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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노버에서 온 음악 편지] 청중과 교감하는 ‘마법의 순간’ 늘 꿈꾸지만…

중앙선데이 2014.06.08 02:08 378호 27면 지면보기
피아니스트 손열음씨가 강원도 원주 집에서 어린 시절 연주하던 피아노를 치고 있다. [중앙포토]
연주 여행 중인 친구 A가 평소라면 전혀 하지 않을 말들을 메시지로 보내고 있다. 묵고 있는 호텔이, 아침에 먹은 밥이 얼마나 끝내 주는지, 좀 전에 만난 누가 얼마나 상냥했는지, 목소리를 듣지 않아도 묻어 나오는 좋은 기분이 숨겨지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조금 전 연주를 마쳤겠다. “연주는 어땠어?” “어? 응… 사실은, 나 오늘 무지 잘했다?” 문득 또 다른 친구 B가 떠올랐다. 얼마 전 열렸던 그의 문제의 연주회가 동영상 사이트에 올라왔다. 실연을 보는 것 같은 긴장감 속에 플레이 버튼을 누른다. “나쁘지 않은데…?” 하는 생각이 들을수록 ‘괜찮기만 한걸’로 바뀌어 간다. 관객의 반응도 뜨겁다. 몇 번이나 커튼콜을 하는 영상 속의 그는 행복해 보였다. 하지만 그 무대를 내려오던 순간부터 그는 며칠이나 우울증에 허덕였다.

잘된 연주와 안 틀린 연주

김대진 선생님께 레슨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어느 날, 선생님이 질문하셨다. “너에겐 어떤 연주가 ‘잘된 연주’니?” ‘잘된 연주’가 있느냐 없느냐를 물으신다면… 그건 확실히 ‘있다’로 대답하겠는데… 왜 잘됐느냐고 물으신다면… 그냥 잘돼서 잘된 건데… 음… 고심 끝에 나는 “안 틀린 연주?” 하고 말해 버렸다. 억지로 쥐어짜낸 대답이 나 스스로도 동의할 수 없는 것이라는 걸 선생님도 알아차리셨다. “그래, 안 틀린 연주가 잘된 연주는… 아니지?”

혹자에게는 어쩜 그럴 수도 있겠다. 안 틀리고자 하는 연습만 하는 내 친구 C를 보노라면 저런 사람들은 한 음도 안 틀리고 무대를 내려오면 하늘을 나는 기분이려나 싶다. 하지만 내 친구 A와 B, 그리고 나에게는 아니지 않은가. 또 다른 친구 D는 ‘실수가 없는 실황 음악은 뭔가 문제가 있는 거’라고까지 한다. 진짜인지 거짓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서 무대에서 실수하는 순간이 짜릿하다며. 하여간에 안 틀린 연주가 잘된 연주가 아님은 통계적으로 맞는 말일 테다.

B는 멀쩡하게 연주를 끝내 놓고도 왜 우울증에까지 빠졌을까? 그가 지휘자의 느린 템포 때문에 시작도 하기 전에 절망했음은 분명해 보였다. 리허설 때도 너무 느리다고 생각해 몇 번이나 간곡히 부탁했건만 오히려 훨씬 느린 박자로 연주를 시작한 오케스트라에 무대 위의 솔리스트가 할 수 있는 일은 사실 없다.

1986년 5월 5일자 타임지 커버를 장식한 호로비츠의 모스크바 연주회.
나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 2005년 참가했던 쇼팽 콩쿠르의 결선날. 유일한 리허설인 당일 아침, 바르샤바 도심 한복판에서 대규모 교통사고가 나 첫 순서인 내 리허설에 오케스트라 단원의 반이 도착하지 못했다. 제일 큰 문제는 지휘자가 못 온 거였다. 결국 리허설은 보조 지휘자와 하는 둥 마는 둥 끝냈고 그날 밤 무대에서 나는 생전 처음 맞춰 보는 지휘자의 예상치 못한 도입부 템포에 당황했다. 지금이라면 좀 더 이기적으로 대처했겠지만 그때는 그저 투철한 앙상블 정신에 무조건 오케스트라에 맞추려고 안간힘을 썼던 기억이 난다. 오케스트라의 템포는 10t 트럭이라 생각하면 된다. 2인용 스포츠카가 2㎝ 꺾을 핸들을 오케스트라는 서너 바퀴 돌려야 턴이 가능하다. 한마디로 쉽게 움직여지지 않는다는 소리다. 솔리스트는 모래주머니를 달고 뛰는 느낌이니 이럴 때는 뭘 해도 잘되지 않는 것 같은 게 사실이다.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했고 음악이 다 끝나곤 힘차게 악기를 잡고 일어섰는데… 관객의 반응이 너무나도 기대 이하였다. 실로 접해 본 적 없는 최악의 반응이라 느꼈다. 웃어지지도 않고, 빨리 끝내고 싶은 생각에 커튼콜에도 제대로 임하지 못하다 결국 박수도 그쳤다. 그런데 연주가 끝나고 나를 보러 온 사람들마다 ‘반응이 그렇게나 좋은데 왜 웃지도 않고 금방 들어갔느냐’는 거였다. 날 위로하고자 없는 말을 지어 낸다고 생각했는데 몇 년 후에야 그 연주 영상을 보게 됐고 그 말들이 새빨간 거짓말은 아니었음을 알았다. 10년이 지난 지금은 무대 위의 내가 느끼는 관객의 반응이란 내 머릿속에서 미리 만들어 낸 환상 같은 것이라 선을 긋는다.

그렇다면 정말로, ‘잘된 연주’란 뭘까? 바르디 선생님이 강조하시는 ‘마법의 그 순간’을 만든 연주? 선생님은 음악회에 왔던 관객이 집에 돌아가서까지 또렷이 기억해 모든 사람과 공감하고 싶은, 그러나 누구에게도 딱히 설명할 길이 없는 단 한 번의 ‘매지컬 모멘트’라도 있었던 음악회는 성공한 거라 하신다. 그거라면 호로비츠가 완벽한 예다. 화려한 테크닉과 환상성 가득한 독창적 음악세계가 그의 장기인 것 같지만 역사적인 그의 모스크바 귀환 리사이틀을 보면 주무기는 따로 있음을 알 수 있다. 1000여 명의 관객을 일제히 압도하는 피아니시모.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단 한 음. 탄성마저 허락되지 않는 그 순간. 연주하는 우리도 분명 느낀다. 실로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는 ‘신앙적 체험’과도 같은 그 쾌감. 그런데 지극히 관객의 반응에 좌우되는 이 순간이야말로 혹 순수한 환상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16년 전 김대진 선생님은 “앞으로 잘된 연주란, 계획대로 충실히 이행하고 내려오는 것으로 하자, OK?” 하셨었다. 그렇다. 여기는 이렇게, 저기는 저렇게, 전체적으로는 어떻게. 계획한 대로 다 해냈다면 누가 뭐라든 스스로는 “다 이루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혹 그뿐이었다면? 내 계획대로만 다 펼치고 내려왔을 뿐 청중과의 교감도, 기억에 남을 만한 짜릿한 순간도 없었다면? 그도 아니면 혹 객관적으로 그다지 좋은 연주가 아니었다면? 모르겠다, 그땐 어떻게 되는 것인지. 이러나저러나 하여튼 답이 없는 것은 분명한데도 스스로의 실체 없는 잣대로 매 연주마다 일희일비하는 게 우리 음악가다. 모든 사람이 자기 삶에서 그렇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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