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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영준의 사람과 세상] “간디·네루의 나라? 난 그들이 밉다” … 인도 기자 뜻밖의 반응

중앙선데이 2014.06.08 02:03 378호 26면 지면보기
1950년 6월 한국전이 발발하자 인도는 의료지원단을 파견했다. 사진은 인도 의무부대가 판문점에 차린 캠프 모습. [중앙포토]
남과 북 모두를 등지고 인도로 간 반공포로들의 이야기를 그린 최인훈의 소설 『광장』을 기억해 낸 것은 2000년 6월 초였다. 당시 국내는 김대중 대통령의 북한 방문(6월 12~15일)을 앞두고 잔뜩 들떠 있었다. 홍콩특파원이던 나는 무슨 취재를 할까 고민하던 중 이 소설이 생각났다.

<8> 인도와 한국, 그 후 60년

주인공 이명준은 해방 후 남북한 상황에 공히 환멸을 느낀다. 무질서가 넘치는 남한은 광장(공동체)은 없고 밀실(개인)만 존재하는 곳인 반면, 온갖 정치적 선동이 난무하는 북한은 밀실은 폐쇄한 채 광장만 강요하는 세상이다. 6·25 때 인민군으로 참전한 명준은 포로가 된 뒤 휴전 후 제3국을 택하고 선상에서 바다에 투신한다.

소설의 모티브를 제공한 인도는 한국전 당시 비동맹 리더 국가로서 6000명의 군인을 파견해 남북한 포로를 관리했다. 종전 후인 1954년 2월 2만2400t급 수송선을 보내 반공포로 76명을 인도로 데려왔다. 나는 이들이 바라보는 ‘분단 후 첫 남북 정상의 만남’이 궁금했다. 그래서 인도로 날아갔다.

“한국, 엄청난 발전도 스스로 부정”
현지에 살고 있던 반공포로는 두 명뿐이었다.
-현동화(68): 함북 청진 태생. 인민군 중위 출신.
-최인철(72): 함남 함흥 출생. 사진병 출신.

이들이 한국을 포기한 것은 이념 때문이 아니었다. 남북이 워낙 절망적 상태라 차라리 외국에서 살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76명 중 64명이 ‘자유와 풍요의 나라’ 미국을 종착지로 그리며 브라질·아르헨티나로 다시 떠났으나 대부분 현지에서 가난과 정신병에 시달리며 피폐한 삶을 꾸려야 했다.

인도에는 현씨 등 6명이 남았다. 똑같이 무일푼으로 출발했지만 이후 인생은 달랐다. 현씨는 성공한 사업가가 됐고, 최씨는 적수공권(赤手空拳)이었다.

두 사람은 북한의 실상을 체험한 탓인지 보통 한국인보다도 훨씬 우려 섞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북한이 경제난을 피하려고 정상회담 제의를 받아들인 것일 뿐 적화 야욕은 그대로라는 게 그들의 의견이었다.

현씨는 실패로 끝난 1948년 김구·김규식 선생의 평양 방문을 떠올렸다.

“16살 때였는데 갑자기 ‘타도 이승만·김구’라고 쓴 벽보들이 철거되고 제일 깨끗한 옷을 입으라는 등 북새통이 벌어지더니, 얼마 후 김구 선생이 교활한 김일성에게 당했다는 소문이 쫙 퍼집디다.”

현씨가 체험한 북한은 “가면을 쓰지 않으면 살 수 없는 나라”였다. 본인의 인민군 입대도 생존을 위한 위장이었다. 어쩌면 현씨도 『광장』의 주인공 명준과 비슷한 정신적 고뇌의 행로를 거쳤을 것이다. 다른 점이라면 한 사람은 생을 포기했고, 또 한 사람은 끝까지 살아남아 변화를 지켜봤다는 점이리라.

현씨가 1969년 다시 조국 땅을 밟았을 때 한국은 경제개발이 막 시작되고 있었다. ‘최고급’이라는 반도호텔에 묵었는데 정말 형편이 없었다. 현씨의 마지막 말이 내 뇌리를 찔렀다.

“그땐 인도가 훨씬 잘 살았어요. 그런데 이후 한국은 정말 상상도 못할 정도로 발전했는데, 아직도 이를 부정하고 불만을 품은 사람이 많더군요.”

“네루 업적은 인도판 케네디家 만든 것 뿐”
취재를 마친 뒤 며칠을 머물면서 수도 뉴델리 시내를 둘러봤다. 40도가 넘는 혹서에도 에어컨이 없는 차, 전기도 자주 끊어지는 낙후된 시설, 거리마다 반기는 구걸 인파, 낡고 지저분한 건물들, 코를 찌르는 자동차 매연…. 인구 1000만 명을 넘는 대도시지만 백화점은커녕 수퍼마켓도 없었고, 제일 좋다는 시장이 우리 서울 변두리 재래시장만도 못했다. 그때 나를 안내해 주던 인도 최대 통신사 PTI(Press Trust of India)의 뉴델리 지국장 요게쉬 마하트르가 소감을 물었다. 순간 말문이 막혀 적당히 둘러댔다.

“간디와 네루의 나라에 와서 기쁘다. 어렸을 적 그분들 책을 읽으면서 매우 감동했다.”

그때 그의 반응이 뜻밖이었다.

“나는 그들을 미워하네(I hate them).”

“뭐라고?”

“그들이 후대에 남겨준 것이 뭐지? 가난과 무기력….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던 1947년, 인도의 잠재력은 어느 나라에도 뒤지지 않았지. 그런데 이후 달라진 게 뭐지? 지금도 인구 대다수가 가난과 질병, 무지 속에서 살아간다네. 50년 전 우리가 도와준 한국은 엄청 발전했는데 말이야.”

그의 말은 어느덧 열변조로 바뀌었다.

“말레이반도는 얼마 전까지 정글지대였네. 그런데 지금 인도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잘 정비됐지. 왜 그런 줄 아나? 바로 마하티르라는 뛰어난 지도자를 만난 덕이지. 한국도 마찬가지야. 이승만과 박정희라는 걸출한 지도자가 있기에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는 걸세.”

한국을 여러 차례 다녀온 지한파 언론인이라 설득력이 있었다.

그는 한국이 이승만의 ‘친서방-자본주의(시장형·개방형 경제)’로 출발해 결국 박정희에 의해 산업화가 성공되고 이어 민주화를 이루게 됐다고 했다.

즉 이승만이 첫 단추를 잘 끼웠고, 박정희가 쿠데타로 집권하긴 했어도 과감한 외자 유치를 통한 기업 육성, 수출주도형 개방화 정책 등 탁월한 능력을 발휘해 한국을 부강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반면에 네루의 ‘비동맹-사회주의(국가주도형·폐쇄형 경제)’는 이상은 좋을지 모르지만 현실을 무시해 결국 인도인 대다수가 아직도 빈곤과 무지 속에 살게 만들었다. 제3세계 리더를 자처하면서 선택한 자주노선과 평등 이념 등 이른바 ‘네루식 사회주의’도 문제려니와 가난한 현실에서 산업화보다 민주화를 먼저 추진한 것도 잘못됐다는 것이다.

“결국 네루는 자기 집안만 인도의 케네디가(家)를 만들었을 뿐이지(He made Kennedy Family in India).”

그의 비꼬는 말처럼 인도 현대사는 3대에 걸쳐 총리를 배출한 네루 집안을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독립한 1947년부터 64년까지는 네루가, 이어 84년까지는 그의 딸 인디라 간디가, 91년까지는 그녀의 아들 라지브 간디가 대부분 총리로 지내면서 사회주의 이념에 따른 좌파 정책을 추진했다.

아이로니컬한 것은 라지브 간디가 암살된 91년 이후부터 인도가 문을 열고 자유경제와 시장 개방의 기치를 단 신경제정책(New Econoic Policy)을 추진했고, 이때부터 잠자던 인도 경제가 깨어나 달리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한 나라의 명운(命運)은 지도자, 그리고 그가 선택한 노선과 정책에 달려 있다는 요게쉬의 말이 실감났다.

인도가 폐쇄경제에서 개방경제로 전환할 때 가장 큰 수혜국은 한국이었다. 그 전에는 한국 기업들이 지구촌에서 ‘후발 주자’로 설움을 받았으나 인도에서 비로소 미국, 일본과 나란히 어깨를 겨루며 진출할 수 있었고, 결과는 한국 기업의 승리였다. 삼성, LG의 전자제품과 현대·대우 자동차가 인도 시장을 휩쓸었고, 일본과 미국에 버금가는 제품으로 인식됐다. 인도 명문가나 부잣집의 혼숫감 중 가전제품은 대부분 한국산이었다. 남한보다 36배나 넓은 국토(세계 7위), 20배가 넘는 인구(세계 2위)의 대국이지만 경제력은 질과 양에서 모두 한국에 추월당하고 있었다.

세월호가 준 메시지 “자기 책임 다하라”
그로부터 14년이 지난 2014년 6월. 북한은 고립무원이다. 남북관계도 최악이다. 역사적인 정상회담 후 불과 2년 만에 연평도 해전(2002년 6월)을 일으켰고, 햇볕정책하에서도 기어이 핵폭탄을 만들었다. 천안함·연평도 사건 등으로 끊임없이 우리를 괴롭히고 있다.

지난 5월 인도의 새로운 총리가 된 인도국민당(BJP)의 나렌드라 모디(64). [중앙포토]
인도는 주춤거리고 있다. ‘BRICs(브라질·러시아·인도·중국)’의 대표 주자로 떠오르는가 싶더니 2004년 네루의 국민회의당(INC)이 재집권해 10년간 통치하면서 후퇴했다. 그간의 실정(失政)에 화가 난 인도 국민들은 지난 5월 총선에서 네루의 증손자 라울 간디 대신 야당(인도국민당·BJP)의 나렌드라 모디를 총리로 선택했고, 모디는 취임 후 ‘네루 흔적 지우기’에 착수했다.

한국은 명암이 교차되고 있다. IT산업과 한류(대중문화)는 기대 이상으로 선전하고 있으나 전반적으로 경제 활력은 저하되고 자살·이혼율은 세계 최고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한국은 지난 60여 년간 지구상에서 가장 성공한 나라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미국과 손잡고 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를 추구하면서 나라의 틀을 잡았고, 박정희가 이룬 산업화 토대하에서 김대중 등이 민주화를 이뤘다.

한국의 현대사는 이토록 세계가 인정해 주는 ‘빛나는 성취의 역사’지만 정작 2014년 한국은 자긍심 대신 자학에 빠져 있지는 않은가. 지난 수천 년 내려온 가난을 극복한 이들이 바로 우리 앞선 세대인데도 우리는 비난만 하고 있다. 어느 상황시대에도 존재하기 마련인 갈등과 모순을 이승만·박정희·김대중 탓으로 돌린다.

지금 앞에 놓여 있는 시대적 과제를 해결해야 할 이들이 바로 우리 세대인데도 우리는 외면하고 있다. 성장 동력은 고갈되고 갈등과 분열은 심화돼도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는 이가 없다. 선대가 가져다 준 풍요로움은 누리면서도 고마워하지 않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은 남에게 떠넘기는 사회는 결코 흥할 수 없다.

그런 관점에서 ‘세월호 참사’가 주는 메시지는 명백하다. 재난이 일어났더라도 사회 구성원 각자가 자기 할 일을 제대로 했다면 이렇게 비극적이고 참혹한 결과로까지 이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소설 『광장』의 주인공 명준이 조국을 등지고 자살로 생을 마감할 당시는 ‘내’가 아니라 ‘상황’이 문제였다. 그만큼 시대적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그러나 60년이 지난 지금은 ‘상황’이 아니라 ‘내’가 문제다. 감사할 줄 모르고, 책임지지 않으려는 개인에게서는 그 어떤 희망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또 다른 ‘광장’ 속에 살고 있다. 좌절하고 말 것인가, 살아남을 것인가, 나아가 또 다른 기적을 이룰 것인가. 지난 60년의 세월에서 우리는 희망을 찾아야 한다.



함영준 조선일보 사회부장·국제부장 등을 역임하고 국민대 겸임교수를 거쳐 청와대 문화체육관광비서관, 평창동계올림픽유치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냈다. 저서로 『마흔이 내게 준 선물』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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