 훼손됐다. 보상을 요구했지만 돌아온 답변은 “수리비만 주겠다”는 것. 그녀의 작품을 ‘예술품’이 아니라 대량 생산이 가능한 ‘공산품’으로 취급한 것이다.

“오기가 생기더라고요. 내 작품 훌륭하다, 나 이런 작가다, 그들에게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전 재산 3억원을 털어 개인전을 열었죠. 그 덕분에 빈털터리가 됐지만 무모했던 오기가 뜻밖의 수확을 가져다주기도 했어요. 전시회를 계기로 제 작품의 가치를 인정해주는 사람들을 만났거든요.”

그녀는 요즘 세계적인 조각 도시인 이탈리아 피에트라 산타(Pietra Santa)를 수시로 오가며 새로운 작품을 구상 중이다. 루카현대예술센터(Lu.C.C.A. Museum) 관장 마우리치오 바니는 자청해서 그녀의 현지 매니지먼트를 맡고 있고, 아트갤러리 페트라르테디지오니(Petrartedizioni) 대표 지오바니 보베키는 의욕적으로 그녀의 작품집을 제작 중이다. 모두 전시회가 맺어준 인연이다. 9월께는 이탈리아에서 첫 해외 개인전도 연다. 유럽에서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는 셈이다.

강철을 보면 미동 없이 그 자리에 멈춰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미시세계의 눈으로 들여다보면 눈에 보이지 않는 소립자들이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다. 단단하고 강한 물질일수록 그 안의 움직임은 더욱 격렬하다. 강철이 강철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내면의 격렬한 움직임이 있기 때문이다. 그녀가 마이웨이를 지켜낸 힘도 그렇다. 단순하게 보면 남에게 지기 싫은 마음이 그녀를 지금의 자리로 이끈 것 같지만, 실은 죽을 때까지 작가답게 살고 싶다는 스스로를 향한 강한 오기가 그녀 내면에서 격렬하게 움직였기 때문이다.

그녀의 작품은 모두 ‘새벽 일기(Daybreak diary)’란 제목을 달고 있다. 그녀에게 새벽은 뮤즈 거미줄을 만난 때이자, 자신의 몸과 마음이 가장 창조적으로 움직이는 시간이다. ‘프로는 24시간 작가로 산다’는 신념을 가진 그녀에게 작업은 매일 쓰는 일기와 같다. 그녀의 마이웨이가 고스란히 담긴 제목인 셈이다.

그런데 단 한 점, 유일하게 다른 제목을 가진 작품이 있다. ‘에버 크라운(ever crown)’. 의도한 게 아닌데 만들어 놓고 보니 꼭 가시 면류관 같아서 이렇게 이름 지었다 한다. 마이웨이를 지키기 위해서는 내 꿈이 준 고통까지 한 몸에 끌어안고 기꺼이 가시밭길을 걸어야 한다는 것을, 30년간 내적 오기와 싸우며 그녀는 무심코 깨달은 것이다.

그녀는 60세쯤 되면 서서히 작업을 줄여나갈 계획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다르다. 오기로 만들어낸 유럽에서의 두 번째 전성기. 걸어온 길만큼 걸어가야 할 길을 발견한 그녀는 가슴이 뛰어서, 열정이 샘솟아서, 도저히 조각을 놓을 수가 없다. 면류관의 고통이 계속될 것임을 잘 알지만 그녀의 마이웨이는 결코 멈출 계획이 없다. 그녀의 새벽 일기는 영원히 현재 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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