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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인택의 미시 세계사] 노르망디의 동맹국

중앙선데이 2014.06.08 02:27 378호 29면 지면보기
제2차 세계대전의 명운을 가른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지난 6일로 70주년을 맞았다. 한적한 노르망디는 이날 외교의 장으로 변했다. 기념식에는 미국·영국·프랑스·러시아·독일의 국가원수나 정부수반이 자리를 함께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도 참석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독일 국민이 나치로부터 해방되는 전기를 마련한 역사적인 작전임을 분명히 한 셈이다. 아울러 침략의 과거사를 반성하고 재발 방지를 약속하면서 나치와의 단절을 확인하는 의미도 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이날 정상 오찬장에서 러시아의 크림반도 병합 이후 처음으로 별도로 만나 대화를 나눴다. 푸틴은 우크라이나의 페트로 포로셴코 대통령 당선자와도 만나 휴전방안 등을 의논했다. 노르망디에서 역사는 현재진행형이었다.

1944년 6월 6일 벌어졌던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미국·영국 등 연합군 병력이 당시 독일이 점령 중이던 프랑스로 진격하는 ‘오버로드 작전’의 시작이었다. 오버로드는 노르망디 상륙에서 8월 25일의 파리 입성까지 일련의 독일 점령지 재탈환 작전을 가리킨다. 이 가운데 노르망디 해변에 상륙해 교두보를 확보하는 작전만 떼서 ‘넵튠 작전’으로 부른다. 작전 개시 일시를 가리키는 ‘D-데이, H-아워’라는 군사용어가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되면서 이를 ‘D-데이 작전’으로 부르는 사람도 있다.

이 작전에는 미군·영국군뿐 아니라 독일에 점령됐던 국가의 망명객들이 영국에서 조직한 자유프랑스군·자유네덜란드군·자유벨기에군·자유체코슬로바키아군·자유그리스군·자유노르웨이군·자유폴란드군도 대거 참전했다. 6일 하루에만 약 16만 명의 병력이 노르망디를 비롯한 프랑스 북부에 상륙해 사상 최대 규모의 상륙작전으로 기록된다. 이날 1200대의 항공기와 5000여 척의 선박이 동원됐다. 공수작전과 상륙작전이 병행됐다. 8월 말까지 약 300만 명의 병력이 영불해협을 건넜다.

이날 하루 연합군은 공식 전사자 4414명을 포함해 1만2000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독일군은 최고 9000명이 숨지거나 부상했다. 전체 오버로드 작전에서 연합군은 22만636명, 독일군은 최고 45만 명의 사상자를 각각 냈다. 민간인은 집계 주체에 따라 2만5000~3만9000명이 숨진 것으로 알려졌다. 비극이다.

연합군의 유럽 진격작전은 이미 한 해 전인 1943년 5월12~27일 미국 워싱턴에서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 대통령과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가 각각 이끈 대표단이 개최한 워싱턴회담에서 결정됐다. ‘트라이던트(삼지창)’라는 암호명으로 불렸던 이 회담에선 이탈리아 전선, 독일 폭격, 태평양 전선과 함께 유럽 진격 일자에 대한 합의가 이뤄졌다.

이 계획엔 정치적 안배가 철저히 고려됐다. 여러 나라가 힘을 합쳐야 하는 연합작전의 고충을 잘 보여 주는 역사적 사례다. 지휘부 선임부터 그랬다. 미군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장군이 연합군 원정군 최고사령관을 맡고, 영국군의 버나드 몽고메리 장군이 미군·영국군·캐나다군 등이 포함된 21집단군 사령관으로서 지상군을 지휘하기로 했다. 상륙 해변도 미군이 유타와 오마하를, 영국군이 스워드와 골드를, 캐나다군이 주노를 각각 맡았다. 미군과 영국군 최고 지휘부의 자존심 대결과 갈등은 상륙작전은 물론 전쟁 내내 고민거리였다. 동맹국끼리 연합군을 형성해 벌이는 전쟁에선 적을 상대하는 것보다 동지 사이의 조정이 더 힘들고 중요하다는 사실을 잘 보여 준다. 한국이 잘 연구해야 할 대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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