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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고대사] 율령 반포 법흥왕, 왕과 형제·자녀만 성골로 규정

중앙선데이 2014.06.08 02:19 378호 28면 지면보기
신라 제23대 법흥왕에서 제28대 진덕여왕까지 성골 종족이 살던 일종의 신성 공간(성역)이었던 경주 월성(제5대 파사왕 22년인 101년부터 왕성의 하나가 됨)의 궁궐 터. 성골의 거주 구역이었던 삼궁(三宮)은 월성의 대궁(大宮), 금성의 사량궁(沙梁宮), 만월성의 양궁(梁宮)이다. 왕의 누이, 왕과 왕의 형제의 딸들도 혼인해 삼궁을 떠나기 전까지는 성골 신분을 가질 수 있었다. [사진 권태균]
신라 골품제도의 최상위 신분인 성골(聖骨)·진골(眞骨)이란 말은 21세기 한국에서도 통용되고 있다. 어떤 조직에서 출신이나 성분을 따질 때 단골로 사용된다. “저긴 성골이잖아” 이런 식이다. 하지만 정작 성골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성골과 진골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13> 신라 성골의 탄생

『삼국유사』와 『삼국사기』는 성골 왕의 시작에 대해 서로 다르게 기술하고 있다. 『삼국유사』 ‘왕력’ 편에는 제23대 법흥왕(法興王)에서 제28대 진덕여왕(眞德女王)까지를 중고(中古) 시대라 하고, 성골이 왕위를 이은 것으로 나온다. 『삼국사기』 진덕여왕 8년조에는 “국인(國人)들이 시조 혁거세(赫居世)에서 진덕(眞德)까지 28왕을 성골이라 일컫는다”고 적고 있다. 두 사서 모두 제29대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부터는 진골이 왕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부모 양쪽이 왕족이면 성골이 되고 한 쪽이 왕족이 아니면 진골이 된다는 견해가 널리 퍼졌다(이병도, ‘고대 남당고’, 『서울대 논문집』, 1954). 그런가 하면 제24대 진흥왕(眞興王)의 장남인 동륜(銅輪) 태자(제26대 진평왕의 아버지)의 직계비속으로 구성된 소가계 집단이 성골을 주장해 만들어졌다는 의견도 있다(이기동, ‘신라내물왕계의 혈연의식’, 『역사학보』 5354합, 1972).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삼국유사』를 따르더라도 법흥왕에서 제25대 진지왕(眞智王)까지 성골 왕의 존재를 무시한 것이어서 문제가 된다.

삼국유사와 삼국사기 기록엔 차이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의 차이는 법흥왕 이전의 왕들도 성골 출신이었느냐에 있다. 그런 의미에서 법흥왕대의 변화가 중요하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법흥왕이 율령(律令)을 반포하면서 새로운 성골 종족(宗族·집단)이 만들어졌다는 것이 필자의 견해다.

『삼국사기』는 법흥왕 7년(520) 율령이 반포되고 처음으로 백관의 공복(公服)과 그 주자(朱紫)의 질서가 정해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골품 신분에 따라 관리가 입는 공복의 색깔이 주색(붉은색·성골), 자색(자주색·진골), 비색(붉은색·6두품), 청색(청색·5두품), 황색(누른색·4두품)으로 달랐다. 율령 반포 이전과 이후 사이에 커다란 변화가 생긴 것을 뜻한다. 법흥왕이 신라 서울인 왕경의 지방행정구역인 6부에 사는 사람들(六部人)의 복색과 주자의 질서를 정한 것은 성골·진골과 6두품에서 1두품까지의 왕경인의 신분을 정하고 그에 따른 규정을 만든 것을 의미한다. 이는 신라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온 개혁이라 하겠다.

필자는 왕과 그 형제의 자녀들로 이루어진 종족을 성골로 보아왔다(이종욱, ‘신라 중고시대의 성골’, 『진단학보』 50, 1980). 종족은 인류학에서 이야기하는 리니지(lineage)에 해당하며, 공동 조상을 가진 살아 있는 혈족을 의미한다. 그런데 종족의 범위는 몇 대의 조상을 시조로 하느냐에 따라 그 규모가 달라진다. 중요한 사실은 종족에 속한 성원들은 정치·경제·종교적 지위나 권한이 개인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종족집단에 속한다는 것이다(Ernest L. Schusky, 『Manual for Kinship Analysis』, 1972). 신라인들은 기본적으로 부계(父系) 종족을 유지했다.

신라의 성골 종족은 왕을 중심으로 만들어졌다. 왕의 아버지(세상을 떠났지만)를 시조로 하는 살아 있는 사람들로 구성된 부계종족이 성골이 됐다. 구체적으로 성골은 왕과 그의 형제, 그리고 그들의 자녀들로 구성된 형제 공동가족이었다. 거기에 더해 왕과 형제의 딸들로 출궁하지 않고 있던 사람들이 포함됐다(이종욱, 『신라골품제연구』, 1999). 이때 정치적 지위인 왕위는 성골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장치가 됐고, 친족 집단인 성골 종족은 왕을 배출하는 확고한 사회적 집단이 됐다.

실제로는 법흥왕의 아버지인 제22대 지증왕(智證王)을 시조로 하는 형제 공동가족이 첫 성골 종족이 됐다. 이에 따라 법흥왕과 그의 동생인 입종(立宗) 갈문왕이 성골이 된 것은 분명하다. 『화랑세기』에 따르면 법흥왕에게 진종(眞宗, 어머니가 확실치 않아 성골인지 단정하기 어려움) 전군(殿君)과 보현(普賢) 공주라는 두 동생이 더 있었다. 보현 공주는 법흥왕이 재위하고 있는 동안, 그것도 혼인을 해 남편의 집으로 가기 전 왕궁에 거주할 때에 한해 성골이었다.

법흥왕이 세상을 떠난 뒤 조카인 진흥왕이 일곱 살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며(『삼국사기』 4) 그의 아버지인 입종 갈문왕을 시조로 하는 새로운 성골 종족이 만들어졌다. 진흥왕에게는 만호라는 누이동생과 숙흘종이라는 남동생이 있었다. 그런데 『화랑세기』를 보면 이들은 입종 갈문왕과 지소 사이에 출생하지 않았기에 성골 신분을 가질 수 없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진흥왕과 사도황후 사이에는 동륜(銅輪)과 금륜(金輪)이라는 아들이 출생했다. 이 두 아들은 성골이었다. 진흥왕은 566년 동륜을 태자로 삼았다(『삼국사기』 4). 동륜은 572년 3월 진흥왕의 후궁 중 한 명이었던 보명을 범하러 보명궁에 들어가다 큰 개에게 물려 죽었다(『화랑세기』 『6세 세종』 조). 그래서 금륜(제25대 진지왕)이 태자가 되었다.

김춘추는 진골로 강등된 용수의 아들
576년 8월 진흥왕이 세상을 떠나고 진지왕이 왕위에 오르면서 진흥왕을 시조로 하는 새로운 성골 종족이 만들어졌다. 동륜의 아들이었던 백정(후에 제26대 진평왕·眞平王), 백반(후에 진정 갈문왕), 국반(후에 진안갈문왕)이 성골이 됐고, 진지왕의 아들이었던 용수와 용춘도 물론 성골이 됐다.

진지왕이 그의 어머니인 사도태후 등에 의해 폐위되고, 왕위는 동륜 태자의 아들이며 진지왕의 조카인 백정(진평왕)에게 넘어갔다. 579년 진평왕이 즉위하면서 진평의 아버지 동륜을 시조로 하는 새로운 성골 종족 집단이 만들어졌다. 진평왕이 즉위하는 순간 동생인 진정 갈문왕, 진안 갈문왕과 그들의 자녀들(선덕·천명·진덕 등을 포함)이 성골이 된 것이다.

폐위된 진지왕과 그의 아들인 용수와 용춘은 성골에서 진골로 신분이 떨어졌다.이것이 족강(族降)이다. 진지왕계 종족인 용수와 용춘은 살아있는 동안 성골과 진골 두 신분을 가졌다. 그리고 603년 용수와 진평왕의 장녀 천명(天明)의 아들로 태어난 김춘추(金春秋·태종무열왕)는 아버지의 신분을 따라 태어나며 진골이 됐고, 654년 왕위에 올랐지만 성골이 되지 못하고 진골 신분을 가지게 되었다.

진평왕과 진정 갈문왕 그리고 진안 갈문왕의 삼형제는 딸은 낳았으나 아들을 낳지 못했다. 그 결과 『삼국유사』 ‘왕력’ ‘제27 선덕여왕’조에 성골의 남자가 사라졌다(聖骨男盡)고 나오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 비록 여자지만 성골 신분을 유지하고 있던 덕만(제27대 선덕여왕)과 승만(진덕여왕)의 즉위가 가능했다.

법흥왕에서 진평왕까지는 성골 종족의 남자를 왕으로 삼았다. 왕위 계승은 왕의 아들만이 아니라 성골 종족으로 왕의 다음 세대에 속한 사람이면 가능했다. 실제로 진흥왕·진평왕의 즉위는 부자 간이 아니라 조카에게 왕위가 계승된 것이다. 성골 종족의 왕위 계승 원리에 따르면 아들에게 왕위가 넘어가거나 조카에게 넘어가는 데에는 차이가 없었다.

성골 남자와 정실 사이 자식이면 성골
성골의 거주 구역은 성역(聖域)이었다. 신라 골품제의 특징 중 하나로 거주지에 따른 신분 편성을 들 수 있다. 성골의 거주 구역은 대궁(大宮)·사량궁(沙梁宮)·양궁(梁宮)의 삼궁(三宮, 『삼국사기』 39, ‘직관’ 중). 삼궁은 성골이 거주하던 신성 공간 즉 성역이었다. 대궁은 월성(月城), 사량궁은 금성(金城), 양궁은 만월성(滿月城)에 있었다(이종욱, 『신라의 역사 I』, 2002). 왕의 누이, 왕과 왕의 형제의 딸들도 혼인해 삼궁을 떠나기 전까지는 성골 신분을 가질 수 있었다. 월성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황룡사는 성골 왕들의 신성함을 보장하는 사찰이 되었다.

성골의 경우 성골 남자들의 정궁(正宮) 부인들이 생산한 자녀들이 성골이 되었다(이종욱, 『화랑세기로 본 신라인 이야기』, 2000). 그 결과 성골 종족은 그 규모가 작아졌기에 종족을 유지하기에 매우 취약한 면이 있었다. 부계제 전통사회의 경우 아이를 못 낳거나 여자만 생산해 부계 종족을 이어나갈 수 없는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삼국유사』에서 구분한 신라 중고시대(법흥왕~진덕여왕)의 경우 진평왕을 마지막으로 성골 종족 내에 남자가 모두 사라졌다. 이로써 성골의 왕위 계승에 비상조치가 이루어진 것을 볼 수 있다. 여왕의 즉위가 그것이다. 그리고 진덕여왕을 마지막으로 성골이 모두 사라졌다. 왕위는 비워둘 수 없는 자리였기에 성골과 가장 가까운 혈족이었던 김춘추가 칠성우의 도움으로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성골이 만들어지기 전에도 신라인들에게는 엄격한 신분제가 있었다. 실제로 성골 신분을 만든 율령반포 이전에는 “옛날부터 진골(古之眞骨)들이 왕위를 이었다”(『화랑세기』 ‘6세 세종’ 조)는 이야기가 나온다. 596년 용춘공이 화랑 중 우두머리 화랑인 풍월주가 되었을 때 “골품이란 것은 왕위(王位)와 신위(臣位)를 구별하는 것”이라고 한 말이 나온다(『화랑세기』 ‘13세 용춘공’조). 여기서 말하는 왕위는 성골이, 신위는 진골 이하 신분을 가진 자들이 차지하는 자리였다.



이종욱 서강대 사학과 졸, 문학박사, 서강대 사학과 부교수, 교수, 서강대 총장 역임, 현재 서강대 지식융합학부 석좌교수. 『신라국가형성사연구』 등 22권의 저서와 다수의 논문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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